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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과 화순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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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h.y 작성일09-01-23 20:11 조회2,3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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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찬탄했던 적벽과 겨울비경, 화순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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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미지는 스산함이다. 맨땅을 오롯이 드러낸 들녘이나 벌거벗은 숲은 바라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눈이라도 쌓였다면 나으련만 이도저도 아닌 탓에 눈길 둘 곳을 찾지 못해 마냥 헤매기 일쑤다. 겨울바다 또한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럴 때는 한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풍경이 고마울 듯 싶다. 아니 차분하면서도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겨울이 오히려 ‘스산함’을 즐기는 여행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때마침 전남 화순을 찾았다. 사계절 언제라도 좋은 고장이지만 겨울 풍경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시인묵객이 찬탄했던 적벽, 그리고 미륵세상을 기약하는 천불천탑을 만났다.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픈 이서적벽
화순에 가면 마치 칼로 잘라놓은 듯 수직으로 서 있는 적벽이란 이름을 가진 절벽이 있다. 동복천이 휘감고 흐르는 옹성산 주변에 늘어선 절벽으로 조선 중종 때 귀양온 신재 최산두(1483~1536)가 이름 붙인 이후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그는 북송 때 시인 소동파가 노래한 중국 양자강 황주적벽에 버금갈 만큼 아름답고 장쾌한 절경을 가졌다고 노래했다.

이후 임억령·김인후,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 등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을 노래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적벽은 이서(혹은 노루목·화순·망미·장항)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중 이서적벽이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동복천이 1970년 광주 시민 식수원으로 지정될 때 이서적벽과 보산적벽이 식수원 보호구역에 포함되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게다가 1982년 착공한 동복댐으로 인해 적벽의 50m 정도가 물에 잠겨 비경을 다 볼 수 없게 됐다지만 웅장한 자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서적벽 일대는 댐 건설로 수몰된 15개 마을 출신 실향민 등 일부만 제한적으로 출입이 허용되고 있다.

광주와 화순군의 도움을 받아 감시 초소를 거쳐 이서적벽으로 향했다. 약 5㎞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숲길을 달리면 잔잔한 호수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곧이어 완만한 커브길을 돌아서자 꿈 속에서나 본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호수 한 가운데를 향해 돌출된 절벽 끝자락에 아담한 정자가 서 있고, 그 뒤로 이서적벽이 푸른 물결에 멋지게 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적벽 바로 위에는 장성 입암산성, 담양 금성산성과 함께 전라도 3대 산성으로 꼽히는 철옹산성이 옹성산 정상에 버티고 있다. 이들 인공과 자연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포진한 듯 절묘하게 어울려 한 폭의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서적벽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매년 4월 초파일이 되면 해 지고 달 뜨기 전 부처의 탄생을 기리는 ‘낙화놀이’가 열렸다고 한다. 놀이는 10여 명의 날쌘 장정들이 적벽에 기어올라가 미리 말려서 마련해 둔 풀이나 볏단을 사람 팔뚝 크기의 용 모양 달집을 만들어 그 속에 돌을 넣은 후 불을 붙여 강물을 향해 던지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적벽 아래 모여있던 군중들은 쏟아지는 불덩이를 보며 환호하는 한편 북·장구·꽹과리 등으로 요란한 음주가무를 즐기며 신명나게 놀았다고 한다. 이같은 의식은 적벽 아래 살면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한을 달래고, 자신의 염원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낙화놀이는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중단됐으나 해방 후부터 수몰 때까지 계속됐다.

물염적벽은 일반인도 쉽게 볼 수 있다. 물염적벽은 풍기군수를 역임한 송정순이 이곳에 자신의 호 물염을 따 지은 정자인 물염정 바로 앞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규모나 모습은 노루목적벽에 비할 바 아니지만 김삿갓이 배를 띄워놓고 노래했을 만큼 운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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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상상의 공간 운주사
국내 최대의 와불로 유명한 운주사에는 80개의 돌부처와 17개의 탑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각각 1000개의 돌부처와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운주사는 이름 앞에 항상 ‘천불천탑’ 넉자를 앞세운다.

그러나 창건한 이가 누구인지, 역사가 얼마나 됐는지 누구도 모른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 외에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많은 문화재를 품었으면서 유서 깊은 도량 정문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설명문이 없다. 그저 보는 사람 마음대로 생각하면 된다. 무한상상의 공간이라 불러도 좋은 것은 이 때문이다.

무한상상의 이유는 또 있다. 돌부처와 탑의 형태가 제각각이다. 특히 석불에서는 장엄·우아·정제·세련 등 부처의 존재 의미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대신 조잡·엉성·촌티 등의 단어만이 떠오를 지경이다. 게다가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돌부처를 제외하곤 성한 것이 없다. 그런데 친근하면서도 따뜻한 자비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같은 상상은 일주문을 지나 왼쪽으로 걸어가면 말끔하게 정돈된 잔디밭에서 시작된다. 한켠에 14기의 돌부처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데, 흩어져 있던 것을 한 데 모아놓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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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와불, 마치 고뇌하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무언가를 응시하는 돌부처 등 각양각색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일부 돌부처의 뒷모습이 정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면만 불상일 뿐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바위덩이다. 어이가 없을 만큼 엉성하다. 이런 돌부처들은 이곳 외에 다섯 곳에 모여 있다.

탑은 그나마도 나은 편이다. 오랜 풍상에 깎이고 닳았지만 당시의 예술적 세련미는 여전하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탑은 원형 다층석탑, 발형 다층석탑, 대웅전 앞 다층석탑 등이다.

이중 원형 다층석탑(보물 798호)과 발형 다층석탑의 모습이 기이하다 못히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탑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린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일명 ‘빵떡탑’이라고도 불리는 원형 다층석탑은 마치 초코파이를 켜켜이 쌓아놓은 듯 둥그렇게 깎은 돌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뒤 명당탑도 비슷한 형태를 갖췄다. 발형 다층석탑은 주판알 또는 스님들의 식기인 바리때를 포개놓은 형상이다. 둥그렇게 돌을 깎아 탑을 세웠다는 생각이 기발하기만 하다. 대웅전 앞 다층석탑은  본전을 지키는 탑이라 보기에 민망할 정도다. 탑신은 물론 옥개석도 온전한 것이 없다.

이들 모두 다층석탑이라 부르는 이유는 몇 층짜리였는 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도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우아함을 강조하는 번듯한 탑에 비할 바 아니었다.


원형 다층석탑 바로 앞에 있는 석조불감도 재미있다. 불감이란 부처를 모시기 위해 만든 건축물이다. 당연히 절집이 들어선 골짜기의 중심부에 자리한다. 불감은 정교하지 않지만 팔작 형태의 지붕과 용마루까지 갖췄다. 감실에 모셔진 현세불과 미래불은 남북으로 등을 맞댄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 산자락에는 불사바위란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서면 절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 위에는 움푹 파인 구멍이 있는데, 한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이곳에 앉아 창건을 지휘했다고 한다.

지난 4월 운주사 주변에 산불이 발생, 인근을 모두 태웠지만 불사바위까지만 타고 절은 무사했다. 이 바위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도선국사의 신통력이 화를 면하게 해줬을까. 이 또한 상상의 자유다.

출처 : 조인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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