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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

명태/오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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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하심 작성일08-07-04 08:28 조회2,212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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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마하심님의 댓글

마하심 작성일

굿모닝~^^
오늘 아침도 여느때 처럼 별 생각(기대!)없이 와서
이방 저방 기웃거리다 보니 기분이 무척 좋아집니다.
소중하게 달아주시는 댓글이 잘 안보인다고 댓글이 없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고마운 댓글을 남겨 주신 법융님의 글에서 부터
사진방에만 잠깐(?) 다녀 가시던 법안심님도 오셨고...
암튼 별것(?) 아닌것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입니다.
아마 이런 기분은 글을 올려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소한 것에도 기분이 좋아 많이 지껄이다 갑니다.
님들도 사소한,아주 작은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_()_

들려오는 호탕한 웃음 소리가 제 웃음인양 착각을 하게 만드신 법안심님 감사요~^^

심자재님의 댓글

심자재 작성일

시원~~한 북어국 먹고 갑니다..ㅎㅎ

오늘은 스님들이 뿔이 나셔서 시국선언을 하신다네요..
(엄마가 뿔났다가 아니고...ㅎㅎ)
우리가 모르는 편향이 심하나 봅니다.()_

혜안님의 댓글

혜안 작성일

간만에 컴에 앉았네요.
이리저리 쫌 바빴다고 할까요!!

마보살님 글을 보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구절이 생각 납니다.
성경을 인용해서
이상 하신가요.ㅎㅎ

불교를 신행하는 분들은 그렇게
속좁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좋으면 받아 들이면 된다고....ㅋㅋ

명태라는 음악을 들으니 명태야 말로
보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즉석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사회자가 다음곡은 명태를 들려 드리겟습니다.
하고 멘트를 하니, 웃길려고 그러는지 알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 곡을 불러 주셨던분  참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런 풍류까지 가지고 계셨던 분이시지요.

이제부 어슬렁 어슬렁 홈피를
산책하고 다니면서 흔적을 남기겟습니다.
저 없는 동안 무슨일이 있었나???

전 북어 안주에 소주를 마셔서
좀 취하네요. 그래도 심자재님이 북어국을
끓여주실것 같아서 별로 걱정은 안됩니다만~~~ㅋㅋ

혜안님의 댓글

혜안 작성일

음악 신청 하나 하고 갑니다.
7월 4일이라는 곡인데요,
외국에 유명한 그룹이 연주한 곡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그룹에서도
연주 음반을 냈구요,
아마 찾기는 쉽지 않겟지만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별로 의미가 없는것
같아서....

혜안님의 댓글

혜안 작성일

아!
먼가 미심적어서 다시 확인을 해보니
부활이 리메이크한 (2집 리멤버음반)
2월 7일이라는 곡입니다.

암튼 날짜와 관련된 음악이 있다는걸
여러분도 알게 되었으니 좋지요.??
내친 김에 올려주시면......
머!! 들어는 보지요!!!

사실 좀 머쓱한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ㅋㅋ

마하심님의 댓글

마하심 작성일

2월7일 이라는 곡을 오늘 올리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의미 있는 내년 2월7일에 올리겠습니다.
스님은 선방에서 공부하시다가 안잊어 버리신다면 그 때 한 번 들어 보심이 어떨까요?
아~선방에는 컴이 없겠구나!
그럼 아무때나 올리지요.머!!
하루의 마무리 잘하시고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명태
[양명문 시 / 변훈 곡 / 오현명 노래]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푸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양병문)


(변훈)



吳鉉明씨가 한국 歌曲史 최고의 성악가로 뽑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생애가 80년 한국 가곡사 혹은 民族史(민족사 )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만주땅 에서 출생한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자라다
6세 때 현제명 성악곡집을 듣고 음악적 감화를 받았다.
형의 친구인 작곡가 임원식씨로부터 목소리 좋다는 말을 듣고
中 1때 교회무대에 처음 섰고 「보리밭 」의 작곡가 윤용하가 만든
조선 합창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징병을 당해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거기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고,
만주로 되돌아가던 중 38선이 막혀 서울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극적으로 현제명씨를 만났고 그 밑에서 일하다가
경성음악학교 장학생으로 입학, 평생의 스승 김형로씨를 만났다.
6·25 때는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북되던 중 탈출하여 국군 정훈음악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일생의 레퍼토리가 된 가곡 「명태」를 만났다.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 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 」가 있었지요.
멜로디보다 가사 위주로 가는 생소한 방식, 해학적인 가사가 좋아 발표했다가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어요. 작곡가가 낙담해 進路를 바꾸기까지 했으니까요.
1970년에 다시 불렀다가 유명해져 서 어딜가나
오현명 -명태, 명태 -오현명 으로 불리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