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서사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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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축서사]

창건·연혁과 문화재

축서사(鷲棲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本寺)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末寺)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굽이쳐 내려오다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1번지
문수산(文殊山) 기슭, 해발 800미터 고지의 명당에 자리잡은 천년고찰이다.


축서사
鷲棲寺
동쪽으로는 태백산맥이있고 서쪽에는 저 멀리 명산 소백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남쪽에는 청량산(淸涼山)이 우뚝서있고 안산으로는 화산(華山)이 침착하게 서있다.
해발 1,206m의 문수산은 한때는 수많은 사찰과 전설이 풍성한 명산이다


축서사(鷲棲寺)란 이름은

독수리 축(鷲),깃들서(棲),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 보살님을 뜻한다.
또 다른 가설로 험준한 뒤쪽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의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 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체가 나는 곳으로 달러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해서 문수산이라 한듯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등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도솔암,천수암등 세 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축서사 보물


석조비로자나부처님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

보광전 석조비로자나불 불신의높이 108m, 어깨넓이 55m, 머리높이 31cm, 대좌높이 96cm로 8각 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이 불상은 신라하대(9세기경)많이 조성되었던 일련의 비로자나불 좌상의 모습과 비슷하다.
신체는 곧고 반듯한 어깨, 넓은 가슴, 넓게 벌린 무릎과 함께 현실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분명하며 통견(通肩)의 법의는 옷 주름이 등간격의 평행의 문선으로 이루어져있고 몸에 밀착되어 신체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옷 주름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양쪽 팔에 걸쳐 양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무릎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옷주름은 다른 불상에서와는 달리 물결식의 주름으로 표현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행 계단식 의문(衣紋)과 함께 9세기 후기의 불상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244호),각연사 비로자나불상(보물433호)등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불상으로서 당시의 조각기법 및 신앙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커다란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가는 눈, 활형의 눈썹, 일자로 다문 입으로 인해 얼굴에는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불상 뒤에는 정기유(正己酉)라는 연대가 보이는데 불상을 보수했던 연대로 추정된다. 이 연대가 조선 영조 5년(서기 1729년)인 것으로 볼 때 200여년 전에 보수가 된 것 같다. 대좌(臺座)는 신라하대에 유행한 8각 대좌로서 상중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대석에는 8각에 사자 1구씩을 양각했고 중대에는 공양상 및 합장한 인물상 상대에는 화문(花紋), 연화문(蓮花紋)등이 조각되어 있다. 뒤에는 화려한 꽃무늬나 불꽃무늬의 목조광배는 상부만 남아있다.

괘불탱화(보물1379호)

지금부터 200여년전인 서기 1768년 무자년에 점안한 괘불로서 크기(가로 550m, 세로 880cm, 면적 48.4제곱미터)는 대형이다.
입상 아미타불로서 성스러운 존안과 특이한 육계, 풍만한 가슴과 부처님 상으로 보기 드물게 화려한 의상 및 특이한 후광배는 불자로 하여금 신심을 돈독하게 하고 발심케 한다. 큰 회화이면서도 적당한 구도와 섬세하고 뛰어난 솜씨는 관람자를 감탄케 한다.


축서사 문화재


석등(문화재자료 제158호)

석등은 높이 2.3m쯤 되는데 원래는 석탑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앞으로 옮겼다. 귀꽃이 장식된 복련하대석(覆蓮下臺石), 간주(幹柱)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된 대석위에 화사석(火舍石)이 옮겨져있다.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57호)

이 석탑(石塔)은 선방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층기단과 3층 옥개석(屋蓋石) 이상이 없어졌으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뛰어난 모습을 남기고 있다. 하층 기단부(基壇部)는 갑석(甲石)만이 원 위치에 남아 있으며 하대갑석(下臺甲石) 밑에도 잘 다듬어진 기단 면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탑을 둘러싸고 있으나 모두 이탑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3층 기단은 면석이 한 돌로 되어있으며 가운데 탱주를 하나씩 양각하였다.
옥신석은 사방에 우주만 새기고 탱주는 없다.
1층 옥개석과 2층 옥개석도 한 돌로 되어있으며 2층 옥신석은 1층에 비해 높이가 매우 낮은 편이다.
신라 이래 보존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오던 이 탑은 원래는 3층이었다고 한다 일제때 일본인들이 도과하여 파괴하고 탑속에서 나온 사리와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가버리고 옥석 사리함만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이 사리함에 서기로 환산 867년이란 연대가 있어 신라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잘 다듬었던 흔적이 보이는 맷돌, 주춧돌, 석축등 석재들이 사찰 주변 곳곳에 흩어져있는 것으로 볼 때 축서사는 상당히 큰 가람이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