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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참구법./무여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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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상행 작성일10-07-17 23:48 조회2,786회 댓글3건

본문

화두참구법

1. 화두의 간택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화두를 간택해야 한다.
화두간택은 선지식에 의해서 해야 한다.
참선자가 어록을 본다든지 또는 듣고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믿고 의지할만한 명안종사(明眼宗師)에게서
간택 받는 것이 좋다.
몽산(蒙山)스님 말씀에, “참선에 요긴한 일을 말한다면
첫째, 정지견(正知見)을 만나는데 있다” 하였고,
천여 칙(天如 則)선사는 “공부를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진정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주의할 것은 선지식을 모시는 일이다.
이 공부는 언어가 끊어지고 마음작용이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으로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없다면 배우기가 어려운 도리이다.
그래서 참선자는 선지식에 의해 공부길이 열리고,
지혜의 눈을 얻으며, 공부의 힘을 얻는다.
역대조사와 천하의 선지식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되,
“스승 없이 깨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참선자는 화두의 간택부터 깨칠 때까지 반드시 정안 종사(正眼 宗師)에 의지해야 한다.
그래야 이 공부를 빨리 할 수 있고 쉽게 할 수 있다.
선지식은 알맞고 적당한 화두를 주게 된다.
화두를 자기 스스로 선택하면 분별심이나 사량심을 붙이기 쉽다.
화두가 잘 될 때는 별 탈이 없지만, .화두가 잘 안되거나,
오랫동안 화두를 하다가 보면 화두에 싫증이 나거나,
역경에서는 화두에 대한 망상을 일으킨다.
이 화두가 내게 맞는 화두인가,
이 화두로 견성할 수 있을 것인가,
화두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심지어 오늘은 이 화두, 내일은 저 공안으로 바꾸기도 한다.
화두에는 어떤 번뇌나 망상도 말아야 하고,
일체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선지식에 의해 간택하면 이런 불필요한 망상을 들게 한다.
화두는 온전히 믿고 , 오직 지극하게 일념으로 참구해 가야 한다.
그리하여 화두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보다 선지식에게서 간택 받는 것이 좋다.

2.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화두는 화제(話題), 화칙(話則), 고칙(古則), 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선종의 조사(祖師)들이 정한 법문이다. 예로부터 조사들이
보여 온 언어나, 종사(宗師)가 심지를 밝게 깨달은 기연(機緣)이나,
학인을 인도하는 행위의 종요(宗要)를 모아 후세 참선자에게
공부하는 규범으로 삼게 하고 과제로 준 것이 화두이다.
그것은 조사들이 깨달음을 열어 진리로 보여준 것으로 참선자에게
가장 준엄한 것이므로 공안이라 한다.
공안이란 공부안독(公俯案牘)의 준말로서,
관청의 예규나 법령 같은 것으로서,
지극히 엄하고 공정하듯이, 불조의 가르침이 종문(宗門)의 정회(正會)이므로
마치 공부의 안독과 같다하여 공안이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학인이 조주 종심(趙州 從諗: 778~897)스님께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느니라(無).”
불성(佛性)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도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하였고,
“꼬물거리는 미물도 불성이 있다” 하였다.
개라면 사람 다음으로 지능이 발달한 고등동물인데,
불성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조주스님은 의외로 “없느니라”고 했다.
없어서가 아니고 ‘무(無)’라고 한데 깊은 뜻이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스님께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이니라.”
건시궐(乾屎橛), 마른 똥 막대기란, 옛날에는 휴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변 본 뒤에 뒤처리하는 막대기를 말한다.
‘무엇이 부처냐’고 물었는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상천외의 회괴망칙한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답은 보통 대답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고나 논리를 거부하는 말로서 일상적인 격을 벗어난
절대적인 대답으로 격외어(格外語)라고 한다.
상근기는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깨칠 수 있다.
화두는 대단한 법문이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안목(眼目)이 들어 나고,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의 견처(見處)를 나타낸 법문중의 법문이다.
이 법문을 깨치면 바로 부처의 경지이다.
그러나 깨치지 못하니 부득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무(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건시궐(乾屎橛)이라 했을까?’
하고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의정을 일으키는 이유는 깨치기 위해서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그 의심이 간절하게 하고 점점 순숙하게 하여 마음속에 가득하여
나와 화두와 세계가 온통 의심덩어리가 되게 하여
궁극에는 그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게 하기 위해서다.
화두는 옛 조사 스님들이 일상생활 속에서나 문답 속에서
심지를 보여준 심오한 법문이다.
그 일상적인 법문의 의심을 일으켜 참구케 하여
화두로 정착시킨 선사가 대혜(大慧)스님이다.

3.화두드는 법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과 기운을 평온하게 해야 한다.
평온하게 하는 것은 고요히 하고 안온하게 하는 것이다.
안온하게 하는 것은 조용하고 편안하게 함을 말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여 안정시키려면,
마음을 쉬고 비워야 한다.
참선자는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무심하며,
신경 쓰일 일이 있더라도 무관심 하며,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생각도 쉬어야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도 없어야 한다.
또한 욕망도 일으키지 말고,
불안한 마음도 갖지 말고, 헐떡거리는 마음도 없어야 한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만사를 놓고, 일체를 쉬면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그렇게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화두만 여법하게 참구해 간다.
화두로 참선하는 것을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를 든다, 화두공부를 한다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화두에 의심을 일으킨다,
화두에 의심을 지어간다는 뜻이다.
화두참구에 염화두(念話頭)와 송화두(頌話頭)라는 말이 있지만,
화두참구는 염불하듯이 외우는 것도 아니고,
화두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흔히 화두를 생각한다고 알기 쉬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화두를 외우고 생각하여 미륵하생(彌勒下生)까지 해도
진의가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화두참구는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 뭣꼬’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인가?
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한다.
의심은 적당히 일으켜야한다.
너무 강하게도 말고 약하지도 않으며,
거칠게 들지도 말고 가볍게 들지도 않으며,
급히 일으켜서도 안 되고 느리게 일으켜서도 안 된다.
화두를 급히 강하게 들고 거칠게 의심을 일으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하여 혈기가 고르지 못하고
갖가지 병을 유발시키기 쉽다.
그러나 의심을 약하게 가볍게 일으키고
느리게 한즉 망상이 들어오기 쉽고, 해이하고 산만해지기 쉽다.
화두참구는 적당히 알맞게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이다.
화두는 좋은 법문이기도 하지만,
참선자에게는 의정을 일으켜 타파하는데 본 뜻이 있다.
의정은 화두를 보는 길잡이이다.
의정이 없는 화두는 화두참구가 아니다.
의정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는 화두공부가 아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키는데 뜻이 있고,
의정을 크게 일으켜야 크게 깨칠 수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치지 못한다.
의정은 어떻게 일으켜야 진의가 잘 날것인가?

첫째, 발심(發心)하라.
참선자는 발심해야 한다.
스스로 절실해서 진심으로 해야 하고 참으로 하고 싶게 해야 한다
발심(發心)은 발보리심의 준말이다.
자기의 성품을 보아 무상등정각(無上等正覺),
위없는 고르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하고 철저한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이다.
<화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여래를 만든다.
일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였으며, 또,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무슨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사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화두도 되느냐 안 되느냐,
깨치느냐 못 깨치는냐는 참선자의 뜻과 정성에 달렸다.
참선자는 이 일이 가장 큰 일이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이 일뿐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며,
이것만은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인의 말씀에
“마음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어떤 선사는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 말고 발심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라.”하였고,
“발심 있는 곳에 화두 있고, 화두 있는 곳에 발심 있다.”고 하였다.
흔히 ‘화두가 안 된다’,
‘참선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발심이 안 된 상태에서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발심자라면 어찌 화두 안 되는 것을 고심할 것이며,
어찌 깨치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며, 어찌 생사문제를 두려워하리요.
옛날 어떤 도인은 깨치고 나서 사흘 간이나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大聲痛哭)하더란다.
“왜 그렇게 우시느냐?”고 물었더니,
깨치고 나니 너무 기뻐서 울지 않을 수 없고,
한편 생각하니 무릎아래를 바로 볼 줄 알면 바로 부처자리인데
그 자리를 보지 못하고 고생고생 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부끄러워서 울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란다.
참선자여, 그대 선 자리를 바로 보라.
그 자리가 부처자리이고, 그대 자신이 부처니라.
그 자라는 한 생각 돌려서 진발심 하면 바로 볼 수 있는 자리다.
참선자여, 그대 아직도 화두에 진의가 나지 않는가?
발심해서 들어보라.
이내 의정이 몰록 일어나서 드디어 선정에 들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딛 칠 것이다.
참선자가 발심하지 못하고 자기를 찾으려는 것은 스스로 눈을 가리고 무엇을 찾으려는 것과 같으며,
손에 금덩어리를 쥐고 금광맥을 찾으려고 헤매는 격이다.

둘째, 의정은 간절하게 일으켜야 한다.
옛 선사의 말씀에,
“화두공부는 간절 절(切)자 한 자면 족하다”고 하였고,
어떤 스님은 “참선하는 데는 간절함 한 마디가 가장 긴요하다”고 하였다.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참구는 간절하게만 하면 다른 말이 필요치가 않다.
안해서는 안 될 것처럼, 반드시 해야 될 것처럼,
꼭 필요한 것처럼 절실하게 해야 한다.
며칠 굶은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이,
심하게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이,
칠팔십 노파가 마치 하나뿐인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을 생각하듯이 간절하게 의심을 지어가야 한다.
보통 살아가다가 보면 화두에 대한 간절함을 크게 못 느끼지만,
가장 절실한 것이 깨달음이요,
가장 시급한 것이 생사문제이다.
인생의 대사중의 대사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간절하게 수행해서 화두를 타파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옛 종사는
“참선자는 늘 이마에 간절 절(切)자를 써 붙이고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참선자는 항상 화두는 간절하지 못하면 화두참구가 아니고,
화두에 간절함을 모르면 공부인이 아니다.

셋째, 화두참구는 쉼이 없고, 간단이 없어야 한다.
화두참구는 가급적 끊임이 없어야 한다.
새벽에 눈뜨자마자 저녁에 잘 때까지 언제 어디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쉼이 없어야 하고 끊임없어야 한다.
고요한 곳에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일을 할 때나 일을 안 할 때나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공부는 놓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 향상하는 길이다.
공부는 향상됨을 알아 쉬지 않으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인들의 말씀에
“화두공부는 닭이 알을 품듯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함은 더운 기운이 항상 지속됨을 말한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잠시도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목이 아주 탄다든지, 배가 몹시 고플 때 잠깐 내려왔다가 이내 올라간다.
음력 오뉴월 한더위 때도 더워서 숨을 헐떡이듯
쉬면서도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닭이 알을 품지 않고 둥지를 자주 비우면 썩은 달걀이 되어 병아리를 깔 수 없다.
계란은 항시 따뜻하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주지 않으면
병아리가 되지 않는다.
화두참구 또한 닭이 항상 알을 품어 따뜻한 기운이 없어지지 않게 하듯이
항시 화두기운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두는 닭이 알을 품듯이 꾸준히 들어가면
진의가 돌발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날이 머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화두참구는 자못 고집스럽게 해야 한다.
‘이 뭣꼬?’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인가?’
안 들리면 또 들고, 한 번해서 안되면 열 번하고, 열 번해서 안 되면 백 번들고,
백 번들어서 안 되면 천 번 만 번 시도하고,
될 때까지 이 일을 다 해 마칠 때까지 끈질기게 고집스럽게 들어야 한다.
산에서 노루를 잡아다가 가두어 놓으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서성거리며 탈출할 구멍만 찾는다.
얼굴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도 아랑곳 않는다.
먹이를 주어도 먹지도 않는다.
죽어서 쓰러질 때까지 오직 도망갈 마음뿐이다.
화두참구인은
가두어 놓은 산 짐승이 죽을 때까지 도망갈 구멍만 찾듯이
이 공부를 타파할 집념에 불타야 한다.
공부인은 쓰러질 때까지, 쓰러지면서도 ‘이 뭣 꼬?’ 해야 한다.

넷째, 화두공부는 열심히 하고 성심 성의껏 해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라.
정성이 감응하면 능히 도과(道果)를 얻는다”고 하였고,
또 “지극한 마음으로 하라.
지극한 마음으로 하면 능히 구하는 바를 얻는다”고 하셨다.
도를 구하고 마음을 닦는 데는 지극한 마음과 정성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보통 일은 대충하고 흉내만 내듯이 해도 된다. 씨앗도 뿌려만 놓으면 정성껏 관리를 안 해도 촉이 튼다. 가게도 문만 열어놓으면 손님이 온다. 책도 정독을 한 해도 책장만 넘기듯이 건성으로 읽어도 아는 것이 생긴다.그런데 마음공부는 그렇지 않다. 할 때는 열심히 하고,
정성껏 하고 최선을 다하듯이 해야 한다.
마음공부야 말로 어떤 정성으로 얼마나 진실하게 노력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옛 선사들은 화두참구를 이야기할 때 ‘죽음’이라는 말을 흔히 썼다.
‘죽을 각오로 한다’든지, ‘죽음을 무릎 쓰고 애쓴다’든지
어떤 사람은 ‘아예 목숨을 떼 놓고 하라’고 했다.
즉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고 지극하게 애쓰라는 것이다.
그렇게 참으로 열심히 하고 지극하게 애쓰는 참선자에게는
의외로 쉽게 바로 될 수 있는 공부가 이 공부이다.
그리하여 옛 어른 말씀에,
“이 일은 참으로 애쓰는 이의 견성(見性)하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요,
세수하면서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였다.
여반장은 손바닥 뒤집는 것이고,
세수하다가 보면 손에 코가 의례히 닿는다.
그것보다도 쉬운 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참으로 애쓰고 지극하게 정진하면 의외로 쉬운 것이 마음공부라는 것이다.
참선자여!
화두가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가짐과 정성을 점검 해 보라.
마음이 돈독하고 정성이 지극하면 어찌 공부 안 되는 것을 근심하며,
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랴.
화두공부를 하다가 보면
때로는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체험도 하고,
기적과 같은 일도 일어난다.
그것은 진심으로 성심 성의껏 열심히 정진하므로 가능하다.

화두참구의 기본요령은,
이상과 같이 마음을 비우고 쉬어서 진심으로 발심해서 화두에 간절하게,
쉼 없이, 성심 성의껏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안 되는 화두라도 지극하게 성심 성의껏 의심을 지어 가면 화두가 점점 순숙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화두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화두가 간절해지는 순간 화두에 힘을 얻는다.
화두에 힘을 얻으면 화두가 자연히 들리고 저절로 들린다.
그러면 화두를 놓으려야 놓을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으며,
쫓아도 달아나지 않고,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항상 소소영영(昭昭靈靈)하며 분명하게 현전(現前)한다.
그렇게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않고 들리는 것을 진의(眞疑),
참의심이 난다하고 이 때부터 진정한 공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화두에 진의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가 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을 주작화두(做作話頭),
또는 조작의심이라 한다.
화두에 의심이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고 억지로 의심을 지어 가는 것을 말한다.
화두가 어떤 때는 분명하게 힘차게 들리다가,
어떤 때는 갑자기 끊어져 틈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무리 들려고 애써도 들리지 않고,
어떤 때는 뜨거운 불과 같이 번뇌가 일어나다가,
어떤 때는 순풍에 돛단 듯이 술술 풀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꿈도 아니고 잠도 아니고 망상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하루 종일 애태우기도 한다.
왜 그렇게 되다가 말다가 하고,
익은 듯하다가 설고, 힘차게 들리다가 희미하고 기복이 심한가.
대부분의 참선자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 참선자는 발심(發心)이 안된 상태에서 하기 때문이고,
첫째, 신심이 돈독하지 못한 때문이고,
둘째, 그런 사람은 대분심을 내야하고,
셋째 용맹스럽게 정진해야하고,
넷째, 지혜롭게 참구해야 한다.

첫째, 깊은 믿음을 가져라.
도를 닦는 사람은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화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일체의 선법을 기르나니라.”하였고,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믿음으로 불법의 큰 바다에 들어가고 지혜로 건넌다”고 하였다.
믿음은 도를 닦는데 근원이 되고,
모든 공덕을 쌓는 근본바탕이 된다.
믿음으로 불법의 바다에 들러가고 신심으로 부처의 눈을 뜬다. 불법을 구하는 이가 큰 신심이 있다면 훌륭한 보배를 얻을 것이나,
만약 신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을 것이다.
참선자는 자기의 본성과 불법과 화두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가. 불성(佛性)에 대한 확신이 서야한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본성은 본래 부처이고,
시방세계 불보살과 역대조사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 불법에 대한 확신이다.
불법은 생사를 요달하고 윤회를 벗어나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다. 화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져야 한다.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온전히 믿어야 한다.
화두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불신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도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고인은
“세상 사람은 쌀이 양식이지만 수도자는 믿음이 양식이다”고 하였다,
양식이 없으면 굶어죽듯이 믿음이 없는 수도자는 이미 수도자가 아니다.
깊은 믿음이 있어야 신근(信根)이 생기고,
신근에서 신력(信力)이 난다.
신근없이 신앙(信仰)의 힘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신앙의 힘은 신심의 뿌리가 튼튼할수록 무한한 힘이 생긴다.
믿음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의 부리가 깊고 튼튼할수록 흔들림 없이 크게 자랄 수 있듯이
신앙의 힘이 크고 깊을수록 그 열매가 크다.

둘째, 큰 분심(忿心)을 일으켜라.
화두가 안 되는 참선자는 큰 분심을 일으켜 보라.
참선자가 화두가 안 되다니,
화두는 참선자의 생명과 같다.
한 순간도 화두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괴롭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나만 못한단 말인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분노의 치를 떨면서 몸부림 쳐보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장엄하였고,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이
다 이 관문을 통과하여 명안종사(明眼宗師)가 되지 않았는가.
그들이 장부라면 나 또한 장부 아닌가.
나도 그들과 같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었고,
그들과 더불어 조금도 부족하지 못하지 않은데 왜 나만 안 된단 말인가.
이렇게 정진해도 되겠는가.
이러고도 참선을 말하고 화두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수행이 얼마나 이익이 있겠는가.
이런 불자를 진정한 블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화두야말로 다겁생(多劫生)을 살아오면서
쌓은 무명(無明)과 업식(業識)을 소멸하여 과거 생의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닌가.
또 기나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극락정토(極樂淨土)로 가는 첩경이 아닌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인가.
신체가 강건하고 나이가 젊을 때 이 일을 분명히 해 마쳐라.
홀연히 죽음이 닥쳐오면 무엇으로 대적할 것인가.
사지가 싸늘하고 혀가 굳어지며 정신이 혼미해 지는데 무슨 힘으로 화두를 챙길 것인가.
평상시에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차일피일 하다가 일생을 미루어 왔고,
이런저런 이유로 일생을 속여 왔으나
납월 삼십일(臘月 三十日)을 맞이하여 어찌 자기마저 속이겠는가.
지금도 늦지 않다.
‘성불(成佛)’ 두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하도록 하라.
대 분심을 일으켜서 오직 화두, 화두, 화두에 목숨을 걸어보라.
그대만 못 할 리 없다.
그대만 안 될 리 없다.
참으로 분심을 내서 미친 듯이 참구해 보라.
그대는 의외로 쉽게 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용맹정진(勇猛精進)하라.
화두에 진정한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주작화두로 괴로운 참선자는
이 일을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정심을 가지고 용맹정진 해야 한다.
공부인은 오직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떠한 경우라도,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목숨을 걸고라도 기필코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결의와 각오로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
참선자가 노약자나 여성이거나,
스스로 ‘나는 하근기다’ ‘나는 발심 못한 사람이다’고 생각하거나 ,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괴로워하는 참선자는 용감하고 사납게 해야 하고,
때로는 무모하듯이, 도전하듯이 해야 화두에 힘을 얻어 순일하기가 쉽다.
용맹정진은 졸음도 없고,
혼침과 산란에도 떨어지지 않고,
오직 화두만 용맹스럽게 참구해야 용맹정진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참선자는 취침시간이 없다뿐이지 앉으면 졸면서 용맹정진 한다고 한다.
졸면 용맹정진이 아니다.
졸리거든 잘 만큼 자고 초롱초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방울로
용맹스럽게 정진해야 용맹정진이라 할 수 있다.
졸지는 않더라도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온갖 사량과 분별심으로
산란하게 하는 정진도 용맹정진이라 할 수 있다.
용맹정진하는 사람의 정신상태는 생기가 있고 의기가 충천해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나 괴로움도 능히 참고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 공부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용맹심을 내야 용맹정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용맹정진하는 사람은
언제 보아도 여법하게 단정하게 앉아있고 무섭게 정진한다.

넷째, 지혜롭게 하라.
화두참구는 지혜롭게 해야한다.
공부인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지혜이다.
참선자는 자기를 알고,
화두를 이해해서 적당히 알맞게 참구해야 한다.
화두침구에 ‘적당히’와 ‘알맞게’라는 말에 온갖 지혜가 함축되어 있다.
공부인은 근기(根機)에 따라 ,
화두의 득력, 부득력에 따라 신심이나 발심 정도에 따라 알맞게 참구해야 한다.
이 공부는 지혜롭게 적당히 정진해가면 진의(眞疑)가 돌발하여 선정에 들기 쉽고 견성(見性)하여 성불(成佛)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공부는 어렵고 괴로울뿐 공부에는 별 이익이 없으며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을 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부처님 말씀에 “지혜로운 공부는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이요,
어리석은 공부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다”고 하였다.
밥을 지으려면 솥에 쌀을 넣고 적당히 불을 지피면
고실 고실한 맛 좋은 밥이 될텐데 쌀 대신 모래를 넣고 아무리 불을 지핀들 밥이 되겠는가.
공부는 쌀로 밥을 짓듯이 지혜롭게 해야한다.
참선은 늘 지혜롭게 해야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고 부끄러워 해야한다.

화두의 진의가 나지 않아 괴로워하던 참선자도 이상과 같이
큰 믿음을 가지고 큰 분심까지 내어서 용맹정진하고 지혜롭게 참구해 보라.
화두가 되다가 말다가 하는 참선자는
이 일을 반드시 해 마치고야 말겠다는 대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공부인은 오직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떠한 경우라도 기필코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결의와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결정심을 가지고 참구하면 의외로 쉽게 진의가 날 것이다.

4. 참선자의 주의할 점
화두에 진의가 나더라도 조금도 만족하거나
화두를 가볍게 생각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화두가 잘될수록 더 힘차게 더 간절하게 들려서 점점 순숙해 져야한다.

화두는 깨칠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화두에 진의가 나서 분명하고 힘차게 들려서 동정(動靜)에도 한결같이 들리고,
꿈속에서도 변함이 없이 들리고, 깊은 잠에서도 여여(如如)하게
들려서 깨칠 때까지 한순간도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화두를 계속 참구하다 보면 제법 의단(疑團:의심덩어리)이 되어 순일하게 들리다가
아무기분도 못 느끼고, 아무재미도 없이, 가슴만 답답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화두를 들어도 냉랭하고 전연 안 될때 기분 같아서 기댈 곳도 없고,
부여잡을 데도 없으며, 깨달아짐도 없어서,
어찌 할 수 없이 막막하고 답답하고 아무 자미가 없더라도,
절대 포기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 열심히 참구하고
더 지극하게 들어가면 참으로 좋을 때가 올 것이다.

화두가 잘되면 번뇌 망상이 끊어지고 불안하고 들뜨고 산란한 마음도 없고
정신이 혼미하여 몽롱한 혼침도 없이 성성(惺惺:또렷또렷하고 분명하게 들리는 것)하고
적적(寂寂:아주 고요한 상태) 들릴 것이다.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들리더라도
성성과 적적이 적당히 균형을 이루어야 깨달음이 가깝다.
그렇지 않고 성성을 좋아해서 성성에 빠지면 산란해지기 쉽고,
적적을 즐기다가 적적에 빠지면 화두마저 놓치고 무기(無記)에 떨어지기 쉽다.

화두에 진의가 일어나면 치성하던 일체의 번뇌 망상은 다 사라지고
마음은 맑고 고요하여 몸은 가볍고 기분이 좋다.
더 지극하게 들어가니 홀연히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앞뒤의 경계마저 끊어지고, 육체도 잊은 듯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 묘하게 편안해진다.
이 때 고요하고 편안한 경계에 안주하지 말고 탐착하여 절대 무기(無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이럴 때도 화두는 놓치지 말고 성성하게 들어가야 한다.
화두가 더 깊어져서 더 성성하고 적적해지면 오묘한 법열(法悅)을 느낀다.
그것은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 있는 대단한 기분이다.
어떤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아 고함을 치기도 하고 자신을 다스리기 어려울 때도 있다.
참선자는 그런 때도 절대 기분에 빠지지 말고, 집착도 말아야 하며,
잘 될수록 더 주의하고 조심하여, 오직 애쓰고 애써야 한다.

참선자는 일체의 사량과 분별을 말고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법은 사량 분별이나 알음알이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고,
사량 분별심을 내면 낼수록,
알음알이는 붙이면 붙일수록 공부는 멀어지고 도에도 손해다.
이 세상에 다른 공부는 다 아는 마음으로 궁구하지만,
유독 이 공부만은 알지 못하는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이 공부는 헤아려 알고자 하면 천년 만년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들리면 몸은 가볍고 편안하며 거뜬해지며 지혜가 생긴다.
이전에는 이해가 안 되던 격전이 이해가 되고,
어록을 보니 몇 구절 내려가니, 어떤 사람은 ‘나는 깨쳤다’ ‘나는 다 해 마쳤다’하며
아는 소리를 하고 어디를 가면 법문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도 하고,
일을 마친 도인이 되었다고 하며 주유천하(週遊天下)하는 사람도 있다.
약간 지혜가 생겼다고 해서 알았다는 생각을 말아야 하며,
써먹으려고도 말고, 그럴수록 더 지극하게 정진해 가야한다.
화두가 몽중일여(夢中一如)의 경계가 지나면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안목이 트이고 힘이 난다.
아무리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 있더라도,
절대 즐기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하고 애써야 한다.
대부분의 참선자가 신통한 경계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 신통경계는 말변사(末邊事)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지엽적인 일이고 본분사(本分事)는 아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속효심(速效心)을 내기가 쉽다.
‘어서 빨리 공부가 되게 해야지, 어서 빨리 깨쳐야지,
누가 공부를 잘하게 해줄 선지식은 없는가’
등등 발리 공부가 되게 하고 깨치고자 하는 마음을 내기가 쉽다.
이런 속효심은 절대 내지 말아야 한다.
속효심을 내면 낼수록 공부는 더 더디다.
이런 속효심이 나면 성성하던 공부도 희미해진다.
속효심이 나면 날수록 마음을 더 안정되게 하고 지극히 담담하게 가져서 화두만 분명하게 지어가야 한다.
만약 마음씀이 조급하면 상기병을 유발하기 쉽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산란하기 쉽다.

수행자는 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를 점검 받아서 조금도 착오가 없이 정진해가야 한다.
선지식은 갖가지 수단과 방편으로 가르치고 이끌어 주면서 법기(法器)를 만들어 간다.
바른 길을 열어주고, 온갖 방법으로 시험하고,
미진한 것은 채찍질하며, 허황되고 실이 없는 것은 부수고, 치우친 것은 바로 잡아준다.
이 공부는 공부가 잘되는 사람일수록 선지식을 가까이 해야하고,
깨칠 때까지 선지식에 의지해야 하고,
깨치고 나서도 반드시 점검을 받아야 한다.
또 스스로 점검하고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공부를 잘하는지, 잘못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하여 잘하는 점은 더 잘하게 하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을 잘 못하는지,
단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가, 시정할 점은 어떤 것인가,
점검해서 고칠 수 있는 점은 바로 고치고,
바로 고칠 수 없는 것은 매일 고치려고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
화두가 안 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문제가 돼서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한 두 가지가 문제가 돼서 진의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문제점만 시정하고 보완하면 화두는 자연스럽게 들릴 것이다.
수행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자기를 훤히 알아서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화두 공부가 매일 진전이 있도록 해야 한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잘 들리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깊어져야 하고,
내일보다는 다음날이 더 순숙해야 한다.
공부가 날로 새롭고 나날이 깊어져서 점점 더 맑아지고 밝아져야 한다.
이 공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공부가 아니고,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공부가 이 공부이다.
이 공부는 해라 마라 할 필요가 없는 공부이다. 안하면 자기 손해이다.
인생의 참 행복과 보람은 이 공부, 즉 화두에서,
도(道)에서만 느낄 수 있다.
도를 떠나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인생은 노력 한 것만큼 값어치가 있다.
참선자여! 분발하시기 바란다.

그대 무상보리도(無上菩리道)를 구하고자 하는가
화두일구에 목숨을 걸어보라
몸과 마음까지 잊어버린 곳에 이르면
터럭 끝에 불국토 나투며 먼지 속에서 대법륜(大法輪) 굴리리라.

(이 글은 동화사 담선대법회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출처 : 마음의 고향 축서사

댓글목록

무상행님의 댓글

무상행 작성일

철야참선법회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큰스님의 원고로 달래 봅니다...

영영님의 댓글

영영 작성일

참선자를 위한 좋은 말씀이시군요.
큰스님 말씀 중에 나오는 몽산스님의 게송이 생각나기에 한번 옮겨 보았답니다.

‘어느덧 갈길 다하였네.
밝아 뒤집으니 물결이 바로 물이로다.
천하를 뛰어 넘은 노조주(老趙州)여
네 면목이 자못 이뿐이런가.‘

몽산스님께서 조주 무자를 참구하시다가 지은 게송이라고 하시는군요.

네 ~ 그저 옛 선인들의 경계가 부럽고 부러울 따름입니다.

혜안등님의 댓글

혜안등 작성일

매월 셋째주 토요일은 우리절 축서사에서 참선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저녁 9시부터 큰스님의 법문으로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참선을 합니다.
8월 21일 토요일이 참선법회날이네요.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참선에 대한 귀한 법문 잘 옮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고 웃음꽃 하나가득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