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는 원래 물이 차 있는 큰 연못자리였다. 지난 12월14일 현 미륵사지 경내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용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조용헌 전 원광대 교수. 조용헌 전 교수는 조선일보에 칼럼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다.

 
 
20년 넘게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고택을 현장답사한 칼럼리스트 조용헌(50, 전 원광대 교수). 유불선(儒彿仙)과 문사철(文史哲)은 물론 천문과 지리, 인사 등의 항목을 씨줄ㆍ날줄로 삼아 글을 쓰고 책을 남긴 그가 임진년 새해, 불교에 얽힌 용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원광대서 <능엄경>으로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와 함께 지난 12월14일 한국 미륵신앙의 발원지 익산 미륵사지를 찾았다. “어머니의 선몽으로 이름에 ‘용(龍)’자를 가졌다”는 그는 “한국불교의 저변에는 용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밑바닥을 알려면 용을 추적해야 한다”며 신바람나는 어투로 흥미진진하게 용이야기를 풀어냈다.
 
커다란 돌탑 하나 덩그러이 남아있는 익산 미륵사지는 원래 물이 차 있던 큰 연못자리였다. <삼국유사>에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이 연못을 지나가다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출현하자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고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짓는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되죠.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고창 선운사,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강산의 발연사도 못을 메워 만들었어요. 미륵신앙 계통 이외의 사찰 창건 과정에서도 연못을 메우는 방식이 발견됩니다. 경주 황룡사를 지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용이 출몰할 수 있는 입지조건은 물이 있어야 하므로 황룡사터 역시 원래는 연못 아니면 늪지대였음을 추측케 합니다. 양산 통도사 역시 창건과정에서 용이 나타났고, 치악산 구룡사와 장흥 보림사터도 원래는 연못자리였지요.”
 
그렇다면 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을까. 조용헌 전 원광대 교수는 “키워드는 용(龍)이다”고 단언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용이 물을 관장하기 때문에 용을 숭배하여 왔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야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고대인들에게 용은 분명히 실존하는 영물이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인데, 용왕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농사가 안되고 농사가 안되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 판이니, 비와 물을 주재하는 용은 신으로 대접받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도 용은 수신(水神)으로 등장한다. 힌두교의 조각을 보면 목을 부풀려서 쳐든 코브라가 수신의 모습을 상징한다. “할리우드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리틀붓다’에서도 목을 쳐든 코브라가 붓다의 머리 뒤에 서서 붓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물을 막아주는 이색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의 코브라는 수신인 용을 상징한다. 수신을 인도에서는 코브라로,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에서는 용으로 표현했다.”
 
<동국여지승람>은 호남지역이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저수지가 많았음이 발견된다고 했다. 곡창지대이니 물이 필요하고 저수지나 호수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곡창지대에서 용을 숭배하는 용 신앙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성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 전 교수는 미륵사지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들이 발견된다고 했다.
 
“하나는 창건 당시부터 미륵사의 정문 앞에 연못을 조성하여 용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놓은 점이고, 또 하나는 금당(金堂) 밑으로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일부러 수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금당에는 미륵불을 대좌 위로 모셨고, 그 밑으로는 용이 출입할 수 있는 수로를 연결해 놓은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용즉미륵(龍卽彌勒, 용은 즉 미륵이다)을 상징한 것이다.”
 
금당 밑으로 일부러 수로를 내어서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장치는 쌍탑으로 유명한 경주 감은사지에서도 발견된다. 조 전 교수는 감은사에 모신 불상이 미륵불인가는 확인이 어렵지만, 적어도 용과 부처를 동일시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는 “감은사 근처의 이견대(利見臺) 또한 <주역>의 건괘인 용을 설명하는 문구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용과 불교의 접합은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보전 외벽에 그려진 반야용선. 통도사 역시 창건과정에서 용이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우리 조상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물길을 타고 올라간 용이 화현하면 미륵이요, 부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미륵은 다시 현세의 제왕으로 표상됐다. 감은사의 문무왕이 죽은 후에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켰던 것처럼, 미륵사의 무왕도 위풍당당한 용으로 숭배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용은 뗄 수 없는 사이다.” 연못을 메워 절을 지은 또다른 이유가 있다. 땅에 깃든 좋은 기운 즉 서기(瑞氣) 때문이다. 조 전 교수는 “도를 닦기에 적합한 절터는 길지를 택해야 하는데, 그 길지 잡는 방법 중의 하나가 서기의 존재 여부”라며 “물이 차 있어 흙을 메워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굳이 연못에다 절을 지은 것은 이러한 곳에 서기가 많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륵사가 자리잡게 된 연못자리 역시 상서로운 기운이 많았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또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연못을 메워서 지은 절터를 파보면 대부분 숯이 나온다는 것이다. 미륵사터에서도 숯이 나왔고, 금산사 미륵전에서도 역시 숯이 출토됐다. 선조들이 숯을 넣어 연못을 메운 뜻은 우선 습기제거에 있다. 문헌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숯을 넣어 지은 최초의 절이 익산 미륵사이고, 미륵사 이후에 숯을 사용하는 지정법(地定法)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숯을 사용한 또다른 이유는 용을 쫓아내기 위해서다. 용은 물이 있어야 노는데, 숯은 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해버리는 작용을 하니 용과 숯이 서로 상극관계인 것은 당연하다. 이는 수화상극의 원리로 용과 숯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근거다.그렇다면 미륵신앙과 용의 관계는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
 
어떤 때는 미륵이 곧 용이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숯으로 용을 쫓아냈단 말은 무엇인가. 조 전 교수의 설명이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래될 때는 기존의 신격인 용과 미륵불을 일치시키는 전략적 제휴가 불가피했지만, 불교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하고부터는 차별화 내지는 하위신격(下位神格)으로의 포섭을 시도한 결과다. 그래서 용은 부처의 보디가드 즉 호위신장으로 편입된다. 용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여덟 신장인 팔부신장(八部神將) 가운데 하나로 속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