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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는 편지(정호승 시) /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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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상행 작성일11-08-19 20:57 조회3,34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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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는 편지(정호승 시, 백창우 작곡)

 

 김광석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그대 잘 가라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자유당정권시절 교원노조사태로 교단을 떠났던 전직교사 아버지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68년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 살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76년, 경희 중학교에 입학하여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그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79년 대광고등학교 입학 하여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때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기타를 튕기며

이런 저런 노래를 하고 있을 무렵, 한 친구에게서 '젊은 예수' 라는 운동권 가요집을 선물받게 되는데,

그 안에 있던 '못생긴 얼굴'을 부르다가 그만 남자답지 못하게 울어버리기도 한다.

84년, 김민기씨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며 이때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든다.

85년 1월 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 중 사망한 큰 형으로 인해 6개월을 복무하고 그해 7월 제대한다.

군을 마치고 복학하여, 무얼할까 하던 그는 '못생긴 얼굴'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사는것도 괜찮겠다싶어,

노래의 길을 택한다.

87년 10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이처럼 투쟁성을 앞세운 민중 노래 운동에 열심이던그에게 본격적인 대중 가수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찾아왔다.

87년 여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것을, '산울림'의 김창완씨가 듣고

음반을 내자고 하여88년 '동물원 1집'을 내 놓는다.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거다"라며 농담같은

진담을 했었는데 김광석의 말처럼 아무 기대를 않고 세상에 던져진 그의 노래 ‘거리에서'와 ‘

변해가네'가 빅히트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어리둥절했던 그와 동물원 멤버들은 그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거리에서’와 ‘변해 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같은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되었다. 이후 동물원의 일원으로 많은 공연에 참여했다.

그 후, 자신의 음악을 찾고 싶었던 그는 동물원 친구들과 헤어져 89년,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음악 활동을 하던 중에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는 달콤한 가정을 꾸민다.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을 내고,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내며,

이젠 정말 노래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2년엔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프로의 DJ가 되어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때 외설 문제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연세대 마광수교수가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징계를 먹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받았다.

이 사건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93년 7월,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한 달 간의 장기 공연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었다.

또한 나중에 대중 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 다시부르기 1집’이 그 징표다.

94년에 발표된 '서른 즈음에'와 '일어나'가 담긴 4집에서는 좀 더 명확해진 노래의 길을 보여준다.

1994년 9월엔 EBS FM에서 ‘ 음악의 세계’ 진행을 맡았다.

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흐름을

 하나의 앨범으로 계보를 정리한 '다시부르기 2집'을 발표하면서 히트를 터트렸다.

또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의 자리 매김을 있게 해 준 명반이었다.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11월에는 미국 팬실베니아 대학 ,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은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들어 항상 만원을 이뤘던 흥행보증 수표였다.

그로 인해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음반과 공연 수입으로 홍대 앞에 4층 짜리 건물을 소유하는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었다.

96년 1월 6일, ' 가수 김광석, 또 자살 가요계 충격'이란 기사가 눈에 박혔다. 팬들은 경악했다.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부인 서씨는 "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맥주 4병을 나눠 마신 뒤 혼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16계단 중 8번째 계단에서

굵은 전기 줄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팬들의 가슴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심어놓고 그는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캐나다 유학문제 고민, 음악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발생한 조울증,

여자 문제, 심지어는 타살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더욱이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서진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 서태지의 아이들'의 돌연 은퇴 선언 등이

줄을 이어 벌어지자 조직폭력과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이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김광석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이 이루어졌고

경찰 전담반이 긴급 편성이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은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중문화 속에서

연예인의 자기관리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노래패 ' 노래 마을'의 대표 백창우는 조시를 낭송했다.

 벽제에서 화장을 마친 후 팥알 크기의 대형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었던 그의 유골은

서울 서초구 수안사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이었다.

49제 날엔 60명의 가수가 참여해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모콘서트가 열렸고 9월엔 팬클럽

' 둥근 소리'를 중심으로 그의 유작라이브 CD 앨범 ' 인생 이야기'와 ' 노래 이야기' 등

2장이 발매되는 등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살 전날 밤늦게까지 함께 음악을 이야기했던 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 곡

' 부치지 않는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를 했다.

이 음반은 음악적인 지평을 넓히고 싶었던 김광석이 노래마을의 리더 백창우와 시인 정호승등과 함께

시와 노래와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담긴 ' 노래로 만나는 시' 앨범을 위해 녹음한 최후의 음원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때이른 죽음을 예견한 듯 한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 음반은 10만장이 팔려 나가며

각종 방송 차트에 올라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98년 말, 김민기를 회장으로 하여 선후배 50여명이 모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대학로에 추모비 건립과

신인 포크 가요제 개최를 논의했다.

그 결과 99년 3주기 때는 30여 팀이 참가해 ' 김광석 다시 만나기

- 99포크 페스티벌'을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개최했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그의 노래 ' 이등병의 편지'가 삽입되어

다시 한번 그를 추억하게 했다. 이 노래는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공식 주제가가 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는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가족 혹은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파고 들었다.

2000년 12월에 발매된 추모 음반 ' 김광석 앤솔로지1-다시 꽃씨 되어'. 거칠고 지친 듯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희망의 불씨처럼 아련함이 살아 있었다.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와 박학기, 안치환,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강산에, 권진원등 그의 음악 동료와 후배 가수들의 참여로 더빙 제작된

이 음원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요절가수 김광석은 1990년대에 이르러 힘없이 주저 않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 문화에 소생의 기름진 자양분을 공급했던 아티스트였다.

“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던 생전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와 발라드음악에 밀려 고사상태에 빠졌던 모던 포크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음악활동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외롭게 벌였던 그의 음악 독립 전쟁은 요절로 인해 완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는다.

쇠로 만든 ' 도브로'라는 기타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헤어질 때면 누구에게나 '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겨주었던 아름다운 심정만큼이나

그의 노래들은 팬들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그는 죽지 않았다...

 
   마음의 고향 축서사

댓글목록

초윤보살님의 댓글

초윤보살 작성일

이 분의 노래는 팬이 엄청 많다지요.
선전에도 나왔고 대단한 분이셨군요.
노래가 사람을 침착하게 하는듯 해요~
한참 읽었넹~ㅎㅎㅎ

무상행님의 댓글

무상행 댓글의 댓글 작성일

눈이 아프지요..
글씨 를 크게 하려니..
넘 길어 질것 같공..
그래서..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