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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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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명심 작성일06-06-02 12:34 조회2,633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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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선거 날이다. 그래서 아침 일찍 걸어서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투표를 마치고 운동장에 나왔다. 그런데 운동장 한쪽에 있는 그네에 할머니들이


그네를 타고 계셨다. 머리에는 궁궁이(천궁)를 꽂고 있었다. 오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단오구나, 양력만 보다보니 음력 단오는 생각도 못했다. 남편과 나도 그네를


탔다. 지금은 단오는 명절로 생각 안 하는데 내가 어릴 때 친정에서는 단오를


명절이라고 했다. 단오 전날 오후에 집안 머슴들이 큰 마당에 모여서 짚으로 그네 줄을


어른 팔목 만하게 수 십 발을 꼬아서 뒷산 언덕 소나무에 그네를 만들었다. 큰나무에 잘 올라가는 천석아배가 낭떨어지 쪽으로 길게 뻗은 소나무가지를 엎드려서 기어나가면 밑에서


우리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태연한척 진정시키고 얼른 그네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해마다 하는 행사라 천석아배는 능숙하게 나무에 휘감고 조이고 굵은 작대기로 비녀를 꽂아놓고는 그네 줄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아부지가 올라가서 이리저리 굴려보고는 됐다 하시면 모두 집으로 내려왔다. 빨리 타고 싶지만 집안 어른들이 다 타시고 나야 아이들 차례가


돌아온다. 단오 날 아침에는 꼭 미역국을 끊이고 미나리 무침 고등어구이가 고정음식으로 정해저 있었다. 아침 먹고 나면 80이넘은 할매를 부축하고 엄마 큰엄마 집안 여자들이 모두


그네를 타러 갔다. 더위를 물리치고 모기를 쫒는다고 했다. 우리는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빨리 내려오라고 독촉을 했다. 언니들은 길게 땋은 머리에다 붉은 갑사댕기를 달고 나비처럼 잘도 탔고, 오빠들은 하늘을 걷어 찰 듯 두발을 위로 힘껏 올리면 그네 줄이 활시위처럼


굽으면서 출렁 거렸다. 밑에서는 감탄사가 연발하고 신이 난 오빠는 입으로 솔잎을


따서 밑으로 뿌렸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기를 쓰고 솔잎을 따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내가 9살쯤 되던 해 큰집에서 점심을 급히 먹고 그네 타러 가자, 제종조모 집에 나보다 4살 더 많은 제종고모가 먼저 와서 그네를 잡고 있었다. 나이가 더 많지만 집안이다 보니 항상 같이 놀았고 천성이 순해서 우리는 이름을 부르면서 만만하게 놀았다.


나는 그네를 빼앗긴 것 같아 무척이나 억울했다. 고모는 나는 보자 약을 올리기라도 하듯


“어라 추천이야 올라가신다.” 하면서 소리를 치더니 “턱” 하는 소리가 나고 빈 그네줄이


흔들거렸다. 고모가 나를 보자 줄을 제대로 안 잡고 타다가 떨어졌고 팔이 부러졌다.


제종조부가 와서 낫으로 그네 줄 중간을 썩 베어버리자 팔 부러진 것 보다 바보같이 떨어져서 그네를 맘껏 못 타게 한 게 더 야속 했다.


그 뒤 고모가 팔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집안에서는 그 고모를 바느질 잘하고 살림살이 야무지게 잘한다고 칭찬이 대단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그 고모는 바지 저고리를 만들고 봄에 누에를 키워 명주를 짜서 판 돈으로 논 사는데 보탰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시집을 갔는데 내가 둘째아이를 업고 친정에 가니까 고모도 첫아들을 낳았다고 제종조모가 좋아했다. 그리고 2,3년 후에 친정 가니까 그 고모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시집에서 온갖 약을 다하는데 차도가 없다고 대소가에서 걱정을 했다. 시집도 넉넉한 집이 아닌데 논마지기 있던 것 치료비로 다 팔아 쓰고 이제는 시집에서도 손을 들었다고 제종숙이 안타까워했다. 얼마 후 아기는 시집에 두고 위자료조로 논 900평을 받아가지고 고모는 친정으로 왔다. 벌써 30년이 넘었다. 고모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가끔은


고함을 지르면서 동네에 다니기도 하지만 얼마나 일을 열심히 잘 하는지 친정집에 업이라고 소문이 났다. 소꼴도 베어오고 논에 모 고르기 풀 뽑기 밭 메기 집안에 고추 따러 다니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 하고, 고모 덕분에 새내아제가(고모오빠) 부자 됐다고 했다.


정말로 아제네는 시내에 아파트도 사고 해마다 땅을 사서 아제신수가 훤해졌다.


그전에는 문중에 참여도 안하고 잘 나서지도 않았는데 요즈음은 시내에도 자주 나오고


집안에 인심도 쓰면서 문중에 간섭도 많이 하는 것은 돈의 위력이고


저렇게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것 은 고모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내가 어쩌다 친정 가면 그 고모는 들에 가고 10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명절 날 일 하는 게 아니라고 남편을 부추 켜서 야외로 나가기로 했다. 반찬은 있는 데로 도시락, 간식을 싸가지고 친정동네를 지나 무작정 가기로 했다.


이제는 다 떠나 객지에 나가 살고 폐허가 된 동네에서 지난날의 단오기억을 찾고 싶었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가면서 저기 누구 논인데 모를 아직 안 심었네, 무슨 아제 고추도 많이 심었네, 하면서 사방 살피기에 바빴다.


단오 날이라 들판에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한 논에 모 모들그고 있는 사람이 그 고모 같아서 남편한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차에 내려서 논둑으로 걸어갔다.


모자도 안 쓰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머리는 옛날 여자아이 단발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지매 뭐 하는고” 하고 말을 건네자, “누구이껴” 하고 쳐다보는 얼굴은 주름살투성이고 몸은 야위어서 팔목은 가느다란데 손은 농부 손보다 더 거칠고 마디가 굵었다.


“알아봐 내가 누눈지” 하자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니 누구아이라 하는데 나를 알아보는 게 반갑기도 하고 어쩌면 대화가 가능 할 것 같았다 .


고모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예기를 했다. 내 시집동네를 정확하게 대면서 아직도 거기 사냐고 물었다. 나는 아지매 아들 안부를 물어 보았다. 지금은 장가를 갔을지도 모르는데 한번 가 보았느냐고 했더니 “내가 이런데 지가 날 찾아야지” 하면서 얼굴에 그리운 기색이 역역했다. 그리고는 슬픈 눈빛으로 나의 남편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고모 남편하고 내 남편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술도 같이 마셨다. 고모 눈빛이 그 옛날 자기남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좀 쉬어 가면서 일하라고 하자 이런 게 뭔 일이냐 면서 논에서 안나왔다.


나는 팔을 잡아 억지로 논둑에 앉히고 참외 한 개 음료수 한 병을 새참으로 주었다


처음에는 사양하더니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는데, 그 착하던 고모가 이 지경으로 살아가는 게


가엽고 불쌍해서 눈물이 나왔다. 같이 자라면서 놀던 모습, 정신이 온전했더라면


지금쯤 손주 재롱도 볼 텐데 아무 댓가도 없는 일꾼 노릇에다 기약할 수 없는 삶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물꼬에 흐르는 물소리 뻐꾹이 소리는 더 없이 평화롭고 한가로운데 논둑에 처량한 몰골로 앉아 있는 고모가 정말로 가슴이 아팠다. 내가 일어서자 “자고가나”하고 서운하듯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잘 가게이”하고 은근스럽게 인사를 했다.


나는 차에 올라서도 눈물이 자꾸 나왔다. 남편도 따라서 눈물이 글썽 했다.


친정집 뒷산 그네가 있던 자리는 무성한 풀로 덥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네를 타던 내 어릴 적 모습이 보이고, 그네에 떨어져서 고통스러워하던


고모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댓글목록

연화심님의 댓글

연화심 작성일

월명심님 오랜만에 글 대하니 너무 반갑습니다...안녕하시죠?? 보살님 글 읽을 때마나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듯 했는데 오늘은 눈물까징 보태고 있네요 ...건강하세요_()_

혜산님의 댓글

혜산 작성일

오랜만이십니다. 잘지내시는지요?  언제 한번 뵙고싶네요. 강의있는날 한번 들러주십시요.

심자재님의 댓글

심자재 작성일

부회장님 오랜만이네요..다음주 큰스님 법문 있는 날인데 얼굴이라도 뵙고 싶어요...//

법융님의 댓글

법융 작성일

우리네 보통집안 얘기같이 공감이 가며 마음속에 와 닿는군요  단옹날에 관한 이야기는 버들피리 소리처럼 들리고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군요, 잠시 우리의 집안 대소사 이야기처럼 정이 풍겨납니다  그리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가본듯 하네요  감사히 앍었습니다. 

월명심님의 댓글

월명심 작성일

감솨 감솨 합니다 _()_ 혜산스님  총무님 연화심님 법융님 많은 관심 거듭 감사드립니다. 한 번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