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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과 죽비

성철스님 小參法門 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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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2-28 09:51 조회2,2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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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심(良心)을 속이지 말라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전에 내가 어디 갔는데, 그곳 조실(祖室)스님이 점잖으신 분이야. 사람으로 치면 말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인데, 그 祖室스님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실지 공부란 것은 動靜에 一如해야 되고 夢中에 一如해야 되고 熟眠에 一如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데, 스님 어떻습니까? 꿈에도 뭐 좀 일여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 아이구 참! 꿈에도 꿈에도 안 된다 하거든? 그런 이 여럿 봤어.


“아니 꿈에도 안 되는 그걸 갖고 祖室이라 하면 어디 되겠나?


“그걸 말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祖室해라구 자꾸 그러는데...


 


그 말도 옳거든. 아무리 안 하려해도 자꾸 와서 조실해라 하니 할 수 없는 게지. 꿈에도 안 되는 그런 사람, 큰스님들 중에도 보면 더러 있거든?


어떤 사람은 또 안 그래.


물어 보면 “그걸 말이라고 해? 난 熟眠일여의 경계는 벌써 지나갔어!


하지만 실지 내용은 안 그렇거든. 내용은 안 그런데 벌써 지나갔다고 한단 말이여. 그러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말도 못해.


하지만 자기 良心은 안 있겠어? 예전 사람들이 다 그렇단 말이 아니라, 예를 들면 그럴 수가 있다 그 말이라. 양심 있는 스님들은 꿈에도 안 된다고 해. 그런 말씀 많이 들었어.


깨친다는 것은 표준이 있는데도, 가다가 무슨 한 생각이 나면 “한 소식 했다” 하고 “그까짓 것 다 알아 버렸다” 하고, 무슨 경계가 나타났다 하면, “부처나 달마보다 내 法이 더 깊다” 그러고, 그런 쓸데없는 망상을 가진단 말이야.


그러면 내 그런 사람들한테 뭘 말하느냐?


“그러면 그 경계가, 그 깨친 것이 동중에도 일여하냐, 몽중에도 일여하냐,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하냐?” 이렇게 물어 보면, 다 그만 무너져 버리거든.


언제 한번은 큰 법당에서 법문을 하고 내려오니까, 왠 수좌(首座 ) 하나가 나를 보고 절을 자꾸 해.


“와? 절을 와 하노?” 이러니깐, “아이구 스님 법문하시는데 그만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 했습니다.


 


“허, 참 반갑네, 이 초단 법칙이로구먼, 그래 一言之下에 뭘 깨쳐길래 깨쳤다 하노?


“온 1700 공안(公案)이 환합니다.


“그래그래 1700公案이 환하고 뭐고 그건 그만두고 지금 니 애기 할 때 지금도 공부가 그대로 되나?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얘기 할 땐 없다고 그래.


 


“허허 이 도둑놈의 자식아, 니 공부 깨치는 게 그런 건 줄 아나? 쌍놈의 새끼 말이여!


그러니까 당장 잘못했다는 거라. 그래서 몽둥이로 탕! ! 때려줬어.


“임마, 그런 게 공부가 아니야, 어떻게 가다 보면 망상(妄想)이 좀 생기고, 어떻게 하다보면 경계가 조금 비친다 해서 그게 깨친 게 아니란 말이여! 動靜一如 해 가지고 몽중일여, 숙면일여 한데서 깨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깨친 게 아니여. 이건 내가 주장하는 법이 아니고 우리 불법(佛法)의 근본(根本)이 거기에 서 있단 말이여.


그리고 나서 공부 열심히 하는 것 봤어.


 


 


5) 선방(禪房) 밥을 먹으려면


 


그래 공부란 것은, 겉으로 공부하는 체 하고, 묵언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고, 뭐를 하고 해도, 속을 보면 動靜一如도 안되거든. 뭘 알았다고 한 사람 더러 봤지만, 夢中에도 되는 사람, 그게 참 힘들단 말이여.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이제 그래도 선방밥을 먹으려면 몽중일여는 되야 선방밥도 먹을 수 있는 것이지. 그러기 전에 뭘 갖고 공부라 할 거고? 아무리 가사를 입고 앉았다 해도 속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면, 首座라 할 수 없거든?


그러니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가 공부의 표준이 돼야 한다 이 말이야.


이게 내 法이 아니고, 우리 불법(佛法), 선가(禪家)의 근본생명(根本生命)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야. 이렇게 된 뒤에야 이제 話頭에 대한 얘기를 해야 돼.


그런데 보면 선방에 나온 지 한 두 철 안 되서 말짱 다 깨치고는, 모두 자기 소견은 하나씩 다 가지고 있어 자기가 뭐 석가 달마 보다 낫다는 그런 생각, 그런 망상가진 사람 쌨거든. 그런 병 가진 사람 쌨다 그 말이여!


여기도 깨친 사람 안 쌨나?


속으로 자기 속 생각으로 깨쳤다 그 말이여. 바로 깨친 게 아니고...


그러니 동정일여한지, 몽중일여한지, 숙면일여한지 그걸 한번 생각해 보란 말이여. 그 세 가지 조건에 안 들었으면, 깨친 게 아니고 병이여! 그러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거거든? 그러니 동정일여 되고, 몽중일여 되고, 숙면일여 되고 하려면, 참 애를 많이 써야 돼.


 


 


6) 올바른 화두참선법(話頭參究法): 항상“어째서?”를 넣어라


 


그리고 화두 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또 안 된단 말이여. 역사적으로 보면 “無” 字를, 그냥 “무()-”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쌨거든.


“불성(佛性)이 있나 없나, -, -, - -” 하면 된다 이거라.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원로스님이, 웬 나이 많은 노인 하나가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데, 이리 꾸뻑 졸면서 “무-” 저리 꾸벅 졸면서 “무-, 자꾸 “무-” 만하면서 이리 꾸뻑 저리 꾸뻑 졸더라면서 흉내를 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선 만년을 해도 안돼!


자꾸 “무, 무” 하면서 꾸뻑꾸뻑 졸기만 하는데 그 病이 제일 큰 병이라. 자고로 “무-” 이렇게 하라는 조사(祖師)스님네가 하나도 없었어.


“무-하면 그만이지 어디 딴 거 뭐 있나” 하는 그런 소리 더러 들었는데, 예전 스님들이 다 말씀하시기를, “조주인기도무(趙州因其道無)?” 조주는 어째서 無라 했나? 조주가 어째서...? 하는 식으로 “어째서” 를 늘 넣으라고 했어.


화두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마삼근(麻三斤)이니, 무슨 무슨 화두, 화두가 안 쌨어?


하지만 어떤 화두를 하든지, 예를 들어 정전백수자(뜰 앞의 측백나무)를 화두로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 이러지 말고, 정전백수자라고 한 이유를 모르니까 의심이 있는데, 그러니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또 마삼근을 하면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無자를 하면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런 식으로 “어째서? 어째서?” 이걸 늘 붙혀야 된단 말이여.


어떤 사람은 “어째서?” 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러지만,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무-” 하거나, 그냥 “정전백수자” 하거나, 그냥 “마삼근” 하면, 그건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라.


그렇게 해서는 깊이 못 들어 가. 절대 깊이 못 들어 가! 그런 사람 더러 있거든.


 


 


7) 잘못된 공부법으로 인한 병()의 사례(事例)


 


그 처사(處士) 나이가 40 넘은 사람인데, 공부하다가 딱 앉아서는 정()에 들어가 버리는 거라. 화두는 “무” 자를 했는데, 공부가 어떠했냐면 처음에 “무-” 하면서 이렇게 떡- 앉아 있으면 모든 생각, 모든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다 떨어져. 그냥 무-하면 그만 定에 들어가 버린단 말이여. 定에, 그리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거야.


“그래, 니 그게 공부가?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 됐어”


처음엔 말을 잘 안 들을려고 해.


그러니깐 그냥 “무-” 하지 말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해야지, 그냥 “무-” 하면 결국 무기(無記)에 빠지고 말아. 그런 일이 많이 있어.


또 어떤 처사는, 20년 전에 금용사 있을 때 찾아왔었는데, 지금 살아 있으면 80이 넘었을 거라. 도리사에 가서 6년을 공부했고 어디 가서 공부를 많이 했어. 나중에 돌아 다녀 보니깐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자기보다 더 크게 깨친 사람도 없어. 그래서 중()도 상대하지 않고 자기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그래 자기 어록(語錄)을 만들어서 이만큼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누구의 말이든 안 들으려 한단 말이야.


그러다가 누가 “그러지 말고 성철스님을 한번 찾아가 보라” 고 그러드래.


 


“그분도 별수 있을까? 하지만 한번 가보지” 그렇게 해서 나를 찾아 왔는데, 만나보니 아만(我慢)이 충천하고...


그 처사가 딱 이렇게 앉았는데, 말하기를 이렇게 앉으면 定에 드는데, 定에 들면 한 일곱 시간 여덟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언제 지나갔는지 몰라.


그런 자기 경계를 가지고 큰스님네들한테 가서 물어봐도 모른다거든? 그럼 자기가 최고(最高)다 이거야. 자기 경계를 모르니까, 그래 가지고 자기가 바로 견성(見性)했고, 신인(神仙)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으며, 대통령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나? 무엇보다 자기가 定에 들었을 때 定에 든 경계 그건 다 할 수도 없고, 또 어디 물어보니 잘 모르고, 이러니까 남들이 자기보다 못하다 이거라.


 


그래 내가 “그 참 공부 많이 했구먼, 그런데 그 경계가 꿈에도 있나, 없나?


가만히 있더니 꿈에는 없다고 그래. 定에 드는 그것 갖고는 꿈에는 공부가 안 되는 거라.


“에이 도둑놈의 자식! 그게 定에 든 病이지, 꿈에도 없는 그게 무슨 공부라고 니가 공부라고 그래? 니 생각해 봐라. 공부라면 動靜에든지, 夢中에든지, 熟眠에 든지, 一如해야지 꿈에도 없는 그것 갖고 그게 공부라고, 天下第一이라 해?


그만 몽둥이로 두둘겨 줬어.


보통들 보면 定에 든다거나, 7-8시간이 눈 깜짝 할 새에 지나가 버리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지. 자기도 그렇게 알고.


하지만 이 처사는 공부를 많이 하고 애쓴 사람이라 머리는 영리해. 그리고 양심이 있으니까, 이해(利害)타산이 없거든? 속인(俗人)이다 보니 어디 가서 조실(祖室) 앉을 그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고, 만일 祖室이나 그런 데 생각이 있었으면 또 “꿈이 뭐꼬, 내가 熟眠一如 되는데!” 하고 꿉뻑 쎄울끼라.


안된다고 하면 祖室 안해야 되니까, 그런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양심적으로 “잘못됐다” 고 그래서 결국 내게 절하고 전에 하던 화두 버리고 화두를 새로 배워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사람도 보니까 잘못된 원인이 화두 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그래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를 붙여서 화두를 하니까 자기가 말한 定이 안 나타난단 말이야. 자꾸 화두만 성성(惺惺)해서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하게 되면 定이 안 나타나거든.


그러니깐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그만 딴 길로 들어가 버린단 말여. 영 잘못 되어버린단 말이여. 그럼 아무리 죽자고 애를 써도 헛일이여. 헛일이기만 하면 괜찮지, 도리어 병만 생기고 만다 그 말이여.


아까 말한 고봉스님도 처음엔 그냥 “무-” 했거든. 그냥 “무--” 이렇게 3년을 해도 아무런 진척도 없고, 공부가 안 된다 말이여. 그래서 자기가 출세(出世)한 뒤에는 도대체 무자(無字)를 못하게 했어.


사람들이 자꾸 “무-, -” 하고 앉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수제자(首弟子)인 중봉국사(中峰國師) 말씀이 無字를 못하게 할 게 아니라 무자를 참구하는 방법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무라 했는가? 라고 고치면 된다.” 이거라.


 


그래 이 “조주인기도무(趙州因其道無)” 하는 것이, 비록 그 전 중봉스님 이전에는 그렇게 했다는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그 전에도 다 그런 식으로 했는데, 거기서 내려온 거라. 내가 특별히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래서 천하선지식(天下禪知識), 조사(祖師)스님들이 공부하셨던 방법이, “정전백수자” “마삼근” 이나 그 밖의 다른 무엇이든 할 것 없이, 언제든지 화두 할 때, “어째서” 가 들어가야지 안 들어가면 공부가 안 된다 이거라. 이게 공부하는 근본 요령이거든.


 


 


8) 참의(參意)와 사구(死句)라는 오해(誤解)


 


또 그냥 흔히 “무-” 라고 하든지, 그냥 “정전백수자” 라고 하든지, 이렇게 하면 참구(參究)가 되고, “어째서” 를 넣으면 참의(參意)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미친 소리구먼.


參意니 參究니 하는 것은 나중에 깨친 사람이 깨친 분상(分上)에서 이런 말 저런 말 한 것이지, 공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못쓴다 이 말이여.


그리구 또 그냥 “무-” 하면 활구(活句)고 “어째서” 하면 사구(死句)라고 하는 소리도 듣는데, 이건 活句고 死句고 참으로 꿈에도 모르는 소리야. 그럼 조주무자(趙州無字) 같은 것은 예전의 여러 큰스님들이 그걸 몰라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했을까?


그럼 대강의 요점은 내 얘기 했으니까, 개별적으로 의심나는 사람 있으면 간단하게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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