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깨치고 나서 제일성으로 인류 역사상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 기특하구나,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었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초롱초롱한 지혜와 천재적인 지혜, 덕스러운 상, 복상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대단한 분입니다. 뭣 하나 험 잡을 데가 없는 분입니다.
 
누가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기다렸듯이 적당한 진리의 말씀을 설파하셨습니다. 그런 지혜를 일체중생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다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사부대중도 누구나 불성이 있습니다. 근본은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모든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과 자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사부대중이나 참선자는 이 말씀을 확신하는 데서 마음공부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나도 본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다. 나도 불성이 있다. 그리하여 나도 본래 부처다, 라는 말을 확실히 믿고 조금도 의심없이 출발하셔야 합니다.
 
즉 목표를 확실히 믿고 분명히 시작해야 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불자는 확고부동한 마음에서 불교공부를 하고,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분명하고 빠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누군 불성이 있고 본래는 부처인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셨는데 보통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왜 어렵고 괴롭게만 살아가는가?
 
원인은 번뇌망상(煩惱妄想)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만 사는 게 아닙니다. 끝없는 옛적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육도(六道)를 만행합니다. 수백 생 수천 생을 살아오면서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이 쌓이고 쌓여 두터운 업이 되어 분수에 넘치게 탐욕심(貪慾心), 탐착심(貪着心)을 일으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미워하고 분심을 내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나 도리에 어두워 온갖 번뇌망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안하고 괴롭고 혼란스러워 근본마음이 흐리고 탁해져 참나는 볼 수 없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행한다. 도를 닦는다, 선을 한다는 것은 다 같은 말인데, 마음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는 것을 공부 중의 공부, 진정한 공부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닦는가? 마음은 형상이 없습니다. 저 허공(虛空)과 같습니다. 허공과 같이 텅텅 비었기 때문에 걸레나 행주나 물체를 닦듯이 닦을 수 없습니다. 그 흐린 마음 탁한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것이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마음을 쉰다,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놓는다는 같은 뜻입니다. 마음을 쉬고, 비우고 놓는다는 것은 일체 생각을 안 하고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 어른은 “마음을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했습니다. 일체 마음을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쉬면 곧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임제(臨濟)스님은 “쉬기만 하면 깨달아서 그대로가 부처님처럼 청정한 법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수행법 중에 최상은 화두참구선법입니다. 화두참선법의 요령은 진정으로 발심(發心)해서 간절하게 눈물이 날 정도로 참구하는 것입니다. 발심하지 못하면 이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발심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입니다. 보리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보리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큰 깨달음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확고하고도 철저한 마음을 내는 것을 발심이라고 합니다. 마음공부하는데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마음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 말고 발심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라”고 했습니다. 발심 있는 곳에 화두 있고, 화두 있는 곳에 발심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공부야말로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은 일체 모든 그림도 그릴 수 있으며, 마음은 화공(畵工)과 같아 어떤 그림도 그린다고 했습니다. 마음공부는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발심하려고 애쓰고 노력하기 바랍니다.
 
수행법 중에 최상의 수행법은 간화선(看話禪)입니다.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화두를 공부하는 선, 화두를 참구하는 선입니다. 그럼 화두란 무엇인가, 인간이 궁극적으로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 가운데 문제입니다.
 
화두는 부처님이나 역대조사가 우주만유(宇宙萬有)와 인간의 근본실상(根本實相) 즉 생명의 근원과 진정한 행복에 대해 깨달음의 세계 보여준 법문 중의 법문입니다. 보통 법문이 아닙니다. 화두는 이런 대단하고 심오한 법문이라 말길이 끊어지고 어떤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법어입니다. 사량분별심으로는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고,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결해야할 근본문제입니다. 자신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각별한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화두는 오직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옛 선사 말씀에 “화두 공부는 간절 절(切)자 한자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스님은 참선하는 데는 간절함 한마디가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화두 참구에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화두는 오직 간절하게만 참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절함은 무엇인가요. 아주 절실하게 성심 성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것처럼 절박한 마음 갖는 것을 절실함이라 합니다. 며칠 밥을 굶은 먹은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이,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늘 밥 생각하듯이 화두를 참구하라는 것입니다. 70~80된 노파가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을 걱정하듯이 해야 합니다. 자식과 단둘이 살던 노모가 아들이 군대를 갔으면, 얼마나 걱정되고 보고 싶겠습니까. 대문만 열려도,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아들이 온 것처럼 한달음에 달려 나갈 것입니다. 이처럼 마치 노파가 아들 생각하는 것처럼 간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세 살 먹은 아이가 가출한 어머니만 생각하듯이 간절하게 참구해야 합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무리 위해 줘도 오직 어머니 생각뿐입니다. 그렇게 아이가 어머니 생각하듯이 오직 화두만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선지식은 “참선자는 간절 절(折)자를 늘 이마에 붙이고 하라”고 했습니다. 참선자는 간절 절자 한자면 족합니다. 화두참구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간절 간절하게만 하면 됩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 화두입니다.
 
요즘은 수행법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간화선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간화선이 최상승법 또는 최선의 수행법이라고 하는데, 간화선의 장점, 특징이 무엇인가요?
 
첫째 간화선은 사중선(四衆禪)이라는 것입니다. 사중이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을 말합니다. 사부대중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스님들이나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깨칠 수 있는 선이 화두선이라는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근대 고승인 만공스님에게 한 남자가 공부가 안된다고 푸념을 했습니다. 만공스님이 물었습니다. “네가 장맛을 아느냐? 이 공부는 장맛만 알면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공부는 의식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라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 되는 분도 “나도 잘 할 수 있다” “나도 부처님과 꼭 같은 불성을 가지고 태어난 본래는 부처다” 다만 안할 뿐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 공부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간화선은 생활선(生活禪)이라는 것입니다. 간화선 수행은 일상이 그대로 공부요, 공부가 그대로 생활이 됩니다. 수행이라면 앉아서 좌선만 하는 줄 아는데, 간화선은 일하면서 수행하고 수행하면서 일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좌선을 위주로 하면 득력하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득력(得力)을 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도 화두가 여여한 그런 상태가 되면 일을 하면서, 노동을 하면서, 직장 일을 하면서,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예를 들어 농사일이나 고되고 힘든 일을 하면서 간화선의 진정한 의정(擬定)이 나서 화두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들리면 힘이 덜 듭니다.
 
화두에 힘을 얻고 나와 화두가 융합되고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면 일상의 삶속에서 대상이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농부가 논밭에 나가서 김을 매고 농작물을 가꾸는 고된 일을 하는데도 힘이 들려서 괴롭고 힘든 줄 모르고 수월하게 일 할 수 있고, 주부라면 싫증이 날만한 매일 같은 집안일도 싫다는 생각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할 수 있으며, 노동자가 땀을 흘리며 공사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놓치지 않고 피로한줄 모르고 담담하게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장인은 화두를 놓치지 않고 힘든 줄도 모르고 괴롭다는 생각도 없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화두가 분명하게 들릴 때는 사고를 하고 무엇을 구상하면서도 화두는 변함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하며 수행하는 수행법은 번뇌가 많고, 졸음이 많고, 건강이 허약한 사람에게는 좋은 수행법입니다. 현대인에게 맞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총림에서는 아침저녁에는 좌선 위주로 정진하고, 낮에는 들에 나가서 종일 운력을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말 그대로 일하면서 수행하고 수행하면서 일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일하면서 수행하는 풍토는 자급자족하는 사원경제를 확립하게 만들었고, 이후 총림이 상주 대중 1500여명에서 3000여명에 이르는 대도량이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선종사찰은 크게 번창했습니다. 중국의 사대법난(四大法難) 때는 제 종파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일제히 몰락 했을때 유독 선종만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새롭게 번창해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조사선의 선풍을 드날리게 되었습니다.
 
간화선의 장점은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정이 몰록 일어나면 확 집중이 되고 깊게 들어가 깨치기가 쉽습니다. 종장(宗匠)인 대혜(大慧)선사는 “오로지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아야 하며, 이 깨달음이야 말로 선이 존재하는 관건이다”고 강조했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선은 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화두선이야말로 깨달음까지 도달하고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습니다.
 
그럼 화두선을 하면 어떤 효능이 있고, 변화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인은 깨달음까지는 너무 대단하기 때문에 ‘어렵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 처럼 생각하는데, 요즘 사람의 눈높이와 근기에 맞춰 깨달음까지의 부수적인 이익, 효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선을 하면 안심(安心)이 되고, 깊어지면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안 되는 화두라도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참구하다가 보면 진정한 의정이 몰록 나타납니다. 그러면 놓을래야 놓을 수 없이 버릴래야 버릴 수 없이 화두가 분명하게 들립니다. 더 지극하게 참구하면 더 분명하게 확실하게 들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들끓던 번뇌와 망상이 다 사라집니다.
 
살다가 보면 이런 망상 저런 괴로움, 불안과 공포, 시기와 질투, 노여움과 화도 낼 수 있는데, 그런 마음이 다 없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겠다, 테러를 하겠다, 세상이 고민하는 사회악도 다 사라집니다. 부정부패도 사라지고, 천인공노할 패륜아나 파렴치범도 사라집니다. 요즘 북한처럼 핵으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어리석고 가증스러운 생각도 사라집니다.
 
세계인이 선수행을 하루 한 시간씩만이라도 한다면 이 지구촌이 조용해지고 살만한 세계로 변할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북한에 진정한 불교, 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불교가 있다면 국가 정치이념이 달라지고 행동철학이 변할 것입니다. 어떻게 변하느냐, 자비광명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게 들끓어서 괴롭고 불안하던 온갖 생각들이 사라지면 마음이 아주 고요해 일부러 생각을 하고 기억을 더듬어도 고요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은 맑아집니다. 어떤 때는 너무 맑아서 자기를 억제하기도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몸은 아주 가벼워지고 때로는 새털처럼 가벼울 때도 있고, 자기 몸뚱이조차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 너무 편안해 꼬집어도 아프지도 않고, 찬물을 뒤집어써도 덤덤하기만 해서 이러다간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닌가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안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화두선입니다.
 
옛어른 말씀에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됐지 더 바랄게 있느냐” 했듯이 더 바랄 것이 없이 행복을 느낍니다. 이 묘한 기분은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오묘한 기분입니다. 마음의 평화만 느껴도 온 몸에서 봄기운이 돌 듯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데 즐거움까지 느끼면 인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이 변해도 상당히 변합니다. 흔히 팔자는 고칠 수 없다고 하는데, 팔자도 고칠 수 있습니다.
 
작년부터 힐링(Healing)이란 말이 세상의 화두가 됐습니다. 힐링이란 몸과 마음을 편하게 기분 좋게 하고 병을 치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힐링은 도에서, 마음공부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화두가 성성하게 들리면 북적북적하는 곳에서도, 제주도 올레길에서 느끼는 바닷바람보다도 더 진정한 힐링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우리 육신은 주인공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떠난 어떤 치유도 진정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공부를 잘하면 진정한 힐링이라고 생각하면서 간화선을 하기 바랍니다.
 
몇 년 전에 경제사정이 좋았을 때는 웰빙(Wellbeing)이나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웰빙은 안락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하고, 웰다잉은 멋진 죽음을 일컫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삶이고, 누구나 바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외형적으로 잘 먹고 호화롭게 살아도 사실은 괴롭습니다. 물질은 적당한 것은 좋으나 너무 많아도 걱정이 되고 괴로움이 됩니다. 그런 괴로움도 화두가 되면 완전히 다른 삶이 됩니다. 그 자체가 웰빙이 되고, 웰다잉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웰빙이나 웰다잉도 오묘한 법열을 느낄 정도에 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경계에만 돼도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수행의 진가를 거의 체험할 수 있습니다.
 
   
 
화두선을 하면 지혜가 개발됩니다. 화두에 진정한 의정이 일어나서 일체의 번뇌나 망상이 끊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맑아집니다. 화두가 더 힘차게 들려 아주 고요해지면 더 밝고 깨끗해집니다. 밝고 깨끗해진다는 것은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고 근본자성(根本自性)이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여러분도 본래는 부처입니다. 근본바탕은 부처님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바탕이 같다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 즉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맑아지면 그 근본지혜가 드러납니다. 그 근본지혜가 드러나는 것을 머리가 좋아진다. 기억력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기계발이라고 합니다.
 
학문으로 얻은 지혜는 한정이 있고, 그 배운 범위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참선을 하여 마음을 깨치면 그 지혜는 한이 없습니다. 비유컨대 선수행으로 얻은 지혜는 태양과 같고, 학문으로 얻은 지혜는 반딧불 같다고 합니다.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학문으로 배우고 안다고 까부는 사람보고 “네가 아무리 까불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고 합니다.
 
참선은 젊은 사람일수록, 남보다 더 잘 살고 성공하고 출세하려는 사람일수록, 머리를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해야하는 수행법입니다.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수행습관을 자기계발 하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참선을 잘하면 범부가 부처가 되고, 둔재가 천재되고, 무능한 사람이 능력자가 되기 때문에 인간재생법(人間再生法)이라고 표현하는 분도 있습니다.
 
   
무여스님 법문에 앞서 조계사 회화나무 합창단이 음성공양을 하고 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쥬리반타가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분이였습니다. 부처님이 무얼 시킬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라면 잊어버리고 우두커니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참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너는 쓸고 닦기만 해라”고 했습니다. 쥬리반타가는 쓸다가 닦는 일을 잊고, 닦다가 쓰는 일을 잊으면서 아주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꾸준하게 애쓰고 애쓰다 보니, 자기계발이 됐습니다. 그래서 남방소승불교의 최고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기특하게 생각해 경전의 여러 군데에 쥬리반타가가 나옵니다. 쥬리반타가 같은 분도 천재적인 깨달음 얻은 수행법입니다.
 
선 수행을 잘하면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선 수행을 잘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몸도 편안한 상태가 되어 오묘한 법열을 느끼는 경계가 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좋아집니다. 이런 경계에서는 우선 몸은 맑고 가벼워집니다. 맑고 가벼워지면 기분은 저절로 좋아집니다. 또 육체 깊은 곳에서 묘한 즐거움까지 느끼면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좋은 기분과 행복을 느끼면 웬만큼 안 좋던 건강도 어느 사이에 좋아지고,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기능이 원만해지고 신진대사가 촉진됩니다.
 
옛날 스님들을 보면 100세 이상 사신 분이 많습니다. 옛 어른 말씀에 “수행이 지극하면 노쇠해서 시들어 가거나 병약한 사람도 고목에서 꽃이 피듯 건강을 되찾고, 노화방지도 되어 장수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수행을 잘하면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수행해서 건강을 되찾기 바랍니다. 선 수행은 특히 신경계통의 병에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스트레스나 노이제로 등 정신관련 질환에 특효가 있습니다. 화두에 집중하는 경지가 되면 효과가 나기 시작합니다.
 
참선을 잘 하면 신통(神通力)이 생깁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신통한 경지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신통력이란 보통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 걸림이 없이 통하는 것이 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세계는 불가사의하다고 합니다. 수행을 해 보면 신통한 경계를 느끼면서 불가사의한 것이 바로 공부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많습니다.
 
어느날 정진을 한창 열중하고 있는데, 무심히 얼굴을 들어 전면을 주시하니 갑자기 벽이 사라지고 방밖의 정경이 펼쳐집니다. 놀라서 자세히 집중하니 방 박뿐만 아니라 원근(遠近)에 관계없이 몇십리 몇 백리 밖에 까지 보았다는 분도 있습니다. 더 자세히 중시하니 더 환하게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천안통(天眼通)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때 정진이 설을 때의 일입니다. 강원도 모처에 도인스님이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오대산 자락이었습니다. 도인스님이라는 분은 노스님으로 촌로(村老) 같았는데, 눈이 아주 맑았습니다. 그 스님은 하루 종일 밭에 가서 일하면서 공부하는 일과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앉을 때는 때로는 졸기도 하지만, 벼락같이 앉아 있기만 하기도 했습니다. 밤샘을 예사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진이 분명하게 될 때는 무섭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공부를 하는데, 그 스님이 무릎을 치면서 “큰일 났네”하고는 등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스님 왜 그러십니까” 노스님은 “큰일 났소. 여기서 4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도집에 불이 나서 한참 타고 있소”라고 답했습니다.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저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신도집을 갔습니다. 가서 보니 신도집에 불이 나서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던 그 스님은 어디가 얼마큼 탔는지를 정확히 말씀했습니다. 저는 뒤통수라도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로 천안통이라 합니다.
 
천안통이나 타심통 외에도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신족통(神足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의 경지에 다할 수 있습니다. 화두선 수행은 신통력이 생길 정도로 대단한 힘과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습니다. 신통력과 큰 깨달음과 생사자재(生死自在)는 역사적으로 봐도 간화선에서만 주장했습니다. 간화선이 어떤 수행법보다 수승하다는 것입니다.
 
선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가지 효능은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행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는 이익이라 볼 수 있습니다. 화두 참선의 목표는 스스로 자기의 성품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란 완벽하게 인격을 갖춘 최고의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깨달아서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것입니다. 생사를 초탈한다는 것은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 생사를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 대해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잘하면 여러분도 생사를 초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란다. <대중박수> 
 
사월초파일이 다가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 태어나시기 전에 도솔천 내원궁에 계셨습니다. 어느날 인연이 다한 것을 알고 어디에서 태어날까 우주 곳곳을 자세하게 살피고 살펴 태어난 것이 인도의 가빌라성 정반왕 아들이었습니다.
 
보통사람은 자기가 태어나는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행위로 자기 뜻과 관계없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정할 수 있습니다. 즉 ‘맞춤형 태생’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신도님들은 이해 안 되는 분이 계시겠지만, 태어나는 것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
 
태어나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중국의 어느 스님은 점심공양을 잘 하고 대중에게 “오늘 나는 갈라네”라고 했습니다. 대중 대부분이 어디 볼일 보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어디로 가시느냐”고 대중이 묻자 그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잘 있게”라고 말했습니다. 그 스님은 당신 방으로 가서 좌복에 앉아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대중은 그제야 울고불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다섯 시간 만에 다시 깨어나 “갈대가 돼서 가는데 왜 우느냐”며 대중을 야단쳤습니다. 그 스님은 대중을 위해 일주일간 안심법문(安心法門)을 하고 “잘 있어라”인사를 남기고는 다시 돌아가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그렇게 그 스님은 생사를 자재(自在)했습니다. 생사자재와 생사해탈, 그게 불교이고, 선입니다.
 
존경하는 신도 여러분, 참선하는 사람이라면 늘 선정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화두가 늘 성성해야 합니다. 놓으려야 놓을 수 없고, 늘 순일하게 그런 상태까지 꼭 화두를 들고 정진 하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대중박수>
 
그러면 마음은 아주 맑고 깨끗해집니다. 지극하게 고요해 지고 가벼워집니다. 그 상태가 극락입니다. 십만 억 국토를 지나 극락이 있다고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극락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분이 와 계시지만 이 순간 여러분이 몰록 화두의 진정한 깨달음 본다면, 여러분 자신이 부처입니다. 앉은 자리가 바로 부처자리인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오래 살다가 보면 멀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까지 하는데 마음을 닦으면 다릅니다. 평소에 밉고 보기 싫던 그 아내나 그 남편이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내가 수행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집에 가서 남편이나 아내의 얼굴을 보시면 바로 느낄 것입니다. 밉고 화가 나면 내가 참선을 잘못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화두 공부를 잘하면 화를 벌컥벌컥 내던 사람도 얼굴이 밝아지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말이 나옵니다. 일이나 주변 환경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대중 박수>
 
이 정도만 돼도 보이는 것마다 물건마다 형상이 있는 것이라면 평화스럽고 한가하고 즐겁습니다. 화두가 더 잘되면 대하는 것마다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자는 달라야 합니다. 주사위는 여러분에게 던져져 있습니다. 잘 사느냐, 못사느냐, 깨치느냐 못 깨치느냐, 행복 하느냐 불행하느냐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공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꼭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우리 승가에는 위법망구(爲法忘軀)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을 위해 자기를 잊고 올인(allin) 하라는 것입니다. 전부를 던지라는 것입니다.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이 이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이 얼마나 발심하고 신앙심을 돈독히 하며 화두참구를 간절히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화두선을 잘해서 여러분이 진정한 보람과 긍지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복이 많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이야말로 복이 많은 분들입니다. 생사해탈법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인연이 안 되면 할 수 없는 공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