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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의 흔적 축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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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석규 작성일09-10-30 15:46 조회2,015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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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靈鷲山)의 흔적, 축서사

‘영축산’은 인도의 마갈타국 왕사성 부근에 있으며, 석가모니가 성도한 후 설법을 한 4곳 중의 한 곳으로 영험하게 여기는 곳이다. 석가는 이곳에서 특히 법화경 설파에 몰두하였다. 이런 연유로 유명세를 타면서 영축산은 이제 인도의 마갈타국의 고유한 산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산이 되었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품고 있는 후덕한 산도 영축산이다.
이처럼 영축산은 유명세 때문에 유명 사찰을 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산 이름에 영축산 흔적이 보이기만 하면 일단 그 산은 평범하지 않은 산으로 봐야 한다. 아울러 산 이름이ꡐ영취산ꡑ등으로 표기된 산은 영축산의 오기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도 알아 두어야 한다. ‘鷲’자의 글자 모양이 ‘취’자로도 발음되기 때문이다. ꡐ영축산ꡑ이란 부처님이 설법을 한 인도의 그리드산 이름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불교지명이며, 그래서 불가에서는 ‘취’자로 읽지 않고ꡐ영축총림ꡑ또는ꡐ영축산ꡑ등 ‘축’으로 발음한다. 사찰 벽화를 뜻하는 탱화(幀畵)의 ꡐ幀ꡑ자는ꡐ그림 족자 정ꡑ인데ꡐ탱ꡑ자로 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연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글자와 관련된 지명 오기 헤프닝은 심심찮게 나타나곤 하는데, 축서사 역시 한때 ‘취서사’라고 엉뚱하게 읽혀지던 일이 있었다.
어찌했든 축서사는 문수산 중턱 해발 700여m나 되는 곳에 잘 은폐되어 있으며, 가파른 높이를 진입할 때의 긴장과는 달리 경내를 들어서면 퍽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중사찰이다. 지금은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되어 다소 맛이 달라졌다지만, 얼마 전만하여도 금방 쓰러질 듯 한 석등 하나 끌어안은 작은 암자 하나 달랑한 초라한 사찰이었다. 일년에 한두 번, 소풍이랍시고 잠시 들렀다 떠나는 초등학교 꼬맹이 손님들을 맞는 일이 전부였던 적막한 암자. 그래서 풍경소리는 더욱 예사롭지 않던 조그만 암자가 옛 시절 우리네 소풍장소로 단골이 되었던 사연을 그때는 몰랐었다. 길목 좋은 숱한 유명 사찰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임종 가까운 축서사를 찾아내라는 일본 학자의 답답한 속내를 알아채는 데도 역시 많은 날이 흘렀었다.
축서사의 뒷산은 문수산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태백산을 찾아 헤매던 문수보살이 이 산에 화현하였다”라고 할 만큼 문수산은 그 기품이 예사롭질 않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누대에 걸쳐 고관대작과 노승성불이 난다’는 설이 있으며,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형국이라 해서 축서사로 명명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불가의 ‘날카로운 지혜는 독수리의 부리와 같다’는 말과 함께, 최고의 지혜 보살 문수보살의 이름을 딴 문수산은 최고의 지혜를 깨칠 수 있는 명산이라는 뜻이 된다. 또, 예부터 명산에는 명수가 난다 했으니 문수산이 명산이라면 지혜의 샘물이 솟는 것이 당연한데, 산 둘레에 봉화를 대표하는 물야 오전약수, 춘양 두내약수, 봉성 다덕약수의 3대 청정 탄산약수가 그것이다. 그런 지혜의 샘물이 정도전 같은 큰 사상가를 키워내는 젖줄이 되지나 않았을까?
축서사는 부석사와 너무 닮아있다. 의상조사가 ‘부석사’라는 걸작을 빚기 위해 리허설한 절이 축서사라고 할 만큼 축서사는 부석사와 너무 닮은 붕어빵이다. 경사지에 석축을 높이 쌓아 긴장을 주는 모양이 닮아 있고, 산중턱에 날렵하게 절을 걸어 두어 속세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품새가 그러하고, 진입로를 가파르게 마련하여 숨이 턱에 닫는 적당한 고행 뒤 부처님을 배알토록 하는 재치가 그러하고, 광활한 조망의 중심 위치에 주전을 배치한 노력이 그러하고, 동편을 향해 앉아 사바세계를 유심히 주시하는 주불의 자애로운 시선이 또한 그러하다.
국내 제일이라는 부석사 전망이 그러하듯, 축서사의 첫손가락 역시 절에서 내려 보이는 먼 산을 부드러이 조망하는 경관을 꼽는다. 끊어질 듯 파도 넘는 능선의 변화를 거느리고, 구름 속 섬 인양 점점이 떠도는 봉우리를 어우르며, 태백산에서 단숨에 달려 내려온 지맥들의 용트림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모습, 이 모든 기상을 한꺼번에 담아둔 절경이 바로 이 절의 경치라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부석사의 일몰 경관과 가히 견줄 수 있다는 축서사 일몰 조망권은 보광전 앞 석등이 모두 관장하고 있다. 하나 남은 유일한 옛 건물 보광전을 지켜 힘겹게 버티고 선 석등의 옥개에는 축서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얹혀져 있고 그 윗자리를 어줍쟎게 맡아 있는 상륜은 축서사 조망권의 중심을 정확히 가르고 있어 이 절의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축서사의 위치는 사찰 권위의 손상이 없도록 사바세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면서 사찰로서는 더없는 명당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이곳은 열어둔 가파른 진입로를 제외하면 다른 곳으로는 접근이 매우 어려운 천연 요새이다. 그런데도 경내를 들어서면 오히려 평화스런 곳, 이런 곳을 일컬어 천하의 명당이라 했던가. 사방으로 절벽이 두터우면서도 정작 봐야 할 곳은 길게 터놓은 조망, 열심히 감추어 두었다가도 꼭 필요한 때 갑자기 내어놓는 귀여운 충격. 이런 이상적인 장소를 놓치지 않은 의상조사는 틀림없이 문수보살 지혜의 최고 수혜자였을 것이다.
당시 원효대사와 더불어 신라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던 의상조사가 천년의 번화가 서라벌을 포기하고 변방의 양백지간에 스며들어 대가람을 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병화로부터 자신의 걸작을 오래오래 보존하고 싶은 혜안에서 비롯되었다던 어느 학자의 주장이 새롭다. 그의 말대로 부석사는 수많은 전란을 비켜 왔지만, 아쉽게도 축서사는 6.25 등의 전란 속에서 절 모습이 거의 소실되었었다. 그 연유를 나름대로 뜯어본다면, 부석사가 좀 넓게 개방되어 숨어드는 사람이 없었던 데 비해, 축서사는 천연 요새이기에 오히려 군사 훈련장이라든가 투사들의 본거지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면, 그런 점들이 본의 아니게 병화의 표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믿고 싶지 않은 추측을 해본다.
통도사 뒷산에 영축산이 들어와 있다면, 축서사는 안마당이 영축산의 흔적을 길게 받아들이는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영축산 부처님 설법처럼, 부처를 쏙 빼닮은 주지스님이 이곳에다 가람을 중창하고 설법을 시작한지 불과 수개월 만에 모여든 신도가 강당을 넘치고, 그리 어렵다던 설법이 하나같이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니, 석가모니의 설법과 문수보살의 지혜가 한꺼번에 이곳으로 몰려든 희한한 조화는 아닐까?
적막한 산사의 예리한 풍경소리와 혼란을 제도하는 걸직한 목탁소리의 앙상블이 사바세계를 밝히려는 듬직한 석등 앞에서 지혜의 불빛으로 광활한 조망을 타고 끝없이 세상 밖으로 흘러나갈지어다.
밤새 촉수를 적신 가랑비가 말갛게 주위를 쓸어 산사의 신비를 더해가는 싱그러운 아침이다.
 
배용호님의 글

댓글목록

축서사님의 댓글

축서사 작성일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마하심님의 댓글

마하심 작성일

'취서사'라고 읽으셨던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런 분들이 많으신가 봅니다.
이럴 땐 많은 한자를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한 번 보고 지나칠 내용이 아니라, 몇번은 봐야 머릿속에 남을 것 같기도...^^;;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_()_

김석규님의 댓글

김석규 작성일

봉화 중고등학교 동창회 홈페이지에 들렸더니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봉화교육청 학무과장이
좋은 자료를 올려 놓았더군요.
 고향이 봉화군 물야면 오록이라 축서사에 관심
과 애정이 남다른 사람이구나 !
라는 생각이 들어 본인의 동이 없이 올려 보았
습니다.

심자재님의 댓글

심자재 작성일

김 석 규 님..()_
좋은 자료 감사 드리며

이 좋은 자료를
복사해서 불교대학 학생들에게 나눠주려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