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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나종림 작성일25-09-30 21:51 조회7회 댓글0건본문
바다이야기 파칭코 ㉪ 백경게임랜드 ㉪↘ 26.rmk359.top ┛리처드 리(Richard Lee)는 미국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이다. 미국 텍사스주의 보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28세 때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그는 만성 신경통증 등을 관리하기 위해 마리화나를 처음 경험한 뒤 30세 무렵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로 이주해 다양한 의료용 마리화나 사업을 벌였고, 그렇게 번 돈으로 세계 최초 마리화나 전문 직업학교를 설립하고 마리화나 관련 법 개정 등 정치운동을 주도했다. 사진은 2010년 만 21세 성인의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한 주민발의 법 개정운동을 이끌던 무렵의 리처드 리. AP 연합뉴스
1970년 ‘금지약물법(CSA)’으로 헤로인 등과 함께 1급 금지약물이 된 미국의 마리화나(대마초)는, 햇살론 생계자금 2021년 조 바이든 정부의 마리화나 비범죄화 원칙 천명과 마약단속국(DEA)의 규제등급 재검토 방침에도 불구하고, 연방법상으론 지금도 불법 마약이다.
하지만 1996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사실상 미국의 모든 주가, 허용 범위는 다양하지만 의료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했고, 2012년 콜로라도주와 워싱턴주를 시작으로 24개 주가 기호용 마 저축은행즉시대출 리화나까지 합법화했다. 2024년 2월 퓨리서치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시민 54%가 기호용 마리화나가 허용된 곳에 거주하며,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2024년 현재 스타벅스 매장(3,100여 곳)보다 많은 3,659곳의 허가받은 마리화나 판매점이 있다.
마리화나에 대한 법과 제도, 인식 변화의 주요 진앙지가 샌프란시스코만 항구 도시 오클랜 남양주별내지구분양 드, 특히 ‘옥스테르담(옥스터담, Oaksterdam)’이란 애칭으로 유명한 다운타운 약 9개 블록이다. 오클랜드의 ‘오크(Oak)'에 유서 깊은 마리화나 친화도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을 합성한 이름.그 블록 한가운데에 2007년 설립된 미국 최초 마리화나 전문 교육기관 ‘옥스테르담 대학(Oaksterdam University)’이 있다. 취업지원대상자 마리화나 관련 정치와 법, 품종별 특성과 재배법, 개량 기술 등의 원예학과 식물학, 판매점 운영과 세법 등 실무 경영을 가르치는 곳. 인가된 정규 학위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사설 직업학교지만, 개교 이래 지금까지 미국 전역을 포함해 세계 116개국 출신 10만여 명이 그 대학을 거쳐갔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그 대학을 거점 삼아 옥스테르담이 형성돼 80년 모두 드리리 대 이후 쇠락했던 도심 상권이 회복됐고, 캘리포니아주의 마리화나 관련 조례와 입법 운동이 전개, 확산돼온 셈이다.
그 대학을 설립해 초대 학장을 지낸 이가 리처드 리(Richard Seib Lee)다. 28세 때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뒤 병원 처방약으로는 통제되지 않던 만성 신경통과 경련 관리를 위해 마리화나를 하기 시작한 그는 법을 우회하기보다 휠체어를 굴려 법-제도-낙인의 굳은 각질에 부딪쳐 부수는 길을 택했다. 그에게 만성 통증과의 싸움은 개인(시민)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싸움이었다. “휠체어를 탄 마리화나의 성자”라 불렸던 그가 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62세.
2009년 캘리포니아주의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 주민발의 법안에 서명한 뒤 앨러미다(Alameda) 카운티 법원 앞에서 캠페인 피켓을 든 리처드 리. 그는 마리화나 사업 수익금 150만 달러를 주민발의 캠페인에 기부하는 등, 자신의 돈과 30대 이후의 삶 전부를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해 썼다. oaksterdam.com
리처드 리는 1962년 10월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세무-회계 유료 도서관을 운영하던 아버지(Robert, 2015년 작고)와 교사 어머니(Ann)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보수 기독교인이자 ‘골드워터 공화당원’이었다. ‘골드워터 공화당이란 1964년 대선 후보였던 공화당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의 지향 즉 당내 온건 노선에 맞서 더 선명한 시장 자유주의와 작은 정부, 강력한 반공주의를 옹호하며, 80년대 레이건-신자유주의 노선의 토대가 된 초강경 보수 분파다.
리처드 리 역시 자칭 보수주의자로서, 대학 시절까지 단 한 번도 마리화나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휴스턴대(커뮤니케이션 전공)를 중퇴한 뒤 대중음악 산업에 투신한 그는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던 1990년 뉴저지주 콘서트장 조명 작업을 거들다 비계에서 추락해 다중척추골절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만성 신경통 등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마리화나를 찾기 시작했고, 조달 어려움 때문에 92년 직접 마리화나를 재배해 미국 최초 마리화나 소매점 중 한 곳인 ‘합법 마리화나- 헴프 스토어(Legal Marijuana- The Hemp Store)'를 설립했다.
산업용 섬유와 오일 등의 원료로 쓰이는 헴프는 2018년 연방 ‘농업법(Farm Bill)’으로 마약류에서 제외(THC 함량 0.3% 이하 기준)되기 전까지 마리화나와 구분 없이 불법이었고, 더욱이 텍사스는 의료용 마리화나조차 2015년에야 극히 제한적인 용도로만 허용했다(Texas Compassionate Use Act). 마리화나를 4온스(약 110g) 이상 소지할 경우 최대 2년 징역형과 1만 달러 벌금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던 당시 주법상 그의 가게는 상호와 달리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는 97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거처를 옮겼다. 캘리포니아주가 96년 11월 주민 투표로 의료용 마리화나를 미국 최초로 합법화(Proposition 215)한 직후였다. 특히 오클랜드는 그가 텍사스에서 마리화나를 납품하던 ‘오클랜드카나비스구매자협동조합(OCBC)’이 있는 곳이었고, 조합의 공동설립자로서 연방 소송 등을 통해 의료용 마리화나 입법 운동을 주도한 제프 존스(Jeff Jones)가 있는 곳이었다.
마리화나의 약성은 오래전부터 꽤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주요 성분인 ‘칸나비노이드(cannaninoids)’의 약용화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다. 칸나비노이드의 주요 화합물인 향정신성 ‘THC(델타-9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는 진통 및 구토 억제에, 향정신성과 무관한 ‘CBD(칸나비디올)’는 항염, 항불안, 항경련 효과로 뇌전증과 만성 통증, 염증성 질환, 일부 암과 다발성 경화증 등 신경질환 치료 및 부작용 완화에 유효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지금은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시판되는 의약품도 다수다. 최근에는 CBD의 항치매 효과와 만성 우울증 및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 가능성 등에 대한 연구가, 부작용 연구와 더불어 이어지고 있다.
리가 이주한 90년대 말 오클랜드는 80년대 이후 항구와 제조업 중심 전통 산업이 쇠퇴하면서 도심이 공동화하고 중심 상권이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낡은 도시기반시설에 대한 재투자는 사실상 중단됐고, 범죄율은 날로 증가했다. 당연히 부동산 임대료도 쌌다. 2,800㎡(약 850평) 면적의 옥스테르담 대학 건물과 캠퍼스 역시 폐교된 차터스쿨(자율형 중등학교)을 활용한 거였다.
그는 합법적으로 재배한 마리화나를 OCBC에 납품하며 마리화나 원예 기술 연구소를 설립했고, 99년엔 커피숍 겸 마리화나 판매점 두 곳(Bulldog coffeeshop, blue sky coffeeshop)과 기념품 가게 등을 잇달아 개업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2003년 ‘오클랜드 시민자유연맹(OCLA)’을 설립해 이듬해 시 조례(Measure Z)로 의료용 마리화나 판매에 세금을 매기는 대신 마리화나 관련 사범에 대한 단속 우선순위를 낮추는 데 앞장섰다. 2005~2007년 주민과 관광객을 위해 발행한 마리화나 관련 소식지 ‘옥스테르담 뉴스’는, 한때 최대 발행부수가 10만 부를 넘기기도 했다. 식당과 카페, 기념품점, 바이크 대여점, 마리화나 흡입 도구용 유리공예점 등이 잇달아 생겨나면서 도심 상권이 활기를 되찾아갔다. 2009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따르면 옥스테르담은 ‘도시형 대마초 유토피아(Urban Pot Utopia)’가 됐다.
리처드 리가 설립한 옥스테르담 대학을 중심으로 오클랜드 다운타운 즉 옥스테르담의 상권과 지역 경제가 되살아났다. 2009년 자신의 마리화나 기념품 가게 앞의 그. Oaksterdam.com
하지만 리는 사업가도, 도시재생 기획가도 아니었다. 그는 사업으로 번 돈 150만 달러를 밑천 삼아 제프 존스 등과 함께 2009년 미국 최초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한 시민 입법(Prop. 19) 캠페인을 전개했다. 엄청난 화제와 함께 미국 및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들은 그해 말 법안 발의 정족수를 채웠다. 이듬해 11월 주민투표에서 비록 부결(46.54%대 53.46%)됐지만, 법안 지지율은 직전 치러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Meg Whitman)가 얻은 득표율(40.88%)보다 높았다. 그 바통을 이어 2012년 11월 콜로라도주와 워싱턴주가 동시에 레저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했고, 캘리포니아주도 2016년 그 대열에 동참했다.그들의 실패는 내분 탓도 컸다. 1990년대 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의 주역 중 일부는 마리화나의 장기적 부작용 등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의료용 마리화나의 대부로 꼽히는 데니스 페론(Dennis Peron)은 주민 투표 직전인 2010년 6월 npr 인터뷰에서 ‘사업가’ 리의 저의를 의심했다. “그가 이 일을 벌이는 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다. 모두 돈과 권력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실용주의자” 리의 반응은 무관심이었다. npr 기자는 “리는 마리화나의 ‘조니 애플시드(Jonny Appleseed)’가 되느라 너무 바빴다”고 썼다. 조니 애플시드는캘리포니아에 사과씨앗을 들여와 보급한 인물로 알려진 18세기 선교사 겸 개척자다.
마리화나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입장은 애매했다. 주법을 존중해 연방 차원의 단속은 자제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연방법을 개정하거나 마약 분류를 변경하지는 않았다.2012년 4월 2일 월요일 새벽, 국세청(IRS)과 마약국(DEA), 주류 담배 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ATF)까지 가세한 연방 요원 수십 명이 현지 경찰과 함께 옥스테르담 대학과 리의 카페와 자택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나섰다. IRA측은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진행 중인 수사의 일환”이라고만 밝혔다. 연방 당국은 졸업생을 포함한 대학의 모든 학생 및 학사 자료와 재무기록 일체를 압수했고, 리의 사업장 자료 역시 모조리 쓸어갔다.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학교 주변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급조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보란 듯이 마리화나를 피웠다. 압수수색 후 연방 당국의 조치는 전무했다. 기소된 이도 없었다. 그해 말 콜로라도와 워싱턴 주의 레저용 마리화나 합법화 주민투표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의도였으리란 분석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압수수색 당일 오전 인근 오클랜드 오이코스대에선 도시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사건으로 7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참변이 빚어졌다. 옥스테르담대 현 학장인 데일 스카이 존스(Dale Sky Jones)는 “진짜 비극이 빚어진 그날 아침, 공권력은 아무도 죽인 적 없는 식물을 찾아 학교를 급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은 무임금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나선 교수진과 직원-학생들의 헌신 덕에 불과 이틀 뒤 수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리는 연방 당국의 타깃이 된 자신과 자기 사업체들이 대학과 법적으로 얽히는 것을 우려, 사실상 모든 사업을 접고 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 간병을 위해 휴스턴으로 귀향했다. 2010년 캘리포니아 주민발의안 캠페인도 거들었던 부모가 아들의 대의를 좇아 ‘마리화나 규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RAMP)’이란 단체를 조직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금지는 보수의 본령이 아니다(Prohibition is not Conservative)”를 기치로 건 RAMP는 마리화나 금지법이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라는 공화당 핵심 가치에 어긋난다며 주 의회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이고 공개 포럼 등을 열어 보수 공화당 지지층을 공략했다. 당연히 리는 그 일을 거들었다.
아들의 뜻을 좇아 남편 로버트와 함께 2012년 텍사스에서 '마리화나 규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RAMP)'이란 단체를 설립해 활동 중인 리의 어머니 앤(Ann, 왼쪽). 오른쪽 사진은 옥스테르담 대학 학장 시절 강의실의 리처드 리와 그의 후임 학장 데일 스카이 존스. rampgop.org, oaksterdam.com
2005년 연방대법원 판결(Gonzales v. Raich)로 연방 정부는 주법이 어떻든 마리화나를 규제-단속할 권한이 있다는 걸 재확인받았다. 2006년 캘리포니아 머데스토(Modesto)에서 의료용 마리화나 매장을 운영하던 두 청년(Luke Scarmazzo와 Ricardo Montes)이 연방 당국에 체포돼 중형을 선고받은 일도 있었다. 리 역시 상시적으로 체포-기소의 두려움을 감당해야 했고,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에게 엄중한 현실을 일깨우곤 했다. 그는 2010년 '뉴요커' 인터뷰에서 “우리는 늘 학생들에게 마리화나에 취해 프리스비나 던지는 전형적인 ‘스토너(stoner, 마리화나 애호가)'의 이미지를 떨쳐내라고 말하곤 한다”고 말했다. 머데스토의 두 청년이 마리화나 판매 수익금으로 제트스키와 고가 벤츠 등을 사들여 호화 생활을 즐기고 연방 요원들을 비하-조롱하는 랩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 표적이 된 탓이 컸지만, 그들이 벌인 일은 리가 한 일과 원칙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리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자신의 성취에 취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을 할 땐 냉철한 공화당원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뉴요커 기자에게 저렇게 말한 뒤, 스토너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떠올린 듯 농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물론 사업가도 가끔은 그냥 느긋해질 필요가 있죠.”
옥스테르담 대학을 나와 코네티컷주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한 제자는 “그가 추구한 자유는 마리화나를 피울 수 있는 자유만이 아니라 재배할 자유, 사업할 자유,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자유였다. 그에게 마리화나는 단순한 식물(plant)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위한 무대(platform)였다”고 기렸다. 오랜 동지인 데일 스카이 존스는 “리의 비전은 낙인과 처벌만 있던 곳에 존엄과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었다. 모든 게 어려워 보일 때, 위험해서 누구도 감히 나서지 않을 때, 그는 싸울 용기를 발휘했고 그의 활약 덕에 우리가 목격해온 전 세계적인 도미노 현상이 시작됐다”고 평했다. 제프 존스는 “그는 옥스테르담을 새로운 차원, 즉 대다수가 상상도 못하던 정치적 경계를 넘어서는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캘리포니아 9개 카운티는 남부 산타크루즈에서 북부 트리니티 카운티까지 마리화나 합법화 장정의 현장과 사연 등을 엮어 농장 투어와 박물관 교육센터 등을 경험할 수 있는 마리화나 역사 관광 코스(Cannabis Trail)를 구축했다. 그 중심에 2020년 오클랜드 시의회가 '문화유적지(Cultural Landmark)'로 지정한 옥스테르담 대학이 있다. 평생 독신이었던 리처드 리에겐 암 투병 중인 RAMP 공동 설립자 겸 사무총장 어머니(Ann Lee)와 형제들이 있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1970년 ‘금지약물법(CSA)’으로 헤로인 등과 함께 1급 금지약물이 된 미국의 마리화나(대마초)는, 햇살론 생계자금 2021년 조 바이든 정부의 마리화나 비범죄화 원칙 천명과 마약단속국(DEA)의 규제등급 재검토 방침에도 불구하고, 연방법상으론 지금도 불법 마약이다.
하지만 1996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사실상 미국의 모든 주가, 허용 범위는 다양하지만 의료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했고, 2012년 콜로라도주와 워싱턴주를 시작으로 24개 주가 기호용 마 저축은행즉시대출 리화나까지 합법화했다. 2024년 2월 퓨리서치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시민 54%가 기호용 마리화나가 허용된 곳에 거주하며,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2024년 현재 스타벅스 매장(3,100여 곳)보다 많은 3,659곳의 허가받은 마리화나 판매점이 있다.
마리화나에 대한 법과 제도, 인식 변화의 주요 진앙지가 샌프란시스코만 항구 도시 오클랜 남양주별내지구분양 드, 특히 ‘옥스테르담(옥스터담, Oaksterdam)’이란 애칭으로 유명한 다운타운 약 9개 블록이다. 오클랜드의 ‘오크(Oak)'에 유서 깊은 마리화나 친화도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을 합성한 이름.그 블록 한가운데에 2007년 설립된 미국 최초 마리화나 전문 교육기관 ‘옥스테르담 대학(Oaksterdam University)’이 있다. 취업지원대상자 마리화나 관련 정치와 법, 품종별 특성과 재배법, 개량 기술 등의 원예학과 식물학, 판매점 운영과 세법 등 실무 경영을 가르치는 곳. 인가된 정규 학위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사설 직업학교지만, 개교 이래 지금까지 미국 전역을 포함해 세계 116개국 출신 10만여 명이 그 대학을 거쳐갔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그 대학을 거점 삼아 옥스테르담이 형성돼 80년 모두 드리리 대 이후 쇠락했던 도심 상권이 회복됐고, 캘리포니아주의 마리화나 관련 조례와 입법 운동이 전개, 확산돼온 셈이다.
그 대학을 설립해 초대 학장을 지낸 이가 리처드 리(Richard Seib Lee)다. 28세 때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뒤 병원 처방약으로는 통제되지 않던 만성 신경통과 경련 관리를 위해 마리화나를 하기 시작한 그는 법을 우회하기보다 휠체어를 굴려 법-제도-낙인의 굳은 각질에 부딪쳐 부수는 길을 택했다. 그에게 만성 통증과의 싸움은 개인(시민)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싸움이었다. “휠체어를 탄 마리화나의 성자”라 불렸던 그가 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62세.
2009년 캘리포니아주의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 주민발의 법안에 서명한 뒤 앨러미다(Alameda) 카운티 법원 앞에서 캠페인 피켓을 든 리처드 리. 그는 마리화나 사업 수익금 150만 달러를 주민발의 캠페인에 기부하는 등, 자신의 돈과 30대 이후의 삶 전부를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해 썼다. oaksterdam.com
리처드 리는 1962년 10월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세무-회계 유료 도서관을 운영하던 아버지(Robert, 2015년 작고)와 교사 어머니(Ann)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보수 기독교인이자 ‘골드워터 공화당원’이었다. ‘골드워터 공화당이란 1964년 대선 후보였던 공화당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의 지향 즉 당내 온건 노선에 맞서 더 선명한 시장 자유주의와 작은 정부, 강력한 반공주의를 옹호하며, 80년대 레이건-신자유주의 노선의 토대가 된 초강경 보수 분파다.
리처드 리 역시 자칭 보수주의자로서, 대학 시절까지 단 한 번도 마리화나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휴스턴대(커뮤니케이션 전공)를 중퇴한 뒤 대중음악 산업에 투신한 그는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던 1990년 뉴저지주 콘서트장 조명 작업을 거들다 비계에서 추락해 다중척추골절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만성 신경통 등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마리화나를 찾기 시작했고, 조달 어려움 때문에 92년 직접 마리화나를 재배해 미국 최초 마리화나 소매점 중 한 곳인 ‘합법 마리화나- 헴프 스토어(Legal Marijuana- The Hemp Store)'를 설립했다.
산업용 섬유와 오일 등의 원료로 쓰이는 헴프는 2018년 연방 ‘농업법(Farm Bill)’으로 마약류에서 제외(THC 함량 0.3% 이하 기준)되기 전까지 마리화나와 구분 없이 불법이었고, 더욱이 텍사스는 의료용 마리화나조차 2015년에야 극히 제한적인 용도로만 허용했다(Texas Compassionate Use Act). 마리화나를 4온스(약 110g) 이상 소지할 경우 최대 2년 징역형과 1만 달러 벌금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던 당시 주법상 그의 가게는 상호와 달리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는 97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거처를 옮겼다. 캘리포니아주가 96년 11월 주민 투표로 의료용 마리화나를 미국 최초로 합법화(Proposition 215)한 직후였다. 특히 오클랜드는 그가 텍사스에서 마리화나를 납품하던 ‘오클랜드카나비스구매자협동조합(OCBC)’이 있는 곳이었고, 조합의 공동설립자로서 연방 소송 등을 통해 의료용 마리화나 입법 운동을 주도한 제프 존스(Jeff Jones)가 있는 곳이었다.
마리화나의 약성은 오래전부터 꽤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주요 성분인 ‘칸나비노이드(cannaninoids)’의 약용화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다. 칸나비노이드의 주요 화합물인 향정신성 ‘THC(델타-9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는 진통 및 구토 억제에, 향정신성과 무관한 ‘CBD(칸나비디올)’는 항염, 항불안, 항경련 효과로 뇌전증과 만성 통증, 염증성 질환, 일부 암과 다발성 경화증 등 신경질환 치료 및 부작용 완화에 유효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지금은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시판되는 의약품도 다수다. 최근에는 CBD의 항치매 효과와 만성 우울증 및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 가능성 등에 대한 연구가, 부작용 연구와 더불어 이어지고 있다.
리가 이주한 90년대 말 오클랜드는 80년대 이후 항구와 제조업 중심 전통 산업이 쇠퇴하면서 도심이 공동화하고 중심 상권이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낡은 도시기반시설에 대한 재투자는 사실상 중단됐고, 범죄율은 날로 증가했다. 당연히 부동산 임대료도 쌌다. 2,800㎡(약 850평) 면적의 옥스테르담 대학 건물과 캠퍼스 역시 폐교된 차터스쿨(자율형 중등학교)을 활용한 거였다.
그는 합법적으로 재배한 마리화나를 OCBC에 납품하며 마리화나 원예 기술 연구소를 설립했고, 99년엔 커피숍 겸 마리화나 판매점 두 곳(Bulldog coffeeshop, blue sky coffeeshop)과 기념품 가게 등을 잇달아 개업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2003년 ‘오클랜드 시민자유연맹(OCLA)’을 설립해 이듬해 시 조례(Measure Z)로 의료용 마리화나 판매에 세금을 매기는 대신 마리화나 관련 사범에 대한 단속 우선순위를 낮추는 데 앞장섰다. 2005~2007년 주민과 관광객을 위해 발행한 마리화나 관련 소식지 ‘옥스테르담 뉴스’는, 한때 최대 발행부수가 10만 부를 넘기기도 했다. 식당과 카페, 기념품점, 바이크 대여점, 마리화나 흡입 도구용 유리공예점 등이 잇달아 생겨나면서 도심 상권이 활기를 되찾아갔다. 2009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따르면 옥스테르담은 ‘도시형 대마초 유토피아(Urban Pot Utopia)’가 됐다.
리처드 리가 설립한 옥스테르담 대학을 중심으로 오클랜드 다운타운 즉 옥스테르담의 상권과 지역 경제가 되살아났다. 2009년 자신의 마리화나 기념품 가게 앞의 그. Oaksterdam.com
하지만 리는 사업가도, 도시재생 기획가도 아니었다. 그는 사업으로 번 돈 150만 달러를 밑천 삼아 제프 존스 등과 함께 2009년 미국 최초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한 시민 입법(Prop. 19) 캠페인을 전개했다. 엄청난 화제와 함께 미국 및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들은 그해 말 법안 발의 정족수를 채웠다. 이듬해 11월 주민투표에서 비록 부결(46.54%대 53.46%)됐지만, 법안 지지율은 직전 치러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Meg Whitman)가 얻은 득표율(40.88%)보다 높았다. 그 바통을 이어 2012년 11월 콜로라도주와 워싱턴주가 동시에 레저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했고, 캘리포니아주도 2016년 그 대열에 동참했다.그들의 실패는 내분 탓도 컸다. 1990년대 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의 주역 중 일부는 마리화나의 장기적 부작용 등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의료용 마리화나의 대부로 꼽히는 데니스 페론(Dennis Peron)은 주민 투표 직전인 2010년 6월 npr 인터뷰에서 ‘사업가’ 리의 저의를 의심했다. “그가 이 일을 벌이는 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다. 모두 돈과 권력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실용주의자” 리의 반응은 무관심이었다. npr 기자는 “리는 마리화나의 ‘조니 애플시드(Jonny Appleseed)’가 되느라 너무 바빴다”고 썼다. 조니 애플시드는캘리포니아에 사과씨앗을 들여와 보급한 인물로 알려진 18세기 선교사 겸 개척자다.
마리화나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입장은 애매했다. 주법을 존중해 연방 차원의 단속은 자제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연방법을 개정하거나 마약 분류를 변경하지는 않았다.2012년 4월 2일 월요일 새벽, 국세청(IRS)과 마약국(DEA), 주류 담배 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ATF)까지 가세한 연방 요원 수십 명이 현지 경찰과 함께 옥스테르담 대학과 리의 카페와 자택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나섰다. IRA측은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진행 중인 수사의 일환”이라고만 밝혔다. 연방 당국은 졸업생을 포함한 대학의 모든 학생 및 학사 자료와 재무기록 일체를 압수했고, 리의 사업장 자료 역시 모조리 쓸어갔다.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학교 주변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급조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보란 듯이 마리화나를 피웠다. 압수수색 후 연방 당국의 조치는 전무했다. 기소된 이도 없었다. 그해 말 콜로라도와 워싱턴 주의 레저용 마리화나 합법화 주민투표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의도였으리란 분석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압수수색 당일 오전 인근 오클랜드 오이코스대에선 도시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사건으로 7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참변이 빚어졌다. 옥스테르담대 현 학장인 데일 스카이 존스(Dale Sky Jones)는 “진짜 비극이 빚어진 그날 아침, 공권력은 아무도 죽인 적 없는 식물을 찾아 학교를 급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은 무임금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나선 교수진과 직원-학생들의 헌신 덕에 불과 이틀 뒤 수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리는 연방 당국의 타깃이 된 자신과 자기 사업체들이 대학과 법적으로 얽히는 것을 우려, 사실상 모든 사업을 접고 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 간병을 위해 휴스턴으로 귀향했다. 2010년 캘리포니아 주민발의안 캠페인도 거들었던 부모가 아들의 대의를 좇아 ‘마리화나 규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RAMP)’이란 단체를 조직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금지는 보수의 본령이 아니다(Prohibition is not Conservative)”를 기치로 건 RAMP는 마리화나 금지법이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라는 공화당 핵심 가치에 어긋난다며 주 의회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이고 공개 포럼 등을 열어 보수 공화당 지지층을 공략했다. 당연히 리는 그 일을 거들었다.
아들의 뜻을 좇아 남편 로버트와 함께 2012년 텍사스에서 '마리화나 규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RAMP)'이란 단체를 설립해 활동 중인 리의 어머니 앤(Ann, 왼쪽). 오른쪽 사진은 옥스테르담 대학 학장 시절 강의실의 리처드 리와 그의 후임 학장 데일 스카이 존스. rampgop.org, oaksterdam.com
2005년 연방대법원 판결(Gonzales v. Raich)로 연방 정부는 주법이 어떻든 마리화나를 규제-단속할 권한이 있다는 걸 재확인받았다. 2006년 캘리포니아 머데스토(Modesto)에서 의료용 마리화나 매장을 운영하던 두 청년(Luke Scarmazzo와 Ricardo Montes)이 연방 당국에 체포돼 중형을 선고받은 일도 있었다. 리 역시 상시적으로 체포-기소의 두려움을 감당해야 했고,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에게 엄중한 현실을 일깨우곤 했다. 그는 2010년 '뉴요커' 인터뷰에서 “우리는 늘 학생들에게 마리화나에 취해 프리스비나 던지는 전형적인 ‘스토너(stoner, 마리화나 애호가)'의 이미지를 떨쳐내라고 말하곤 한다”고 말했다. 머데스토의 두 청년이 마리화나 판매 수익금으로 제트스키와 고가 벤츠 등을 사들여 호화 생활을 즐기고 연방 요원들을 비하-조롱하는 랩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 표적이 된 탓이 컸지만, 그들이 벌인 일은 리가 한 일과 원칙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리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자신의 성취에 취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을 할 땐 냉철한 공화당원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뉴요커 기자에게 저렇게 말한 뒤, 스토너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떠올린 듯 농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물론 사업가도 가끔은 그냥 느긋해질 필요가 있죠.”
옥스테르담 대학을 나와 코네티컷주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한 제자는 “그가 추구한 자유는 마리화나를 피울 수 있는 자유만이 아니라 재배할 자유, 사업할 자유,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자유였다. 그에게 마리화나는 단순한 식물(plant)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위한 무대(platform)였다”고 기렸다. 오랜 동지인 데일 스카이 존스는 “리의 비전은 낙인과 처벌만 있던 곳에 존엄과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었다. 모든 게 어려워 보일 때, 위험해서 누구도 감히 나서지 않을 때, 그는 싸울 용기를 발휘했고 그의 활약 덕에 우리가 목격해온 전 세계적인 도미노 현상이 시작됐다”고 평했다. 제프 존스는 “그는 옥스테르담을 새로운 차원, 즉 대다수가 상상도 못하던 정치적 경계를 넘어서는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캘리포니아 9개 카운티는 남부 산타크루즈에서 북부 트리니티 카운티까지 마리화나 합법화 장정의 현장과 사연 등을 엮어 농장 투어와 박물관 교육센터 등을 경험할 수 있는 마리화나 역사 관광 코스(Cannabis Trail)를 구축했다. 그 중심에 2020년 오클랜드 시의회가 '문화유적지(Cultural Landmark)'로 지정한 옥스테르담 대학이 있다. 평생 독신이었던 리처드 리에겐 암 투병 중인 RAMP 공동 설립자 겸 사무총장 어머니(Ann Lee)와 형제들이 있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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