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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5대적멸보궁 : 통도사(通度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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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련화 작성일12-07-17 12:57 조회2,06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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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靈鷲山)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연혁] 646년(신라 선덕여왕 15)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산 이름을 영축산,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했다. 원래 영축산은 축서산(鷲棲山)이었는데,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 것이다.

또한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첫째,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 곳의 금강계단(金剛戒檀)에서 득도한다는 뜻이며, 둘째,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고, 셋째 산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이다.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643년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 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당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을 봉안한 매우 중요한 절로서 부각했다. 자장은 계단(戒檀)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 득도시켜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이 되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만큼 대규모로 증축했다. 1235년(고종 22)에는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계단의 석종을 열었다.

이들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 왕이 하사한 신표)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를 표하고자 승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군사를 시켜 돌뚜껑을 들게 했다. 이들은 부처님 사리를 서로 돌려 보며 예경했다. 이와 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 뒤 1379년(우왕 5) 8월 24일에는 주지 월송(月松)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부처님의 사리, 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에 가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나 의논을 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어가자 의승장 사명 유정(四溟 惟政; 松雲도 호)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청허 휴정(淸虛 休靜; 西山도 호)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부(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 안치했다.

그 뒤 누차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과 비로암, 자장암, 백운암, 축서암, 취운암, 수도암, 사명암, 옥련암, 보타암, 백련암, 안양암, 서운암 등이 있다.

[유적.유물] 현존하는 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대웅전, 보광선원(普光禪院), 응진전(應眞殿), 명부전, 삼성각, 산신각, 일로향각(一爐香閣),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세존비각(世尊碑閣), 장경각(藏經閣), 해장보각(海藏寶閣), 황화각(皇華閣), 감로당(甘露堂), 원통방(圓通房), 화엄전, 전향각(篆香閣),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不二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보물 제144호)은 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내부에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지 않고,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이 절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장은 당나라로부터 부처님 사리를 모셔와 황룡사탑, 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 등 세 곳에 나누어 봉안했다. 그러므로 이 절을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과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자장이 가져온 부처님 사리, 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른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했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과 <기신론(起信論)>, <금강경>, <법수(法數)>, <사집(四集)>, <부모은중경> 등 15종이 있다. 현존하는 석조물은 대부분 고려 초기 선종 때(1083-1094)에 조성되었는데,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국장생석표 등이 그것이다. 금강계단은 643년(선덕여왕 12) 축조된 이래 수차의 중수를 거쳤다. 특히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다고 하는 등의 기록이 전해진다.

배례석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의 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1085년(선종 2) 조성되었는데, 길이 175cm, 너비 87cm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은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이와 함께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고려 선종 때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적인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眼象) 등 장식화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통도사에서 약 2km 거리의 양산군 하북면 백록리의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 역시 고려 선종 때의 절 경계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와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장생(木榜長生)과 석비장생(石碑長生), 석적장생(石적長生) 등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종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은입사동제향로(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334호)를 비롯하여 봉발탑(奉鉢塔; 보물 제471호), 전석가여래가사(傳釋迦如來袈娑), 전자장율사가사(傳慈藏律袈娑), 고려감지금니화엄경(高麗紺紙金泥華嚴經), 고려은입사동제향로(高麗銀入絲銅製香爐), 동판천문도(銅板天文圖), 청개와(靑蓋瓦), 감로병, 육환철장(六環鐵杖), 동자상, 동탑(銅塔), 화엄만다라(華嚴曼陀羅), 육각요령(六角搖鈴), 금자법화경, 금자병풍, 구룡병풍(九龍屛風), 삼장서행노정기(三藏西行路程記) 등이 있다.

[설화]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다.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이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 곳에 남겨 절을 수호하게 했다고 한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라는 자그마한 상징적 못을 두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통도사지, 조선금석총람, 한국의 사찰 4 -통도사(한굴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대웅전(大雄殿) - 조선(1644년),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당은 통도사의 중심건물로서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인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행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전면 쪽에는 동향한 3칸 방향 평면의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남향의 3칸, 2칸 정방형 평면의 건물이 전면 쪽 건물에 붙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둥의 배치에서 곧바로 알 수 있으며 지붕모양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형식을 보면 지대석(地代石), 면석(面石), 갑석(甲石) 등을 조립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며 석계(石階)의 배치는 원래부터 현존의 건물과 같은 평면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의 위치를 보아도 평면이 합성(合成)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당은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불당은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당 앞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불당 내부에는 불쪽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건물 구조형식을 보면 공포는 다포식으로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칠포작(七包作)이다. 외부는 모두 쇠서 모양으로 되고 내부는 교두(翹頭)모양으로 되었다. 가구는 일고주(一高柱) 구량가(九樑架) 형식으로 하여 대량, 중종량, 종량이 지붕구조를 받도록 되었다. 천정(天井)은 우물천정인데 층급(層級)을 두어 중심부를 가장 높게 차지하였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 형인데 정면과 양측면에 박공(朴工) 부분이 보이게 하여 특이하며 기와 가운데에는 철제(철제)기와도 올려져 있어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붕 정상에는 청동제(靑銅製) 보주(寶珠)가 있는데 직경 약 70㎝에 달하는 이 보주의 윗부분에는 다시 높이 50㎝ 가량의 길다란 철주(鐵柱)를 설치해 놓았다. 이를 가리켜 통칭 찰간대(刹竿臺)라 하며 이는 대찰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즉 불탑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천(佛天)의 하강(下降)을 나타내는 조형물(造形物)이다. 그리고 지붕의 막새기와 상부에는 도자기 연봉장식이 있어 불사리 계단의 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대웅전 중건 당시의 유물로 짐작된다.

이를 가리켜 통칭 찰간대(刹竿臺)라 하며 이는 대찰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즉 불탐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천(佛天)의 하강(下降)을 나타내는 조형물(造形物)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붕의 막새기와 상부에는 자기(磁器) 연봉장식이 있어 불사리 계단의 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대웅전에는 건물의 4면에 편액을 걸었는데 동쪽이 대웅전(大雄殿), 서쪽이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이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하며, 조선 중기 불당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대웅전의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이룩되었으며 이들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같은 목조조각은 전면 불단의 초자(草子)에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곧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크기는 남북이 15.8m, 동서가 10.1m이며 동쪽 대웅전 현판 아래 두 장의 꽃살문 역시 조각이 우아하다. 연화문, 옥단문, 국화문 등을 새겨 문살을 장식하였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버팀기둥, 즉 우주를 놓아 추녀의 하중을 지탱하도록 하였으며 외양(外樣) 역시 조화를 잘 이룬 뛰어난 목조물이다.
 
 
 
 
 
통도사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동서남북 사면에 모두 편액(扁額)이 걸려있고, 또 각각 주련이 달려있는데, 사천왕문을 통해 들어가면 관음전 쪽에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편액이란 널판지나 종이 또는 비단 등에 글씨나 그림을 그린 것으로 대부분 가로로 길쭉하여 횡액(橫額)이라고 하는데, 보통은 현판(懸板)이라고도 부른다. 편(扁)은 서(署)의 뜻으로 문호 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말이며, 액(額)은 이마 또는 형태를 뜻하는 말로,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때 건물 명칭을 표시한 것을 서서(署書)라고 한 것이 편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건물은 물론 도성과 문루, 궁궐 전각, 지방관아와 향교, 서원 등 일반주택에까지 붙여졌다.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에는 유독 흥선대원군 즉 석파(石坡)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일주문(一柱門)의 편액인‘靈鷲山 通度寺’의 글씨와 원통방 편액과 ‘금강계단’의 글씨 등이 모두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다음으로 주련(柱聯)을 살펴보면, 우선 글씨는 천보구하(天輔九河)스님의 글씨이다. 통도사의 많은 주련들이 구하스님의 선필(禪筆)로 쓰여져 있다.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주련의 문장은 모두 다섯 구절로 이루어졌다. 앞의 네 구절은 칠언절구의 한시(漢詩) 형식으로, 중국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 거사(居士)의 누이 동생인 소소매(蘇小妹)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불교의식문 중의 하나인 관음예문(觀音禮文)에 실려 있다.

관음예문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승되어온 의례문(儀禮文)으로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여러 불보살님에 대한 귀의, 예경, 찬탄, 발원의 글이 한데 어우러진 법문집인데, 이중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을 찬탄하는 문장 중 화신불을 찬탄하는 구절에 나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구절은 앞의 내용과는 별 관계없이 기둥의 수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출처는 금강경오가해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중 종경장(宗鏡章)에 나오는 글이다.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하는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하시는 대목에서 종경스님이 글을 단 것이다.

주련의 내용은 관음예문에 나와 있는 화신불(化身佛)을 찬탄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至心歸命禮 兜率陀天上 象駕日輪 摩竭提國中 龍蟠覺樹 敎談三百餘會 度脫衆生 住世七十九年 利樂郡品 應物隨形化 阿羅縛左那 裟婆一代敎主 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 月磨銀漢轉成圓 素面舒光照大千 連臂山山空捉影 孤輪本不落靑天

중생에게 천백억 화신 나퉈 보이신 석가모니 거룩한 부처님께
목숨바쳐 지심으로 절하옵나니 부처님은 도솔천 하늘 위에서
눈부신 햇빛 속에 코끼리 타고 마야부인 태속에 드시었으며
룸비니 꽃동산에 태어나실 땐 아홉 용이 맑은 물로 목욕시키고
마가다국 보리의 나무 아래서 위없고 바른 깨침 이루시었네

삼백여회 진리를 연설하시사 고통받는 많은 중생 건져 내시고
칠십구년 이 세간에 머무르시사 중생에 이익주고 기쁨 주시니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선 중생의 서로 다른 모습을 따라
그에 맞는 여러 모습 나타내시네

은하수에 달이 갈려 둥글어지니 흰 얼굴 빛을 펴서 온누리 비치네
원숭이들 서로 서로 팔을 이어서 공연히 물 속의 달을 건지려 하지만
홀로 밝은 저 달은 원래로부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아니하였네

댓글목록

영영님의 댓글

영영 작성일

우리 절 방생 법회시에 자주 친견하는 사찰이지요.
그래서 더 친근한 것만 같답니다.^^

반야월님의 댓글

반야월 작성일

통도사의 편액글씨가 흥선대원군이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공부를 하게 돼서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