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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과 죽비

초심자를 위한 警覺(경각)의 말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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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2-08 10:11 조회1,8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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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進展(진전)이 없어 보여도 공부를 쉬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공부가 향상되지 않는 것을 겁내지 말라. 향상되지 않을 때 향상되기를 구하면, 이것이 공부다.


古德(고덕)이 이르기를, "()없는 것이 解脫(해탈)하는 문이요, 뜻 없는 것이 道人(도인)의 뜻이다." 라고 했으니, 귀중한 것은 전체가 다 들어갈 곳임을 체험하는 일이다. 만약 진전이 없다고 물러나 버리면 설사 百劫千生(백겁천생)을 해본들 어떻게 가까울 수 있으랴!


의정이 일어나서 의심을 놓을래야 놓을 수 없게 되면 이것이 바로 향상하는 길이니, 生死(생사) 이 두 글자를 항상 염두에 두고서 조금도 지체하지 말라. 사나운 호랑이가 쫓아 올 때 곧장 달려서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판인데, 어찌 멈춰 서 있을 수 있겠는가?


 


 


35. 한 公案(공안)만을 (참구)하라


 


공부를 지을 때는, 다만 한 공안에 대해 마음을 써야지, 모든 공안들에 대해 이런저런 아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렇게 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해도 그것은 결국 알음알이로 이해한 것일 뿐, 알음알이가 끊어진 자리에서 廓鐵(확철)히 깨친 것은 아니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이 法()은 思量分別(사량분별)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라고 하시고,


[원각경]에서는, "思惟(사유)하는 마음으로 如來(여래)의 圓覺境界(원각경계)를 헤아리려는 것은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격으로 끝내 될 수 없는 일이다." 라 하시고,


洞山(동산)은 이르기를,


"心意(심의)로써 玄妙(현묘)한 宗旨(종지)를 배우려는 것은, 서쪽으로 가려 하면서 동쪽을 향해 가는 것과 꼭 같다." 라고 하니라.


무릇 공안의 도리를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자는, 살아 있는 자라면 반드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리라.


 


 


36. 經書(경서)를 읽어 알음알이가 움직이게 하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서 의정을 쳐부수지 못했으면 끝내 딴 생각이 없어야지, 결코 경서에 있는 내용을 증거로 이끌어다가 알음알이가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 識情(식정, 알음알이)이 일단 한 번 움직이면 妄念(망념)이 어지러이 치닫게 될 것인데,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지기를 바랄지라도, 어찌 될 것인가?


 


 


37. 끊어지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는 잠시도 여윌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여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 공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잠시도 끊어져서는 안 되니, 끊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공부라 할 수 없다.


眞正(진정)究人(참구인)이라면, 눈썹이나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공부하지 어찌 딴 일을 하기 위해 생각을 움직일 겨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古德(고덕)이 이르기를,


"한 사람이 萬() 명이나 되는 敵()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찌 한 눈 팖을 용납하겠가?" 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공부를 해나가는데 가장 要緊(요긴)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38. 자기 공부에만 힘쓰라


 


공부를 지을 때는, 자기 일을 뚫지 못했으면 다만 자기 일에만 힘써야지 남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서울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남에게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것과 같아서, 남을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도 속이는 짓이다.


 


 


39.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새벽녘이나 저녁에도 감히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慈明大師(자명대사)는 밤중에 잠이 오면 송곳으로 찔렀고, 또 이르시기를, "古人(고인)들은 道()를 위해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거늘, 나는 도대체 뭣 하는 놈인가?" 라고 했다. 고인은 石灰(석회)로 테두리를 그려놓고 도를 깨치지 못했으면 그 안에서 나오지 않기도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방탕하게 굴어 절제할 줄 모르면서도 이를 活潑潑(활발발)하다고 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40. 공부 중에 생기는 경계를 깨친 것이라 잘못 알지 말라


 


공부를 하다가 혹 輕安(경안, 가벼울 경)을 얻거나 혹 알게 되는 것이 있다 해서 이를 깨친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내가 船子(선자)스님의 '蹤迹(종적)이 없어졌다' 는 화두를 들 때였는데, 하루는 [傳燈錄(전등록]을 보다가 趙州(조주)가 어느 스님에게 부탁하기를, '3000() 밖에서 사람을 만나면....' 이라 한 대목을 보고는 놀란 결에 어깨에 맨 布垈(포대)를 잃어버리니, 마치 千斤(천근)이나 되는 짐을 내려놓은 듯 했다. 이로 인해 스스로 大梧(대오)했다고 여겼으나, 뒤에 寶方(보방) 스님을 찾아 뵙고 나의 見處(견처)가 마치 네모난 나무가 둥근 구멍에 머문 격인 줄 알고서, 비로소 부끄러운 줄 알았다. 만약 내가 깨친 뒤에 大善知識(대선지식)을 찾아 뵙지 않았다면 輕安(경안)은 얻었겠지만 결국 일을 마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寶方(보방) 스님은 나를 격려하는 게를 지으셨으니,


 


()이 空을 핍박함이여! 그 功()이 莫大(막대)하고,


()가 有를 쫓아내니 德()은 오히려 微微(미미)하구나.


저 迦葉(가섭)이 살아갈 이치에 안주했다고 誹謗(비방)함은,


便宜(편의, 편할 편/마땅할 의)를 얻는 곳에서 편의를 잃음이로다.


 


이 말씀은 百尺(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말씀이니, 衲僧(납승)들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일찍이 學人(학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보방 스님에게서 '긍정하지 않는다' 는 말을 얻고서야, 受用(수용)이 한량없게 되었다."


 


 


41. 딱딱하게 (참구)해야 疑情(의정)이 생긴다


 


공부를 지을 때는, 道理(도리)를 지어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다만 딱딱하게 (참구)만 해 나가야 비로소 疑情(의정)이 일어난다. 만약 道理(도리)를 지어 이해하면, 다만 겉보기에만 아는 것이요 결코 깊이 들어가지 못하니, 자기 일을 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정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릇 속에 든 것이 어떤 물건이냐?" 고 말하면, 그 안에 든 물건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물건이 아님에도, 질문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을 그것이라 여기게 되면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의심을 일으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 물건을 이 물건으로 여기고 이 물건을 저 물건으로 여긴다. 이처럼 잘못 이해하면, 그 그릇을 열고 친히 물건을 한 번 보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42. 일없이 지내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일삼을 것이 없다' 는 생각을 하지 말고 다만 憤然(분연)히 이 이치를 밝히려고 애써야 한다. 만약 일삼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한 평생 다만 일없는 사람으로 살게 될 뿐, 이 몸에 갖추어진 한 가지 큰 일은 끝내 마치지 못한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경우에, 물건을 찾아야 비로소 그만두지 만약 찾지 못했는데도 일없이 지내면서 찾을 생각마저 없으면, 설사 잃어버린 물건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모르고 지나쳐버리니, 대개 물건을 찾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43. 실다운 경지를 실제로 밟아야 한다


 


공부를 지을 때는, 깨침이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이듯 번쩍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깨침이 빛이 門() 앞에 언뜻 있기도 하고 언뜻 없기도 하는 것과 같다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으랴?


중요한 것은 實地(실지)를 몸소 실제로 밟아서, 몸소 한 번 보아야 옳다는 점이다.


만약 참되고 첨되게 뜻을 이루면, 마치 靑天白日(청천백일)하에서 친부모를 만남과 같아서, 세간의 어떤 즐거운 일도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44. 思惟(사유)로 따지면 공부를 장애한다


 


공부를 지을 때는, 意根(의근)으로써 思惟卜度(사유복탁, 점칠 복/헤아릴 탁)해서는 안 된다. 사유는 공부가 한 덩어리를 이룰 수 없게 하며 의정을 일으킬 수 없게 한다. '思惟卜度(사유복탁)' 이 네 글자는 바른 믿음을 장애하고, 바른 行()을 장애하고, 겸하여 道脈(도맥)을 장애하니, 學人(학인)들은 이를 태어날 때부터의 怨讐(원수)로 여겨야만 한다.


 


 


45. 話頭(화두)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화두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른바 '흐린 눈에 얼굴만 큰 덜 떨어진 놈' 이니, (참구)하는 일과는 상응할 수 없게 된다. 다만 모름지기 疑情(의정)을 일으키되, 철저하게 해서 인정한 곳을 없애버려야 한다. 또한 받아들임이 없으면, 마치 신기루가 七通八達(칠통팔달)한 것과 같다. 그렇지 않으면 盜賊(도적)을 자식으로 誤認(오인)하는 격이요, 하인을 (낭군)으로 잘못 아는 격이다.


古德(고덕)이 이르기를, "당나귀의 안장을 아버지의 아래턱이라 하지 말라." 하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46. 남이 說破(설파, 깨뜨릴 파)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남이 화두의 내용을 밝혀주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만약 내용을 말해준다 해도 그것은 끝끝내 딴 사람의 것이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서울로 가는 길을 물을 때, 다만 길만 가리켜달라고 해야지 서울의 소식까지 물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설사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서울 소식을 낱낱이 설명해 준다 해도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이 본 것이지, 길을 물은 사람이 몸소 본 것이 아닌 것이니, 자기는 힘써 공부하지 않은 채, 남이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이와 같다.


 


 


47. 생각 생각에 疑情(의정)을 일으켜라


 


공부를 지을 때는, 公案(공안)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이 공부와 무슨 상관 있으랴? 그런 식으로 미륵이 下生(하생)할 때까지 생각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엔 어째서 아미타불을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이 더욱 이익이 있다.


단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생각 생각에 話頭(화두)에 疑情(의정)을 일으키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無字(무자)(참구)할 때는 '어째서 無라 했을까?' 하고 의정을 일으키고, 一歸何處(일귀하처)를 할 때는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고 의정을 일으켜라.


참 의정이 일어나면 시방세계 전체가 한 개의 의심 덩어리가 되어, 부모가 낳은 身心(신심)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온 몸이 한 개의 의심 덩어리가 되니, 시방세계가 있는지 알지 못하여,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채, 오직 의정만이 물처럼 끊임없이 세차게 흘러 한 덩어리를 이룬다.


이때는 다만 의심덩어리가, 물건을 담는 통의 테가 저절로 탁 터지듯 터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善知識(선지식)을 만나 보라. 그러면 선지식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큰 일을 마치고는 비로소 손뼉을 치며 웃게 되리라.


그러고 나서 公案(공안)을 생각하는 이들을 돌아보면 마치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과 꼭 같거늘, 이 일과 무슨 관계 있으리오?


 


 


48. 話頭(화두)하는 한 생각을 잃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잠시라도 '바른 생각(정념, 화두일념)'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참구하는 한 생각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잘못된 길로 흘러 들어가서 돌아올 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쑥하게 앉아 다만 청렴하고 淡柏(담백)한 것만을 좋아하여, 純全(순전)히 맑기만 하고 티끌 한 점 없는 것을 佛法(불법) 중의 일이라 여긴다면, 이를 일러 '正念(정념)을 잃고 淡柏(담백)한 경계에 떨어졌다' 고 한다.


혹은 講義(강의, 풀이할 강)에 能()하고 談論(담논)에 능한 것을 인정하여, 능히 움직이고 능히 고요한 것으로 佛法(불법) 중의 일로 여긴다면, 이를 '正念(정념)을 잃고 識神(식신)을 인정한다' 고 한다.


혹은 妄心(망심)으로 妄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리누르는 것을 불법 중의 일이라고 여기는데, 이를 '정념을 잃고 망심으로 망심을 누른다' 고 한다. 이는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는 것과 같고, 파초 껍질을 한 겹 벗겨내면 또 한 겹이 있어 계속해서 벗겨도 끝내 마칠 날이 없는 것과 같다.


혹은 身心(신심)을 허공과 같다고 觀()하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를 담벼락과 같이 하기도 하는데, 이를 '정념을 잃었다' 고 한다.


玄沙(현사) 스님이 이르기를,


"마음을 凝集(응집)하고, 생각을 收斂(수렴, 거둘 수/거둘 렴)하고, 현상을 거두어 들여서, 빈 것으로 돌리면, 이는 空()에 떨어진 外道(외도)이니, ()만 흩어지지 않았다 뿐이지 죽은 사람이다."


이들을 한데 묶어서 말하면, 그 원인이 모두 正念, 곧 話頭하는 한 생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49. 일어난 疑情(의정)은 부숴야 한다


 


공부를 지을 때, 의정이 일어났으면, 다시 의정을 때려부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때려부수지 못했다면 마땅히 正念(정념)을 確固(확고)하고 실답게 해서 大勇猛心(대용맹심)을 일으켜 懇切(간절)에 간절을 더하여야 옳다.


徑山(경산) 스님이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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