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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님의 신문기사 스크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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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초윤합장 작성일11-01-29 13:28 조회3,496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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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물림의 '요리사 몸만들기' 성공기
마흔다섯에 사표 내자가족과 동료들이 만류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새 일을 못 할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
미국에서 3년간 주방 일 그리고 네 번째 식당… 식탁 4개짜리가 지금은 20개가 됐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1982년 28살 때의 모습. 한 달에 반 이상 밤을 새우던 시절이었다.
"아이앰 루킹 포러 잡. 아이앰 쿡(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요리사예요)."

2001년 미국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의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내가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다. "사장님과 얘기해보고 연락 드릴게요" "얼마 전에 직원을 새로 뽑아서 자리가 없습니다"…. 나이 마흔여덟. 20년을 '광고장이'로 살아온,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한국의 아저씨에게 '새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1980년부터 이어온 광고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마흔에 접어든 즈음이었다. 젊은 시절엔 광고 업계처럼 신나는 직종은 없다고 생각했다. 경쟁사를 누르고, 광고를 따낼 때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이기고, 이기고, 이기고…. 한 달의 반 이상 밤을 새워도 '이기는 즐거움' 때문에 힘이 났다.

1990년대 중반, 마흔이 됐다. 날고 기던 선배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났다. 아니, 쫓겨났다.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고 무서웠다. 어느새 일은 내 인생의 전부가 된 상태였다. 고민을 거듭하다 마흔다섯 되던 해에 사표를 냈다. 6개월 동안 가족과 회사 동료들의 만류에 시달린 뒤였다.

나는 "시간이 더 지나면, 새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 내가 약간의 자신을 가졌던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봉사 동아리 회원들과 일요일마다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내가 음식을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복지관의 어린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데 그 일이 즐거웠다. 가만히 보니 봉사도 봉사지만 어느새 음식 만드는 게 좋아졌던 것이다. 새 일을 한다면 요리를 해야겠다는 게 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퇴직금을 털어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열댓평짜리 아주 작은 우동집을 냈다. 주방 아주머니 실력만 믿고 무작정 연 가게였다. 식당을 낸 지 2개월 만에 'IMF 외환위기'란 놈이 터졌다. 고시촌이 텅 비었다. '요리사 인생'의 첫 교훈을 얻었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6개월 만에 가게를 접었다.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해 요리를 배우고 허드렛일이라도 할 만한 식당이 없는지 알아보고 다녔다. 바닥부터 닦아보자는 심사였다.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친구의 소개로 연이 닿은 곳이 미국이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있는 일식집으로 최저임금(주급 280달러)에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이라 했다. 외국에서 요리와 서비스 기법을 배우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겨졌다. 플로리다에 가서 식당 바닥 청소부터 배웠다. 멕시코·엘살바도르·인도네시아의 20대 직원들과 함께 기숙사에 묵었다.

오시환씨가 2003년 식탁 4개짜리로 시작한 바다요리 전문점은 7년 만에 식탁 20개짜리로 성장했다. /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칼질을 배우면서부터는 손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팔뚝엔 튀김 만들다 덴 화상 자국이 물방울처럼 점점이 박혔다. 1년쯤 지났을 때쯤, 사장이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내 비자 만기가 다가와 불법 체류자를 취업시켜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식당에서 결국 쫓겨난 나는 플로리다에 있는 한국 절에 들어가 기식하면서, 동네 식당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그러다 뉴욕에 있는 한식당에 자리를 얻었다. 요리도 요리였지만 '요리사의 몸'을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20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의자만 돌리며 일하던 나에겐 종일 서서 일하는 요리사의 체형으로 탈바꿈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야간 주방 보조로 2년을 보내면서 발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고 다리와 팔에 근육이 붙었다. 손바닥이 생선 가시에 찔린 상처로 누더기가 되고, 새우 까기와 홍당무 썰기로 밤을 지새운 600여일이 지나간 후였다. 도마를 보지 않고,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도 칼질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2003년 가을,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만에 이삿짐을 챙겼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니 수중에 남은 돈은 한 푼도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서울 계동에 첫 식당을 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대출은 친구 보증을 통한 단돈 1000만원. 3년 동안 은행거래가 없었던 탓이었다. 사무실로 쓰던 약 33㎡(약 10평)짜리 2층 방을 얻어 식탁 네 개를 놓고 '바다요리 전문점'을 열었다. 좋은 재료를 쓰고, 즐거운 마음으로 식당을 꾸려갔다. 정성을 알아주는 손님들 덕분에 소문이 나서 개업한 지 1년 만인 2004년 식탁 10개짜리로, 2009년엔 지금의 20개짜리로 식당을 넓혔다.

요즘 나의 신조는 '목표로 나를 다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갖되, 마감은 정해두지 말자는 것이다. '직장생활하며 나를 옭아맸던 전략·계획·시한 같은 단어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충실하게 하고,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내자.' 58년의 삶, 두 번째 직업, 네 번째 식당…. 나는 지금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죽을 둥 살 둥 일하며 밑에서부터 기초를 닦았던 주방 수련 3년이 없었다면, '제2의 오시환'도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광고전문가에서 요리사로 제2의 인생살고있는 인사동 '해장금'의 오시환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댓글목록

초윤합장님의 댓글

초윤합장 작성일

서암님의 조선일보 기사를 모셔왔습니다.
맨위의 사진은 아마도 동생인가 봅니다.

법융님의 댓글

법융 작성일

신심도 깊으시고 집념도 강하시고
꿈도 크신 스타 같으신 서암거사님을
우리는 축서사에서 매월 만나뵐수 있어서
무처 다행스럽습니다

4개로 시작하신 식탁이 20개, 앞으로도
30개 50개, 100개 200개 그이상으로 늘어날것으로 믿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마음먹으신대로
다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서울에서 축서사를 위해 주시는
초윤님도 좋은 한해가 되시고
날마다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

초윤합장님의 댓글

초윤합장 댓글의 댓글 작성일

대지혜 거사님 법융국장님 강녕하심에 고마운 마음 전하옵니다. ^^*

영영님의 댓글

영영 작성일

정말 기분 좋은 토요일이군요.
이렇게 맑고 향기로운
서암님의 기사가 일간지와 축서사 사보에 거의
동시간대에 실리어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

서암님의 단독 저인망 쌍끌이에
무진장 쏟아지는 산해진미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절로 좋아집니다.

특히 사보에 실린 새로운 불교관과
다양한 견해들은 정말 우리 불교를
풍부하게 하실 것이며
또한 모든 불자층을 아우르는 새로운
법의 물결이 될 수 있기에

그동안 불교를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셨는지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정견으로 관찰하였는지도
새삼 증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수행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도 여법하게 같이 실천하시어
진정 ‘새의 양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간 인도 순례기가 올라오지
않아 궁금하였는데
이렇게 하시는 일도 많으시니
자연 늦추어지는 일도 있으시겠지요.

늘 새로움을 추구하시고 앞서 개척 하시는
서암님께 무한한 찬사를 보내오며
앞으로도 많은 자비행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초윤합장님의 댓글

초윤합장 작성일

영영도사님 옥체일향망강누루십니껴?

오늘 있는돈을 딸딸 끍어모아 표를 사서
깜보디아로 떠나셨습니다.

http://cafe.naver.com/surekkun
요 까페에서
깜보디아말 욜심히 배우시더만~
하기사 머 코털만 움짝거려도 다 통할 말들이지만서도~~~

또 어떤 눈물어린 서곡을 광주리에 담아 오실란지 기둘려 봅시다.

거기가서 설날에 정안수 한그륵 떠놓으시란 당부를 안드렸는데
우짤지 몰겠습니다.
어데 가신다 해도 늘 걱정되어요. ㅎㅎㅎㅎㅎ

영영님의 댓글

영영 작성일

그러하시군요.!!!
늘 옆에서 보좌하시고 도와주시고 조언하시고.....

가만히 보니 서암님 혼자가 아니시고
초윤합장님과 같이 이끌어 가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치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는 법이지요.

저도 초윤합장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리고 저를 너무나 잘 관찰해 주셨군요.
저는 늘 도를 생각(思)하고자 애를 쓰려고 하고는 있으나
도와는 거리가 있는 개인(私) 생각만 한광주리이므로
도를 수행하여 버리자고(捨) 매일 결심만 하고 있으며
도 공부를 미루어 스승(師)님 뵐 면목이 없는 처지이니
그렇게 불리어져도 할 말이 없답니다.^^

이후로 계속 노력 노력하겠습니다.

마하심님의 댓글

마하심 작성일

오군(君)이었던 시절부터 한칼있으마~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