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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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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능엄화 작성일09-05-25 16:28 조회1,934회 댓글1건

본문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술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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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의 시에서는 뜨듯한 여물 냄새가 난다. 느림보 소가 배 속에 든 구수한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투실한 입모양이 떠오른다. 잘 먹었노라고 낮고 길고 느리게 음매 울것도 같다. 21세기 벽두의 우리 시단에서 그의 시는 ‘오래된 미래’다. 찬란한 ‘극빈(極貧)’과 ‘수런거리는 뒤란’을 간직한 청정 보호구역이다.

‘시인‧ 평론가가 선정한 2003년 최고의 시’ 로 뽑히기도 했던 이 시는 겹겹의 배경을 거느리고 있다. 수묵의 농담(濃淡)처럼 그 그림자가 자연스럽다. 죽기 직전의 개조개가 삐죽 내밀고 있는 맨살에서, 죽은 부처의 맨발을 떠올리는 상상력의 음역은 웅숭하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아버지들의 맨발, 그 부르튼 한평생을 얘기하고 있다. 시를 포착하는 시적 예지와 시안(詩眼)의 번뜩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에 제일 나중에 나와,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하중을 견뎌 내고서는, 세상으로부터 제일 나중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맨발이다. 맨발로 살다 맨발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은 평속(平俗)한 세파를 화엄적으로 견뎌 내는 존재들이다. 길 위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길 없는 길을 ‘맨발’로 걸어 다니다 길 위에서 열반에 든 부처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내밀어 보여 준 두 발에는 천 개의 바퀴살을 하나로 연결시킨 바퀴테와 바퀴통의 형상이 새겨 있었다고 한다. 부처는 무량겁 지혜의 형상을,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제자에게 일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바깥’에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이 맨발의 움직임은 적막하다. 어물전의 개조개가 무방비로 내놓았다가,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맨발을 거두어들이는 그 느린 속도에는 죽음이 묻어 있다. 무언가를 잃고 자신의 초라한 움막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맨발’ 의, 적나라한, 온 궁리를 다한 뒤끝의 거둠이다. 탁발승의 벌거벗은 적멸이요, 개조개 속에 담긴 부처다.

‘조문’ 하듯 만져 주는 시인의 손길 또한 애잔하다. 개조개가 슬쩍 내보인 맨발에서 천 길 바다 밑을 걷고 또 걸었던 성스러운 걸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우리의 아버지들과, 그 범속(凡俗)한 빈궁 속에서 세계의 아득한 끝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차디찬 맨발을 만져 본 사람에게 이 시의 적막함은 유난하다. 인연이든 시간이든 기적이든 순력(巡歷)을 다했기에 ‘바깥’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부르튼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기에, ‘아-’ 하고 우는 것들을 채워주었기에, 느리고 느리게 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바깥」)

 

                                     - 해설 : 정끝별 -

댓글목록

처음처럼~님의 댓글

처음처럼~ 작성일

시가 좋은 것 같기도,뭔 말인지 모르니 아닌 것 같기도...
그런데 아래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좀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참 좋은 시 같습니다.^^

성불하십시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