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 [양명문 시 / 변훈 곡 / 오현명 노래]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푸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양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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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鉉明씨가 한국 歌曲史 최고의 성악가로 뽑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생애가 80년 한국 가곡사 혹은 民族史(민족사 )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만주땅 에서 출생한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자라다 6세 때 현제명 성악곡집을 듣고 음악적 감화를 받았다. 형의 친구인 작곡가 임원식씨로부터 목소리 좋다는
말을 듣고 中 1때 교회무대에 처음 섰고 「보리밭 」의 작곡가 윤용하가 만든 조선 합창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징병을 당해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거기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고, 만주로 되돌아가던 중 38선이 막혀 서울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극적으로 현제명씨를 만났고 그 밑에서 일하다가 경성음악학교 장학생으로 입학, 평생의 스승 김형로씨를 만났다.
6·25 때는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북되던 중 탈출하여 국군 정훈음악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일생의 레퍼토리가 된 가곡
「명태」를 만났다.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 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 」가 있었지요. 멜로디보다 가사 위주로 가는 생소한 방식, 해학적인 가사가 좋아 발표했다가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어요. 작곡가가 낙담해 進路를 바꾸기까지 했으니까요. 1970년에 다시 불렀다가 유명해져 서 어딜가나
오현명 -명태, 명태 -오현명 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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