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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 선지식-불교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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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영 작성일10-07-05 18:56 조회2,08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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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현로선사

 

불교신문 근현대 선지식 기획 연재 시리즈에 보문현로 스님의 수행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우리 큰스님의 은사 스님이신 희섭스님의 은사스님이시기에 옮겨 보았답니다.

 
 
한암스님의 제자로 수행자 외길을 걸은 보문현로(普門玄路, 1906~1960)스님. 오직 법(法) 구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정진했다. 당신의 입적을 초파일 지난 후에 알리라는 유훈을 남길 정도로 생사에 얽매이지 않았던 보문스님의 수행일화를 비문 내용과 손상좌 무관스님(전 총무원 총무부장)의 회고로 정리했다.
 
 
“세속을 떠나 진심으로 출가한 이 누구입니까”
 
 
한암스님 제자로 수행자 외길 걸어
 
선원서 공양주 소임 자처하며 하심
 
 
○… 금강산 마하연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였다. 마침 음력 정월대보름이 되어 사중(寺中)에 있는 대중이 성불도(成佛道) 놀이를 하면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겼다. 이 무렵에는 스님들이 대중을 상대로 번갈아가면서 법문을 하는데, 대중을 웃겨야 법상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법상에 오른 스님들이 세속의 이야기를 하면서 대중을 웃기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고 한다. 당시 보문스님은 “이전에는 모두 부처님 말씀을 하더니, 대보름이라고 세속의 이야기를 하고, (성불도)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 그길로 마하연을 나와 금강산에 있는 또 다른 대찰(大刹)인 장안사로 걸음을 옮겼다. 마하연을 나와 장안사로 향했다. 장안사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장안사 부목 방에서 하룻밤을 청한 스님은 새벽녘에 기관차가 증기를 내뿜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서둘러 큰절을 나섰다. 험준한 산길을 따라 걷는데, 지게에 시신을 실은 할아버지가 앞서 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추월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 걸었다. 산등성이를 돌아 내리막길에 나무꾼들이 쉬어가는 ‘나무바탕’에 이르렀다.
 
<사진>봉화 축서사에 있는 보문스님 진영.
 
○… “마침 잘 됐다. 지금 추월해서 가야지.” 보문스님이 할아버지 곁을 지나서 가려고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그때 할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로 스님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이쿠”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 이놈, 너는 안 죽을 것 같으냐. 지게를 받아 줘야지. 에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보문스님은 무상(無常)을 절감하고, 마하연에 머물고 있는 석우스님을 찾아갔다. 석우스님은 “자네는 나보다는 오대산 한암스님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면서 “한암스님에게 가서 출가할 것”을 권했다.
 
○…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용맹정진 했다. 당시 지암 이종욱스님이 은사 한암스님이 머무는 거처가 허술한 것을 알고, 새 전각을 마련했다. 본래 영산전이 있던 자리에 ‘ㄷ’자형의 건물을 지었다. 동당(東堂), 서당(西堂), 그리고 영산전이 들어섰다. 하지만 한암스님은 그 거처에 머무는 것을 사양했다. 그렇다고 마냥 비워둘수도 없었다. 이때 보문스님은 사형 현칙스님과 함께 결사(結社)를 하기로 뜻을 세웠다. 현칙스님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한 당대의 지식인이다. 보문스님은 현칙스님을 비롯해 동성.도성.경우스님 등 30여명과 같이 정각을 이루기 위해 결사를 단행했다.
 
○… 30명의 납자들은 90일간 용맹정진을 결의하면서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여기서 도망을 가면, 상원사 청량선원에 방부를 들이지 못한다. 정진하다 죽으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니, 눈 속에 묻었다가, 봄이 오면 다비를 한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좌선하는 그 자리에서 목침을 베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 잠자는 것의 전부였다. 이 당시에 보문스님은 흐트러짐 없이 좌복 위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수마(睡魔)가 찾아오면, 밖으로 나왔다. 살을 에는 맹추위가 몰아닥치는 그 순간, 보문스님은 선방 마루에 앉아 다시 가부좌를 하고 화두를 챙겼다.
 
○… 추위는 물론 잠과 싸우면서 드디어 견성(見性)에 도달한 보문스님은 환희심이 넘쳤다. 포행을 하거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오대산 자락을 거닐면서 산이 떠나가도록 오도송(悟道頌)을 소리쳤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무서운 것도, 장애도 없었다. 그런 보문스님을 보고 입승 소임을 맡은 스님이 “저러다, 현로 수좌가 미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한암스님이 보문스님을 불러 앉히고, 공부의 결과를 점검해 주었다. 그 뒤로 보문스님은 더욱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고 한다.
 
○… 경봉스님이 보문스님에게 보낸 편지 한통이 있다. 이 편지에서 경봉스님은 게송을 지어 보내면서 “보궁에서 기도하고 나올 때는 자물쇠로 잠그는데, 그 열쇠는 어디에 두느냐”고 물었다. 이때 보문스님은 답장을 보내기를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관계없는 일이고,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고 했다.
 
○… 병마가 찾아왔다. 늑막염(肋膜炎)으로 병고를 겪었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제자들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셔야 한다”고 했지만,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병세가 심해진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서울(경성)에 있는 한 병원을 찾아갔다. 당시 병원시설이 좋지 않았다. 의료품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수술에 필요한 마취제가 부족했다. 일본에서 공수해 오려면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수술에 바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스님은 “업병(業病)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면서 “이것도 인연이니, 그대로 수술을 하자”고 했다.
 
○… 머뭇거리던 의사는 스님의 단호한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술 도중 스님은 정신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의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갈비뼈를 두 대나 끊어내고 봉합을 마칠 때까지 또렷한 의식을 유지했다. 놀라운 일은 3일 뒤에 또 일어났다. 3일치의 치료비 밖에 없던 스님은 의료진 몰래 솜뭉치만 하나 들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던 스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 스님이 맡은 단골소임이 있었다. 공양주가 그것이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는 번거로운 소임이었지만, 스님은 즐겨 맡았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정진할 때도 즐거운 마음으로 공양주 소임을 맡았다. 또한 아침에는 불단(佛壇)의 촛대와 향로를 닦고, 오후에는 나무 한 짐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대중을 위해 늘 하심하는 자세로 정진했던 것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보문스님의 ‘법주사 법문’
 
허름한 차림에 공양간서 일하는 보문스님을 법주사 대중은 누구하나 눈여겨보지 않았다. 종무소 소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문스님 또한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번은 땔나무를 하다 종무소 직원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스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법주사 대웅전에서 법문을 하게 됐다. 그제야 보문스님을 알게 된 대중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당시 스님의 명법문이다. “이곳이 충청북도이지요.” “네” “예로부터 충청도는 나라에 충성하는 고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라에 충성한 이는 누구입니까.” “…” “이곳이 보은군이지요.” “네” “예로부터 은혜에 보답하는 곳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불보살의 은혜에 보답한 이는 누구입니까.” “…” “이곳이 속리산면이지요” “네” “예로부터 세속을 떠나 도를 닦는 곳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세속을 떠나 진심으로 출가한 이는 누구입니까.” “…” “이곳이 법주사이지요.” “네” “예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이 머무는 도량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과연 정법(正法)에 머문 이는 누구입니까.” “…”
 
 
 
 
■ 행장
 
한국전 당시 고아 돌봐
 
“원적 알리지 마라” 유훈
 
1906년 7월2일 경북 문경시 마성면 남호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신성균(申聖均)선생, 모친은 진성(眞城) 이씨(李氏). 본관은 평산(平山). 모친이 금난법의(金欄法衣)를 입은 노스님에게 염주를 받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개성이 특출하고 고집이 철저했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해 늘 마음 아파했다. 왜경(倭警)과 다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스무 살에 집을 나서 전국을 떠돌았다. 때로는 밥을 빌어먹고, 때로는 잡역부(雜役夫)로 일했지만 마음에는 늘 도(道)에 대한 갈망이 깊어갔다. 출가 전 부산항에서 일하면서 임금을 체불한 일본 관리에 혈혈단신으로 맞서 근로자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사진>보문스님이 한암스님 회상으로 출가했던 오대산 상원사. 불교신문 자료사진
 
이후 기차를 타고 올라와 금강산을 유람하다, 유점사 마하연에서 석우(石友)스님을 만나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었고, 석우스님의 권유로 오대산에 주석하고 있는 한암(漢巖)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가 1936년 2월8일로, 스님의 세수 30세였다. 이후 불철주야 참선수행에 전념했으며, 공부의 깊이를 인정받아 한암스님에게 보문(普門)이란 법호를 받았다.
 
1939년 가을에 오대산을 나서 두타행각(頭陀行脚)에 올랐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사형(師兄) 현칙(玄則)스님 등 선승(禪僧)들과 함께 정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주석처를 옮긴 보문스님은 탁발을 하면서 상이용사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다.
 
1960년 팔공산 삼성암 토굴에서 머물던 스님은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시내에 있는 보현사로 자리를 옮겼다. 부처님오신날을 이틀 앞두고 상좌 희섭(喜燮)스님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한 스님은 “입적을 알리지 말고, 초파일이 지난 후 조용히 장례를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이때가 1960년 4월6일(음력)이었다. 세수 55세, 법납 25세. 스님의 다비는 동화사에서 엄수됐다.
 
상좌로 희섭스님을 두었다. 평생 일의일발(一衣一鉢)과 주장자, 삿갓, 바랑이 전부였을 만큼 소박하고 검소하게 지냈다.
 
 
[불교신문 2636호/ 7월3일자]
2010-06-30 오전 10:33:5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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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혜안등님의 댓글

혜안등 작성일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보광화님의 댓글

보광화 작성일

영영님께서 또 궁금한 아니 알고 있으면 좋을듯한 기사를 올려 주셨군요.
 올려 주셔서 앎의 행복을 누리게 하시오니
 이 중생 꾸벅 절 드립니다...

늘 좋은 날 되세요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