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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 무명(無明)을 밝히는 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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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6-05 10:34 조회2,07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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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 무명(無明)을 밝히는 먼동

1. 정견(正見)의 중요성

주변 상황이야 어떻든 자신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어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침통한 표정으로 찾아왔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믿었던 사장은 공금을 횡령하고 회사는 반사회적 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자신의 노동은 악의적 의도에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 비리를 지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 같은 경우를 자주 봅니다. 본인은 열심히 일했지만 시간과 힘만 낭비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전후를 바르게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옳고 그름을 바로 보지 못할 때 우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성과는 오히려 잘못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이치는 신행(信行)과 수행(修行)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사(正邪)를 바로 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은 종교적 실천과 수행에 있어서 관건적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반으로 가는 여덟 가지 길로 비유되는 팔정도(八正道)에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아함경󰡕에 따르면 팔정도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즉 “여덟 가지 바른 길을 걷는 자는 마치 등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어둠은 곧 없어지고 밝은 광명이 가득 차고 만다. 지혜의 등불은 어리석음의 어둠을 없애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은 정견(正見)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참답게 보고 실천할 때 무명을 가로질러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숫자로써 말할 때는 의미가 중요한 것부터 시작한다. 정견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맨 처음에 나온다.[以數言之大者爲始 正見最大是故在初]”고 했습니다. 첫째 둘째와 같이 순서로 설명하는 문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맨 먼저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정도 가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면 제일 먼저 설명되고 있는 정견이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고통은 삶에 대한 잘못된 관점, 그릇된 가치관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정견(正見)의 의미

불교는 실천을 강조하지만 실천에 앞서 자신이 어떤 길로 가야할지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행을 할 때 부산으로 갈 것인지 광주로 갈 것인지 목적지를 분명하게 해야 하는 것처럼 종교적 실천에도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도 “길을 가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우선(行道故以見爲先)”이라 했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곳을 명확히 인식하고 갈 때 열반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견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 가운데 하나는 어둠을 밝히는 먼동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잡아함󰡕 28권에는 “해 뜨기 전에 먼동이 밝아오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타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正思惟) 내지 정정(正定)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이 해탈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해탈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잉태한 무명을 꿰뚫어보는 정견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견(正見;samyak-dṛṣṭi)이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 ‘올바른 관찰’, ‘바르게 봄’을 의미합니다. 󰡔중아함󰡕 「분별성제경」에서는 정견에 대해 사성제를 닦을 때 “법(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견(正見)으로부터 정정(正定)에 이르기까지 팔정도를 수식하는 ‘정(正; Samyak)’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올바른’이라고 해석됩니다. 하지만 정(正)에는 ‘완전한’, ‘완성된’ 또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과 같은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은 ‘바르다’라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세고(安世高)는 󰡔불설팔정도경(佛說八正道經)󰡕을 번역하면서 ‘정(正)’이라는 표현대신 ‘제(諦)’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제(諦)’란 사성제(四聖諦)의 경우에서 보듯이 진리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팔정도에서 ‘정(正)’이란 진리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이란 삿되지 않고 참다운 것, 진리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의미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에 반대가 되는 것을 팔사(八邪)로 설명하는 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재가자에게 정견의 의미

부처님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 설법의 방법과 내용을 달리하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습니다. 정견을 설하실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재가자에게 대한 정견의 설명과 출가자에게 대한 정견의 설명이 달랐습니다. 재가자에게 정견이란 인과(因果)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함경󰡕에 따르면 정견이란 “첫째는 바른 소견이다. 바른 소견이란 보시를 믿고, 제사 지내는 것을 믿고, 선악(善惡)의 행동과 복을 믿고, 부모를 믿고, 천하의 도인을 믿고, 구하는 것을 믿고, 바른 행위를 믿고, 바른 생활을 믿어서 현생(現生)이나 내생(來生)에 스스로 슬기롭게 증득하여 성취하고 곧 서로 알려주며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정견에 대해 보시를 믿고, 선악(善惡)과 선악업(善惡業)의 과보(果報)와 삼세인과(三世因果)와 같은 인과업보(因果業報)의 도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재가자에게서 정견이란 선악과 인과(因果)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고 삶의 윤리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선악과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정견은 세속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통용되는 선악을 수용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도덕을 부정하는 사견(邪見)이 되어 범죄와 비윤리적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재가자에게 정견의 의미란 ‘불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초심자에게 정견은 경험자로부터 올바른 견해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뿐 그 견해의 증명이나 체험 같은 것은 스스로 얻지 못했으므로 다만 지도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초심자에게 정견은 ‘바른 믿음’ 즉 ‘정신(正信)’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견은 자신이 듣고 배운 불교의 교리, 부처님의 가르침,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에 대한 분명한 신심을 갖고 종교적 실천을 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출가자에게 정견의 의미

정견을 선악(善惡), 인과응보(因果應報) 등을 바로 보는 것이라는 설법은 어디까지나 재가자를 위한 윤리적 범주의 설법입니다. 그러나 출가자를 대상으로 설명할 때는 사상적인 측면이 강조됩니다. 즉 정견은 연기(緣起),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와 같은 교설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합니다. 출가자의 삶의 목표는 번뇌와 집착뿐만 아니라 일체의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견도 모든 고통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설명됩니다.

이런 의미의 정견이란 고(苦)를 고라고 생각하고, 고의 발생 원인이 집(集)이라는 사실을 통찰하고, 고를 소멸시키기 위한 도(道)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는 “비구들이여, 정견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바르게 보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바로 보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바로 보는 것,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사성제를 올바로 이해하고 꿰뚫어보는 것이 정견이라는 것입니다.

출가자에게 정견의 또 다른 의미는 일체는 무상하며, 일체는 독립적 자아가 없으며, 일체는 고통이라는 삼법인(三法印)의 진리를 바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출가자에게 설해지는 정견은 불교의 핵심적 교설에 대해 바로 깨닫고 그에 입각해서 모든 존재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의 교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탐욕을 소멸시키고 고통으로부터 마음이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선(善)과 선하지 못함〔不善〕에 대한 바른 이해

지금까지 설명한 정견이란 선악이나 인과응보를 바로 아는 윤리적 측면과 삼법인과 사성제와 같은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상적 측면입니다. 하지만 정견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열 가지 악업〔十惡業〕’의 제거와 ‘열 가지 선업〔十善業〕’의 실천과 같이 보다 보편적 실천으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중부󰡕 「정견경(正見經)」에 따르면 정견이란 “선하지 못함(不善)과 선하지 못함(不善)의 뿌리에 대해서 알고, 선함(善)과 선함(善)의 뿌리에 대해서 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선하지 못함’이란 다름 아닌 ‘생명을 해치는 것’, ‘도둑질하는 것’, ‘잘못된 성관계를 갖는 것’, ‘거짓말하는 것’, ‘이간질시키는 것’, ‘욕설하는 것’, ‘꾸밈말 하는 것’, ‘탐욕’ ․ ‘분노’ ․ ‘어리석음’을 말합?求?. 여기에 나열된 열 가지 악업은 곧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이라는 십악업(十惡業)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불선을 행하게 되는 근본적 뿌리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세 가지 독소, 즉 탐진치(貪瞋癡)라고 설합니다. 따라서 불선이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나쁜 행위를 말하고, 그 뿌리는 삼독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는 것이 정견입니다.

반면 선(善)과 선의 뿌리는 앞에서 설명한 열 가지 불선(不善)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 탐진치 삼독을 제멸하는 것이 됩니다. 󰡔수행본기경󰡕 「출가품」에서도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되 어리석어 어둠에 빠진 이에게 ‘팔정도의 물〔八道水〕’을 가져다 삼독의 때를 씻어 주리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견은 단지 바른 사고를 갖는다는 의미를 벗어나 삼독과 열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열 가지 선업을 실천할 수 있는 정신적 자세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견은 재가자의 윤리적 실천과 출가자의 교리적 이해와 실천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 악업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 실천으로 확장됩니다

서재영(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 www.buruna.org)

댓글목록

축서사님의 댓글

축서사 작성일

이 순간도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자들의 노력(수행)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무명에서 벗어나는 그날까지 ........
기필코 성불하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