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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대학생과 함께하는 첫 농촌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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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암 작성일13-01-29 09:07 조회3,385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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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 대학생과 함께 하는 첫번째 농촌 봉사


내가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과 인연을 맺은지도 이제 2년 반이 넘어간다. 이 모임의 대표를 맞고 계시는 남지심 선생님이 처음 나를 처음 찾아오신 것은 오년이 넘었다. 남지심 선생님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싶으신 분이다. 불교가 그만큼 봉사에 낙후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고픈 마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선뜻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나는 불교계가 가지고 있는 조직의 헛점과 불합리에  맞설 만큼 대담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소극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불교계 성향과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 재야의 한낱 불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벼려 두지 않았다.  결국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의 사무국장 자리를 맡았다. 자진해서 맡은 첫 봉사단체의 사무국장 자리였다. 

세계의 NGO 조직은 거대하다. 글로벌적이다. 우리나라 NGO 단체도 이제는 제법 글로벌적이다. 그 속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헛점과 비합리 투성이고 전시행정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구석이 있지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벗어나 남을 돕는 나라로 성장하는데 커다란 일조를 하고 있다. 그것의 대부분은 기독교 단체에서 설립한 것이다. 사랑을 앞세우는 기독교 정신은 많은 나라에서 많은 굶주린 어린아이가 그 나라의 지도가가 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보내주었다. 

나의 모교는 처음으로 이 나라에 발을 내딛은 '아펜젤라'라는 목사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다. 이 학교에서 배운 학생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아주 좋은 예이다. 아펜젤라의 후배 목사인 '언더우드' 목사는 연희전문을 세우고 우리나라의 중심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들에게서 배운 우리나라의 인재들은 많은 영역에서 우리들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잊지 못한다.

일년이면 백만명이 넘은 세계적인 관광지인 앙코르 왓을 세계의 사람들이 찾을 때 우리는 이곳에서 8시간이나 걸리는 캄보디아의 오지마을에 작은 초등학교 하나를 세웠다. 학생은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학교에는 먹을 식수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멀리서 물을 길러 항아리에 채우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들이 먼길을 걸어 힘겹게 물을 길어오지 않아도 되도록 우물을 하나를 팠다. 그렇지만 마을에도 식수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는 마을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학교는 3년만에 전교생이 500명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작년이었다. 그 가운데 30명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교육은 그것에서 끝이나게 되었다. 그들이 더 이상 다닐 수 있는 중학교가 이 마을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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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오지마을 뗍뽀디봉 마을에 세운 초등학교>

우리는 또 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그래서 결국 중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꿈만 같은 일이다. 우리는 이 마을에 2년동안 21개의 우물을 팠다. 나는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무국장을 맡기도 훨씬 전에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에 유독 관심이 많아서 다섯번이나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앙코르 유적에 어찌나 관심이 많았던지 캄보디아는 물론 태국에 남아있는 앙코르 유적과 라오스에 남아있는 앙코르 유적까지도 샅샅히 훑고 다녔다. 그런데 캄보디아 현실을 알 수 있는 현재의 자료들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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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에 착공하여 11월에 공사를 마쳤다. 현재 42명의 신입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1000 쪽이 넘는 폴폿 평전과 캄보디아 100년 근대사를 구해다 읽었다. 왜 킬링필드라는 사건이 이 나라에 일어나게 되었는지 매우 궁금하던 차였다. 나는 어렴풋이 거대한 풍파를 겪은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떠올렸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매우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캄보디아 대학생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학생 장학생을 선발했다. 그들에게 4년 전액 등록금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5명을 선발하고 작년에 5명을 추가하여 모두 10명이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수레꾼 장학금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자국의 나라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조건이었다. 그들은 이 조건을 매우 조아라했다. 교수들도 모두 찬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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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첫 장학생 5명을 선발하고 2012년에는 추가 5명을 선정하여 모두 10명의 수레꾼 장학생이 탄생했다.>

봉사하는데 드는 비용은 모두 우리가 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캄보디아로 떠난다. 그들과 함께하는 첫번째 농촌봉사였다. 3년전만 해도 꿈과 같은 일이었다. 고작 우물을 하나 파고, 초등학교에 매달 100만원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아주 작은 모임에서 졸업예정자 30명과 새로운 학생 12명을 더 받아 42명으로 출발하는 중학교도 세운 알찬 단체로 성장했다. 중학교 이름도 '수레꾼'이름을 따서 수레꾼 뎁뽀디봉 중학교로 이름지어졌다. 이 마을에는 우물은 21개나 되어서 어디서나 물을 길어 먹을 수 있지만 아직도 수무개나 더 파야하는 대마을로 자꾸 자꾸 커져가고 있다. 
 
 
나는 이제 이곳에 열명의 프놈펜의 대학생들과 함께 찾아간다.  이 마을사람들과 어린이들은 자국의 대학생을 처음보게 될 것이다. 자국의 대학생 형과 누나들을 처음 만나게 되는 이 마을 어린이들에게는 그 자체가 꿈과 희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지리도 어렵게 살고 있는 화전민 출신의 헐벗은 농촌을 보는 대학생의 마음 속에는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싹틀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들의 마음 속에서 끝없는 희망이 마구마구 분출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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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에게 줄 기념 티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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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종이 없었다. 이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각각 하나씩 학교종이 달린다.>

 
희망과 연민은 사람을 따듯하게 만든다.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모두 희망과 연민이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날이 있기까지 따듯한 사랑을 모아주신 수많은 수레꾼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렇게 따듯한 마음을 가진 많은 분들이 한국에 계시기에 수많은 비리에 젖은 더티한 지도자들이 있어도 나라는 발전하는 모양이다. 
 
과거의 인연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연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인연은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거리로 따지자면 참으로 먼 나라에 있지만 따듯한 마음이 놓는 인연의 다리는 이처럼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다.
 
 
                                서암합장
 
 
 
  

댓글목록

반야월님의 댓글

반야월 작성일

서암 거사님!
좋은일 하시느라 애쓰시네요.
애쓰시는만큼 모든이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요.
힘이들면 힘이든 만큼의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은
더욱 값지고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하시는일에 협조자가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영님의 댓글

영영 작성일

오랜만에 진정한 자비 나눔 실천행을 올려 주셨군요.
불자라면 누구나 갈망하던 일이라 몸소 행하심을
보니 마치 시원한 감로수를 마신 듯 길고 긴
목마름의 갈증에서 해소되는 것만 같답니다.
그간의 행적도 모자라 이제는 해외로 나가시니
더욱더 존경의 뜻이 표해진답니다.
서암님께서도 말씀하셔 듯이 우리도 한때는 원조를
받았었기에 더욱 마음 뿌듯하고 미더운 생각마저 든답니다.
이럴 때 정말 격세지감이란 말을 사용하나 봅니다.
우리 불교가 조금 늦게 시작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원력을 세우시고 물심양면으로
행을 하시니 아마도 머지않아 옛 불교의 영화를
다시 재현할 것만 같답니다.
해외에서도 우리 불교의 위용을 보여주세요.
마음으로나마 깊이 성원합니다.

그리고 연희전문 얘기를 들으니 정말 예스럽군요.
그 당시 선교사들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시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바로 연희전문 출신이 아니겠습니까?
왠지 초창기의 낭만이 느껴지네요.^^

마하심님의 댓글

마하심 작성일

이제 밥심으로 사는 농군인데
밥 꼬박꼬박 챙겨 자시고,잘 댕겨오시소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