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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축서사]

금곡 무여
큰스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습니다.
1966년 이후로 상원사,동화사,송광사,해인사,관음사,칠불사,망월사 등 제방 선원에서 20여년 동안 수선 안거하시며 칠불사,망월사 선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또한 조계종 초대 기초선원 운영위원장 및 전국선원수자회 대표를 역임하셨고 2018년 5월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를 품수하셨습니다.
1988년부터 축서사에서 365일 언제나 문을 열고 불자들을 맞고 계시며 한국선의 가풍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온힘을 쏟고 계십니다.


큰스님에게 직접 들어보는 ‘나의 행자시절’
(2003년 12월 월간 해인)

본디 출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리 절집에 들어와 사십년 가까이 살아온 것을 보면 운명이었는가 보다.
나의 출가는 내가 이 생에 걸어야 할 길에 빨려 들어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곱게 자라 직접 체험이 없던 내가 간접체험이라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고교시절이었다.
소설에서부터 성현들의 전기물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삶과 죽음이라는 물음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아졌으니, 이러한 진지한 물음들이 출가에의 끈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군대에 가 있으면서도 이러한 물음이 내재해 있다가, 휴가 때 우연히 들른 조계사에서 《반야심경》 강의를 들은 것이 불교와 첫 인연이 되었다.
유명한 분들의 강의나 다양한 분야의 독서에서 맛보지 못했던, ‘아, 이것이로구나’ 했던 느낌으로 시작된 《반야심경》에의 감동은 많은 불교 책들을 읽게 했고 불교철학에 심취하게 했다.
진하게 느끼진 못했지만, 공空사상에 묘한 여운과 마력을 감지했던 것 같다.
제대를 하고 괜찮은 직장엘 다녔으나 그리 신명이 나질 않았다.
‘나’라는 존재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좋은 직업을 갖는다 해도 제대로 사는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려면 정신적인 수행은 필수다. ‘나’를 찾는 정신적인 수행 없이는 외형적인 성과가 있더라도 결국엔 대단찮고 허망한 일임을 느낄 수밖에 없고, 남의 집 머슴살이하듯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 아니던가.
직장을 그만두고 한 일주일쯤 수양차 해인사 암자로 들어갔다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내가 걸어가야 할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송광사와 몇 군데를 거쳐 깊이 들어간 곳이 오대산 상원사였다.
그곳에서 한 해 조금 넘게 행자생활을 하면서 지금 돌아봐도 ‘잘 살았지 않았나’ 하는 시절을 보냈다.
예닐곱 분의 수좌스님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상원사에서의 생활은 오롯이 공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주변의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누군인가’ 하는 의심만을 가졌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뭣고’ 화두가 되었다.
《초발심자경문》 하나만 읽었을 뿐, 출가 후 한 칠 년은 책을 전혀 보지 않고 참선만 했다.
그래서 나는 출가 후에도 한참 동안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지 못하는 수행자로 살았다.
오대산의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나무를 많이 해야 했고 또 겨울엔 하루 종일 불을 아궁이에 넣어야 했다.
또 공양주와 채공을 맡아했으니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화두만을 생각하면서 ‘아, 이것이로구나.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젖곤 했다.
행자시절 이후 ‘이 길 뿐이다’ 하여 한 이십 년 정도 선방에만 다녔으니, 깊게 보면, 나의 출가에의 인연은 참선과 만나기 위한 수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본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또 말이 많지 않았지만 행자시절에 참선한다고 애쓰다 보니 자연스레 말이 끊겨 거의 묵언하다시피 했다. 눈은 늘 앞 3미터 앞에 고정되어 있었고 가급적 옆을 쳐다보지 않고 지냈다.
행자시절 이후로도 그랬다. 선방 이외에 꼭 필요한 일 아닌 경우말고는 어딜 다니지 않았고 웬만하면 사중내에서도 다니질 않고 지냈다.
그래서 선방에 한 철 내내 있어도 선방스님들 얼굴이나 알지 후원의 공양주가 누군지 행자님들이 누군지 모르고 산 적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정도로 그렇게 삼십여 년을 살았다.
행자시절, 말없이 화두 하나에 늘 몰입해 있었으나 단 하나 마음에 괴로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고 온 가족에의 미안함이었다.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의무를 버리고 떠나온 일이 지중한 은혜를 입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에게 미안해서 한동안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녔다.
그 미안함에 대한 괴로움이 나를 경책하게 하여 공부에 애쓰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출가 후 언젠가 어머니가 찾아와 얼굴 한번 뵌 일 말고는 단 한번도 속가의 집엘 가보지 않았으니, 지금도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고향에선 집 떠나면 못살 것 같던 내가 문득 출가하여 연락 한 번 없이 수십년간 집에 들르지 않은 일을 두고 ‘독하다 독하다 그만한 사람 있을까’ 했다고 한다.
행자시절, 나의 은사이신 희섭 스님은 늘, ‘부지런히 공부해라. 승려 노릇 깨끗하게 잘해라. 언제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한암 노스님의 손상좌로 노스님을 오랫동안 깍듯하게 잘 모셨던 우리 노장님에게 언젠가 내가 ‘한암 노스님과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아주 검소하고 여법하게 사셨다’는 말씀을 했다.
말씀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모두 법답게 사시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저리 사는 것이 중노릇을 잘 하는 것이로구나, 바로 큰스님의 모습이구나’ 느꼈다고 한다.
그 시절 ‘상원사 김치가 짜냐, 강릉 바닷물이 짜냐’ 하는 이야기가 있었 다고 하니 얼마나 살림을 알뜰하고 빈틈없이 검박하게 꾸려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행자는 무릇 물질이 풍요하더라도 늘 절약해가면서 검박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을 적당히 관리해가면서 주변을 다스리지 못하면 수행다운 수행을 하기 어렵다.
춥고 배고프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발심하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수행자는 그저, 조금 부족한 듯 못난 듯 살아야 바른 생각을 견지하기 쉽다.
어느덧 예순의 나이를 훨씬 넘어 상좌를 스무 명쯤 둔 세월을 살았다.
얼마 전 누군가 ‘스님은 어떤 스승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느냐’고 물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 무얼 잘못했거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 ‘과연 부처님은 이럴 경우 어떤 마음가짐을 하셨을까’ 하고, 늘 부처님에게 비유하고 부처님을 생각했다.
내가 한평생 지향한 것은 부처님이었다.
해서 주변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얼른 덮어버렸다.
내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부처님에게 호소하듯이 그분을 믿고 의지해가면서 하나하나 따져서 고치려고 애썼다.
출가한지 십 년이 지나면서 조사 어록을 보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행장 중에서 중요한 대목들을 기록해 놓고 수시로 즐겨 보고 있다.
그분들의 판단과 말씀, 그리고 삶의 모습에 비추어서 나를 알고 경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스님들이나 나의 상좌들에게 늘,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또 상좌들을 나무랄 때는 옛 스님들은 이렇게 사셨는데 너희들은 왜 이렇게 사느냐 하면서, 내 이야기보다는 옛 위대한 삶을 살았던 스님들을 예로 들곤 한다.
내가 주변 승려들에게 강조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승려 노릇 깨끗하고 여법하게 하라’는 것이다. 계행이 없으면 정(定)으로 들어갈 수 없고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요즘 출가자들은 계율에 별 관심이 없고 계율정신이 많이 해이해졌다. 계행이 청정해서 여법하게 살아야 내면도 갖춰지고 지혜가 나타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늘 화두를 놓지 말아라’ 하는 것이니, 자신이 하는 수행에 푹 빠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늘 자비하라’는 것이다. 수행자가 냉랭하면 안 된다. 자비가 뚝뚝 흘러야 한다.
화두 이외에는 별로 생각하는 것 없이,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어섰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출가자가 된 보람으로 환희로웠던 행자시절은 내 출가의 길에서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그때 공부한 것이 큰 이익이 되었고, ‘잘 보냈다’고 회고되는 그런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