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고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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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09-09-27 13:17 조회2,391회 댓글1건본문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려하고 여러분들은 들으려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분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그 가르침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본래 성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상에만 머물고 있는 우리는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하다 열등하다,
귀하다 천하다며 분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만 학대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학대를 하니 더 큰 문제입니다.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 다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식으로 우열을 따지고 취사선택하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공을 보면 허망하기만 한데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 갑니까?”
수많은 재료가 섞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재료 중에서 무엇을 갖고 ‘보제루’라 하겠습니까?
나무를 보고 ‘보제루’라 할 수 있습니까? 이 기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 ‘보제루’도 실제로 없는 것이고 이름일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 보제루가 허물어지면 단지 보제루를 구성했던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C라고 이름해 봅니다. 이 C는 A와 B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A와 B가 없어지면 C(삼각형)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A와 B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 C를 우리는 공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없다라 하기도 하고 무아라고 합니다.
하는데 이 60조 덩어리 중 어느 세포를 갖고 ‘나’라고 얘기하겠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나’가 없다 하지만 ‘나’가 있지요?
여러분 지금 이렇게 앉아있지 않습니까?
그대로가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체득하면 분별을 하지 않는 삶을 사니 대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방금 설명을 드린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체득하지 못해서
그렇지 체득해 보면 본래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은 굉장한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무정이 다 그렇게 본래 이토록 위대하게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습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그러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역순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이렇게 해서 사실 달을 보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공 도리’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위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오늘부터 화내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야 합니다.
도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여러분들도 도인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서되 환상을 갖지는 마십시오.
01.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02. 우리도 부처님같이
03. 인연
04. 거울을 닦아내듯
05. 나의 연꽃
06. 님의 모습
07. 임은 변함없으리
08. 사바의 꽃이여
09. 일천강에 바치는 달
10. 붓다의 메아리
11. 발원
12. 피안의 세계
에서 온 메일인데 글과 음악이 좋아서 정중히 모셨습니다.
댓글목록
법융님의 댓글
법융 작성일
깨달음은 참아내야 하는 고행의 과정을 반드시 거처야 하는것으로 알아 왔기때문에
근기가 하열한 저와같은 중생은 감히 상상도 못할만큼 요원하다고 평소에 그렇게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미미하나마 희망도 갖어 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깁니다'
귀한 글을 올려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