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법석

  >   산중법석   >   산중법석

산중법석

義湘大師 行狀(혜창스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24-03-09 16:20 조회152회 댓글0건

본문

義湘大師 行狀

 

의상스님은 625(진평왕 47)부터 702(성덕왕 1)까지 살다간 신라의 승려이다. 해동화엄종의 초조로 추앙받으며,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원효스님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로 주목받는다. 그 이름 표기와 관련하여 三國遺事에는 義湘으로 되어 있으나, 기록에 따라 義相, 義想이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의상스님의 속성은 金氏이고 아버지는 韓信으로, 경주의 진골귀족 출신이다. 열 아홉 살에 경주 皇福寺로 출가하였다.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의상스님은 원효스님과 중국유학을 시도하는데, 요동에서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혀 첩자로 오인 받고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11년 후에 유학을 시도하여 기어이 당나라로 가게 된다. 당나라 終南山 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 제2조인 (智儼 602~668)에게 8년 동안 화엄을 배웠고 중국의 고승들과 교류하며 불교를 공부하다 670년 귀국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그 해에 洛山寺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 즈음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는 왕의 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 언덕 땅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役事를 중지하기도 하였다.

 

의상스님은 676(문무왕 16)에 태백산 浮石寺를 창건함으로서 화엄대교를 전할 복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 절을 中心으로 전개한 그의 전교 활동은, 新羅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리고 훗날 日本에도 영향을 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의상스님이 화엄교를 전파하고 있을 때, 그를 공경한 國王이 노비와 토지를 주겠다고 제의했던 일과, 의상스님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들은 眞定이라는 가난한 젊은이가 그의 문하로 달려가 머리를 깎았던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의상스님이 태백산에서 밝힌 法燈이 신라 사회를 두루 비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스님은 특히 수행과 교육에 힘써 그 문하에서 3천여 제자가 배출되었다고 전하는데, 제자 중에서도 고승으로 꼽히는 이들이 여럿 있다. 특히 유명한 열 명의 제자로 悟眞, 智通, 表訓, 眞定, 眞藏, 道融, 良圓, 相源, 能仁, 義寂 등이 꼽힌다.

 

의상스님은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팔공산 美里寺, 지리산 華嚴寺, 가야산 海印寺, 상왕산 普願寺, 계룡산 甲寺, 계람산 華山寺, 금정산 梵魚寺, 비슬산 玉泉寺, 모악산 國神寺, 부악산 淸潭寺 등으로 일명 華嚴十刹이라 한다.

 

해동화엄의 初祖 부처님의 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진리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이다. 최치원이 傳燈妙業이라고 했던 것도, 일연이 三國遺事에서 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여러 꽃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구나 라고 찬양했던 뜻도 여기에 있다.

 

의상스님이 신라에서 화엄을 전하기 20여 년이 되던 어느 해에 당나라에 있던 동문 法藏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듣자오니 上人께서는 귀향하신 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無盡緣起를 거듭 선양하여, 새롭고 새로운 佛國에 널리 이롭게 하신다고 하오니 기쁨은 더욱 큽니다. 이로써 如來滅後佛日이 휘황하게 빛나고 法輪이 다시 굴러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한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였다. 법장의 편지를 통해서도 활발했던 의상스님의 전교 활동을 알 수 있다.

 

의상스님은 太白山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法燈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태백산에서 밝힌 하나의 등불은 열로 백으로 불어나고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無盡燈이 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는 참으로 큰 인연, 이로 인해 眞理가 빛날 수 있기에,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 있어도 참다운 善知識 만나기 어렵고, 훌륭한 스승 있어도 發心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 그러나 의상은 그 이름만을 훔친 스승이 아니었고, 그 제자들 또한 배움만을 취하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신라의 화엄교는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의상스님은 황복사에서, 부석사에서,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화엄을 강의했다.

 

어떤 때는 그의 저서 法界圖, 또 어떤 때는 華嚴經을 강의했고, 법장의 探玄記 20권을 풀이하기도 했다. 40일을 강설한 경우도 있고, 장장 90일 동안 강의에 전념한 경우도 있다. 그의 가르침은 방황하는 나그네가 옛 고향집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었고, 이름에만 집착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진리의 根源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깊은 뜻을 갖고 있었으며, 우리들 五尺의 범상한 몸, 이것이 곧 法身 그 자체임을 깨우쳐 주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 물어 올 때면, 의상스님은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살핀 다음에 의문 나는 점을 풀어 주되,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의상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주 훈계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의상스님은 법장의 探玄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