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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들이야기/백운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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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慧明華 작성일09-04-03 10:46 조회2,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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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5}

-無心無念禪을 강조한 麗末의 禪僧-


(1) 생애와 저술

白雲和尙 景閑은 태고국사 보우(1301-1382). 나옹화상 혜근(1320-1376)등과 함께  고려 말의 대표적 고승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경한의 불교사적 위치는 태고나 나옹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결과 그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물론 경한의 활동이 이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결과라 하겠지만,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성과가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경한의 생애와 저술 선사상 그리고 그의 불교사적 위치 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경한의 생애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白雲和尙語錄>이 유일한 상태이며 <高麗史>에 그에 관한 단 한 편의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도 그가 49세 때인 1346년 이후의 사실만 전하고 있어, 그 이전까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을 전혀 알 길이 없다.

 경한은 법호가 백운이며 1299년 전북 고부에서 출생했다.어려서 출가하였다는 그의 행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충목왕 2년(1346) 5월 선묘에 승 백운에게 명하며 비를 벌었으나 얻지 못하였다”는 <高麗史>의 내용이다.

 이후의 행적은 <白雲和尙語錄>으로 구성할 수 있는데 정확한 연도추정이 가능한 것은 약 20여 개가 된다. 경한은 1351년(충정왕3) 5월 중국의 호주 가무산 천호암으로 가서 임제종의 거장인 石屋和尙 淸珙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육조스님과 조주의 화두 등을 예로 들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깨달음을 구했으며, 같은 해에 지공화상에게 게송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지공은 나옹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본래 인도인이며 원나라에 들어와 있다가 충숙왕 말년에는 고려에서 거주하였다.

 

 1352년 정월 석옥을 다시 찾은 경한은 깨달음의 큰 전기를 맞이한다. 즉, 아침  저녁으로 석옥을 만나 의심을 품던 어느날,  혼자 무심무념의 참뜻을 깨닫자 석옥이 찬탄을 하면서 인가하였던 것이다. 당시 경한은 “곧 내 마음에 맺혔던 의심은 얼음처럼 풀리고 무심의 위없는 참뜻을 깊이 믿게 되었다(卽 我心疑 願然永釋   深信無心無上眞宗)"고 스스로 표현하였다. 스승인 석옥과 이별을 한 후 잠시 휴휴선암이라는 곳에서 머물렀던 경한은 1352년 3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그 해에 보법사에서 태고를 만나기도 했던 그는 성각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을 하던 중 드디어 대오의 경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계사년(1353) 정월 17일 낮에 단좌를 하고 있었는데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 있었으니, 永嘉大師 <證道歌> 중의 “망상을 버리려 하지도 말고 진실을 구하려 하지도 마라. 無明의 實性이 곧 불성이요, 幻化의 空身이 곧 법신이다”라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그 말을 깊이 음미하였을 때 갑자기 바로 無心이 되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전과 후가 아주 끊어져 조금도 의지할 곳이 없어 망연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삼천세계가 온통 하나, 자기 자신임을 보았다.

 

 大悟를 이룬 다음 해인 1354년(공민왕 3) 6월,  석옥의 제자인 法眼禪人이 호주 가무산 천호암에서 석옥화상의 辭世頌을 가지고 와서 경한에게 전하였다. 현재 학계의 일부에서는 이 사세송의 전달 사실을 놓고 석옥의 嫡嗣는 태고가 아니라 경한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세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운을 모두 사서 청풍을 팔았더니

온 집안이 텅 비어 뼛속까지 가난하다.

마침 한 칸의 草屋이 남아 있어

떠나는 길에 다달아 丙丁童子에게 주노라.

(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徹骨窮 留得一間芽草屋 臨行付與丙丁童)


 같은 해에 그는 안국사에서 지공화상에게 여러 편의  게송을 올리기도 하였다. 경한은 1357년 태고의 천거로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서 그는 나이 68세가 되던 1365년 6월, 해주 신광사의 주지로 들어갔다. 이때도   주지를 사양하겠다는  글을  왕에게 올렸으나   결국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 신광사는 당시의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찰로, 경한은 이때부터 몇 년 간 왕실과 연관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즉 1368년(공민왕 17)에는 왕비  노국공주의  願堂으로 세워진 홍성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1370년에는 9월에 실시했던 功夫選의 試을 맡기도 하였다. 신광사 주지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활동은 나옹화상의 적극적인 천거로 인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369년 김포의 포망산에 있는 고산암이라는 곳에서 지공화상의 讚을  쓰기도 했던 경한은 1374년(공민왕   3)여주 취암사에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인생 70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77년 살다가 77년에 가나니

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머리두면 바로 고향이거늘

무엇하러 배와 노를 이끌어 특히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리.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무는 곳 없나니

재를 만들어 四方에 뿌리고 施主의 땅을 범하지 마라.

(人生七十歲 古來亦希有 七十七年來 七十七年去 處處皆歸路 頭頭是故鄕 何 須理舟楫 特地欲歸鄕 我身本不有 心亦無所住 作灰散四方 勿占檀那地)


 경한은 李穡이 지은 <白雲和尙語錄> 서문에 의하면 대선사라는 승계를 지녔음이 확인된다. 비록 선종계 내에서는 국 · 왕사 다음으로 최고의 위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사후에 추증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결국 그의 생애는 말년의 몇 년 간을  제외하고는  태고나 나옹과 같이 왕실과 밀접했던 부분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어록 서문을 썼던  李玖의 표현처럼 “천진하고 거짓이 없어 형상을 빌려 이름을 팔지 않았으니 眞境에 노는 사람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현존하는 경한의 저술로는 <백운화상어록>과 <佛祖直指心體要節>이 있다. 어록은 그의 시자였던 釋璨 · 達港 등이 기록한 것으로, 상 · 하 양권으로 되어 있으며 李穡과 李玖의 서문이 앞에 붙어     있다. 1378년 판각한 것이 전해져 오다가 경성제대에서 1934년 이것을 영인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동화씨는 이 어록에 대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선사들의 법어집으로서도 美文 · 통쾌한 점으로는 이 이상 가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要節은 그 내용보다 1377년 간행된 세계 最古의 鑄字本이라는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下卷만이 소장되어 있던 것이 밝혀짐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이 저술은 역대조사들의 偈 · 頌 · 讚 · 銘 · 書 · 詩 · 法語 등에서 선의 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정수들이 抄錄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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