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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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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1-30 09:38 조회2,1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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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를 찾아서




깨달음을 위하여




불교의 최고 이상은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물론이고 기도, 염불, 참회 등은 모두 이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깨달음은 분명히 있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거기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지만 그 곳에 이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재가자는 물론이고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출가 집단에서조차 그렇습니다. 타고난 근기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달음은 출가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참된 마음[眞如自性]을 찾는 일입니다. 마음을 찾는 방법으로는 참선(參禪)을 으뜸으로 칩니다.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산허리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벽을 타고 바로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어렵기도 합니다.




참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간화선(看話禪)이 있고 묵조선(默照禪)이 있습니다. 남방불교에서 하는 위빠사나(Vipassana)도 있습니다. 각자의 적성에 따라서 선택할 일이지만 우리는 간화선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간화선이란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수행법인데 화두 중에서도 〈이 뭣고〉를 제일 많이 들고 있습니다. 〈이 뭣고〉라는 말은〈이것이 무엇인고〉를 줄인 말이며 여기서 '이것' 이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참된 마음인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합니다.




참선수행은 정중선(靜中禪)과 동중선(動中禪)이 있습니다. 정중선은 좌선(坐禪)을 말합니다. 동중선은 좌선 이외의 일상생활 중에 참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 24시간은 깨어 있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으로 나눌 수 있지만 우리가 하루라고 할 때는 모두를 합친 시간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동중선은 정중선에 비해 더 어렵습니다. 물론 좌선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좌선 중에는 공부가 그런 대로 되는데 좌복에서 일어나면 다시 번뇌망상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그런 공부는 천년을 한다고 해도 늘 제자리를 겉도는 공부입니다.




재가 생활은 항상 움직이는 생활입니다. 출가자들처럼 하루종일 수행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하루 10시간씩 좌선 정진하는 선객(禪客)들이나 참선하는 것이지 우리같이 일상생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참선을 할 수 있겠나?' 하고 쉽게 포기하고는 기도나 염불에 만족하고 삽니다. 그러나 기도나 염불도 결국 참선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의미가 없습니다. 재가자든 출가자든 먼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신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발심(發心)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상생활에서 참구 할 수 있는 동중선의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런데 좌선이든 동중선이든 참선이란 도저히 어려워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간화선은 이미 1000년 이상 묵은 시대착오적인 수행법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근세의 힌두 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Sri Ramana Maharshi, 1880-1950)도 '자기탐구를 통하여 참 나[眞我]를 찾는 것만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참선이 필요한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선을 하려면 우선 우리들의 존재상황부터 잘 알아야 합니다.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는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화두를 드는 일은 따분하기만 합니다. 학생 때 영어를 잘 모르면 영어시간이 따분해지고 그러다 보니 영어는 어려운 과목이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의 존재상황




참선수행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끊임없이 순환[輪廻]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왜 이런 순환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인간의 8번째 식(識)인 아뢰야식 때문입니다. 아뢰야식은 이숙식(異熟識), 장식(藏識) 또는 종자식(種子識)으로 번역합니다.




우리 인간은 8개의 식(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식-안식(眼識) - 색깔을 봄


제2식-이식(耳識) - 소리를 들음


제3식-비식(鼻識) - 냄새를 맡음


제4식-설식(舌識) - 맛을 봄


제5식-신식(身識/觸識) - 감촉을 느낌


제6식-의식(意識) - 분별식(分別識), 분별을 함


제7식-말나식(末那識) - 사량식(思量識), 잠재의식, 생각하고 판단을 내림


제8식-아뢰야식(阿賴耶識) - 장식(藏識 : 저장되는 식), 종자식(種子識), 무의식




제5식까지는 단순한 감각 기관에 불과합니다.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색깔을 보고 향기를 맡고 맛을 아는 것은 이 5개의 식이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5개의 식을 모두 합쳐 전5식(前五識)이라고 합니다.




제6식인 의식은 전5식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분별합니다. 즉 '색깔이 노랗다', '냄새가 독하다', '맛이 좋다' 등을 분간합니다. 또 제6식은 전5식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상상 등이 그것입니다. 이 6개의 식은 근본이 되는 식이므로 6근(根)이라고도 부릅니다. 또 앞의 전5식과 합쳐 전6식(前六識)이라고도 합니다.




전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즉 가치중립의 상태인 것입니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입니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이리 저리 생각하고 판단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합니다.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 라는 분별을 합니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이것을 헤아려 활동을 합니다. '윽, 누가 나를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까짓 거.'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됩니다. 아니면 '아이고, 무서운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는 36계 줄행랑을 치기도 합니다. 제7식이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하는 경우의 수는 우리의 24시간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7식의 행위는 업(業)이 되어 제8식인 아뢰야식에 고스란히 저장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들의 '운항기록' 이 기억되어 저장됩니다. 그래서 장식(藏識)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우리는 죽게 됩니다. 일단 몸이 소멸하면 몸에 붙어 있던 5개의 감각기관이 사라지고 제6식인 의식도 사라집니다. 전6식이 사라지면 당연히 전6식을 근거로 활동하던 제7식인 말나식도 사라지게 됩니다.




7식까지 사라지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제8식인 아뢰야식이 나타납니다. 아뢰야식은 육신이 소멸되어도 우리가 생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인 업(業)을 씨앗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합니다. 이 8식을 ‘영혼’ 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식은 49일 동안 중음(中陰)을 헤매다가 자신의 업에 따라 다시 새로운 모태(母胎)를 찾아가게 됩니다. 수정란에 아뢰야식(영혼)이 들어가면 태아는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역으로 제7식이 생기고 차츰 몸이 갖추어지면서 나머지 6개의 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아뢰야식은 깊이 숨어버립니다. 이상이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불교 유식론(唯識論)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이 한 생을 끝으로 존재가 영영 소멸되고 마는 일회적인 풀잎의 이슬 같은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중생에게는 누구나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佛性)이 있습니다. 〈마음〉이라고도 하고 〈한 물건〉이라고도 하고 〈참나[眞我]〉라고도 하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임의로 붙인 명칭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중생에 머물러 있으면 결코 볼래야 볼 수 없고 만질래야 만질 수 없고 느낄래야 느낄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온 우주를 감싸고 있으면서 또한 우리들 모두가 지니고 있으며, 청정무구(淸淨無垢)하고 사량분별을 넘어 항상 또렷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 불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업의 결과로 생긴 〈무명(無明)〉때문입니다. 이 무명이 햇빛을 가린 먹구름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있어도 해는 여전히 하늘 높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참나〉는 우리 안에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참선은 바로 이〈참나〉를 찾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 참선은 좌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참선은 인간의 몸으로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람 몸 받기 힘들고 사람 몸을 받았어도 부처님 법 만나기 힘들다[人身難得 佛法難逢]' 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제7 말나식(末那識)




앞에서 우리는 8개의 식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그 중 우리가 제일 관심을 가져야 할 식이 제7식인 말나식(에고ego)입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하여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되어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동중 공부는 바로 이 말나식을 통제하여 참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업에는 선업(善業)과 악업(惡業) 그리고 무기(無記)의 3종류가 있습니다. 선업과 악업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무기는 선도 악도 아닌 업을 말합니다.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또 하늘이 파랗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무기 역시 업이기 때문에 제8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업이나 무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업은 악업입니다. 악업이야말로 무명(無明)의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업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몸으로 짓는 악업[身業], 말로 짓는 악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악업[意業]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3업이라고 합니다. 3업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몸으로 짓는 것(3가지) - 살생, 도둑질, 사음.


말로 짓는 것(4가지) - 거짓말, 사기 치는 말, 이간질 하는 말, 나쁜 말


마음으로 짓는 것(3가지) -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모든 악업을 합하면 10가지가 되므로 10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3업은 악업을 짓는 기관을 분류한 것일 뿐, 근본을 들여다보면 모두 제7 말나식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몸 자체가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고 입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나 입은 제7 말나식의 도구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돌맹이를 던져 유리창이 깨졌을 때, 그 책임은 던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돌맹이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말나식(에고 ego)이 항상 판단을 잘 하여 선업을 짓는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명에 가려진 아뢰야식에 의지해 활동하는 말나식은 우리의 판단을 항상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무명으로 가득 차 있는 아뢰야식에 의지해 판단하는 것이 말나식입니다. 이것은 마치 볼록거울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볼록거울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사물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말나식의 생각을 바로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볼록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원래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이 말나식은 참 나가 아닙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참 나의 탈을 쓴 거짓 나일뿐입니다. 만일 이 말나식이 참 나라면 이 세상에 범죄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참 나는 악업은 물론이고 선업조차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7 말나식은 항상 제8 아뢰야식을 참 나, 즉 나의 본체라고 고집[我執]하고 사량(思量)합니다. 그래서 항상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 인 〈4번뇌〉를 일으킵니다.


 


 1. 아치(我癡) - 나의 참된 실상을 알지 못하는 미혹한 어리석음.


 2. 아견(我見) - 실제로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소견.


 3. 아만(我慢) - 나를 믿는 마음이 너무 높아 거만한 것.


 4. 아애(我愛) - 나라고 애착하는 것. 자애심(自愛心)




또한 5변행(五遍行)이 이 4번뇌와 함께 하는데 오변행이란 온갖 마음의 현상에 반드시 따라 일어나는 5종류의 심리 작용을 말합니다.


 


 1. 촉(觸) - 마음과 대상과의 인식론적인 접촉.


 2. 작의(作意) -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생각.


 3. 사수(捨受) - 그 대상이 자기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것.


 4. 상(想) - 그 대상을 추상화하는 관념적인 생각.


 5. 사(思) - 그 대상을 마음대로 구성하려는 생각.




 말나식을 설명하다 보니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나 4번뇌니 5변행이니 하는 것들은 다 잊어버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단 하나, 제7 말나식이 왜곡된 생각이라는 것만 기억하기 바랍니다.






업력수생(業力受生)




우리는 업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과거 생부터 우리가 지어 온 모든 행위는 업이 되어 그 업력에 따라 태어나는 것입니다. 업은 그 활동에 따라 다음의 3가지로 나타납니다.




성적업(成績業) - 전생에서부터 누적된 갚아야할 업.


발현업(發現業) - 성적업의 일부로서 금생에  받아야 하는 업. 운명에 해당.


증가업(增加業) - 금생에 새로 축적되어 내생으로 넘어가는 업.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업이 금생에 모두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장소, 신체적 조건, 가정환경, 살아가면서 생기는 어려움 등은 발현업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현업만 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선업이다 악업이다 하는 행위 역시 업의 결과로 간주하고 자포자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이 발현업만 믿는 우매한 사람들입니다.




아기가 일단 업의 결과로 태어나면 처음에는 백지처럼 순수한 상태가 되어 선악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제8 아뢰야식은 다음을 기약하고 숨어버립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랍니다.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천진무구한 아이의 성품에 새로운 가치관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들어갑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뢰야식이 서서히 활동을 개시하게 되며 그 결과 아이는 새로운 업을 짓게 됩니다. 이것이 증가업입니다.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은 우리가 과거생으로부터 쌓아 온 근본무명의 성품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진여자성의 청정무구함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소울(Leon J. Saul) 박사의 임상연구에 의하면 개인의 한 평생을 좌우하는 개인의 인격형성은 태어난 직후부터 6년까지의 정신적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태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수태되어 아뢰야식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태교(胎敎)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전생에 지은 업과 금생에 짓는 업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현상계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금생에 지은 업은 그 과보가 바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음 생으로 이월되기도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술을 폭음하는 업을 지은 사람은 다음 생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바로 금생에 간이 나빠져 병에 걸리는 과보를 받습니다. 한편 금생에 선업만 짓고 산 착한 사람이라도 전생의 업이 무거운 까닭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런 사실부터 명확하게 인식해야합니다.






동중(動中)공부의 시작




우리는 매일 쉬지 않고 〈나〉라는 말을 씁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상관하지 마.' 라든지,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너는 모를 거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나〉는 바로 왜곡된 제7식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참 나를 찾는 일은 이 왜곡된 제7식을 바로잡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제7식을 관찰하고 통제해야합니다.




나의 주인은 참 나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거짓 나[제7식]가 주인행세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상태가 우리의 24시간인데, 이 24시간 모두 거짓 나의 판단에 맡겨둔 것입니다. 이 거짓 나는 과거의 나쁜 훈습(薰習)에 의해 늘 악업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 생긴 나쁜 업은 항상 참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누가 나를 비난한다고 합시다. 직접 면전에서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뒷전에서 나를 비난한다는 소문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마음이 불쾌해집니다. 설사 내가 비난받을 짓을 했다고 해도 면전에서 지적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겉으로는 인정하고 시인할지라도 속으로는 즐겁지 않기 마련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7식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생각[我見]' 에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흥, 자기가 뭔데 나를 비난해. 자기는 얼마나 잘나서!' 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공부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제7식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비난을 받았을 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구나. 왜 비난을 하는 거지?' 이렇게 스스로 생각을 해보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 인정을 해야 합니다. 물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화가 날 것입니다. 그 때에도 화가 나는 제7식을 통제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으니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참 나는 화라는 것을 모른다. 지금 거짓 나인 제7식이 나쁜 업의 훈습에 의해 화를 내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 없다. 너는 주인이 아니다. 내가 주인이다. 내 말을 들어야 한다. 화를 내지 마라.”




나라는 것은 4대(地, 水, 火, 風)와 오온(五蘊 : 色, 受, 想, 行, 識)이 인연 따라 임시로 모인 것에 불과합니다.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몸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말 존재인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누가 비난한다고 한들 눈을 부라리고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화를 내어도 좋지만, 이미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성냄은 오히려 10악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업이 되어 이생에서 아니면 다음 생에서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 다음 생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할뿐입니다.




다행인 것은 무명에 가려진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는 제7식에는 참 나를 찾으려는 마음도 함께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먹장구름에 해가 가려 있어도 그믐밤처럼 아주 깜깜해지지는 않습니다. 희미하지만 앞을 분별할 수 있는 빛이 있는 것입니다. 해가 우리의 진여자성이고 먹장구름이 우리의 근본무명이라면 희미한 빛은 참 나를 찾는 마음입니다. 그 빛은 먹장구름의 두께에 따라 밝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제7식은 순발력이 뛰어나서 경계에 부딪치는 즉시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그저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참 나를 찾는 이 마음이 주인입니다. 당당히 주인행세를 해야 합니다.




조그만 가게가 있습니다. 주인과 직원 한 사람이 가게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원이 가게 일을 모두 처리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직원이 하는 모든 결정에 대해 아무 이의 없이 결제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이 직원이 정직하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직원은 옛날부터 주인을 속이는데 이력이 나 있었습니다. 장부를 속여 몰래 돈을 빼돌렸던 것입니다. 장사는 그런 대로 잘 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빚만 늘어갔습니다. 바보 같은 주인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OK 사인만 내주다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는 주인이라면 '아, 이거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저 녀석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젠 내가 직접 챙겨야겠어!' 할 것입니다. 가계에 오는 손님을 일일이 체크하고 직원이 내미는 장부를 무조건 사인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따지고 이상한 곳은 짚고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처음에는 어떻게 할 지 잘 모르지만 차츰 일을 익히니 직원이 속일 수 없게 됩니다. 더 이상 속일 수 없게 된 직원은 더욱 교묘한 방법을 씁니다. 이 때 방심하면 겉으로는 잘 체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망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방심하지 않고 더욱 꼼꼼히 챙겨야 합니다. 결국 직원은 더 이상 속이지 못하고 주인의 말을 잘 따르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이 직원은 가게를 떠나면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중공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참선은 좌선부터




동중선을 익히기 전에 우선 정중선인 좌선을 익혀야합니다. 처음부터 동중선이 잘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좌선을 통하여 어느 정도 정력(定力)을 익히지 않으면 동중선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좌선 역시 그 동안 익혀 온 훈습 때문에 처음부터 쉽지 않습니다. 좌선이 잘 안 되는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참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경우.


이 경우는 대책이 없습니다. 세세생생 윤회의 길을 돌고 돌아 차츰 차츰 매(昧 : 어둡다, 어리석다)해지다가 축생으로 태어나게 되고 축생에서 또 오랜 세월을 헤매다 다시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어쩌다 선업(善業)을 쌓게 되면 다음에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나겠지요. 그러다가 요행히 부처님 법을 만나 환희심으로 다시 본래면목을 참구하게 되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참 나를 찾아야 될 일이라면 금생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둘째, 다리 등 몸이 아파 오래 앉아 있지 못한 경우.


좌선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처음 좌선을 하면 누구든지 다리가 아프고 온 몸이 비틀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통이 제5식에서 감지되면 제6식을 통해 아픔이라는 분별의식이 생깁니다. 그러면 제7식이 고통을 느끼고 '다리가 아프니 다리를 풀어야지.' 하고 헤아린 후 행동에 옮깁니다.




제7식은 제6식의 분별을 근거로 행동하지만 그 행동의 기준은 지금까지 훈습(薰習)된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그 아뢰야식은 무시이래 우리의 무명업식이 저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당연히 잘못된 판단이 나오기 쉽습니다. 참선을 하기 전까지 평소 우리는 잘못 일 수도 있는 제7식의 판단에 맹목적으로 따라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다는 느낌이 있자마자 다리를 풀어버립니다. 즉, 가짜의 자기가 내린 결정이 자신의 진심이라고 속아온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거나 어깨가 저려올 때 급하게 몸을 풀지 말고 차분하게 관(觀)을 해 보십시오. 지금 아프니 다리를 풀라는 제7식의 명령이 정당한가를. 참 나를 찾는 〈마음의 필터〉로 한번 걸러 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아픈가를 찾아보십시오. 최대한으로 참아야 합니다. 눈물이 날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힘이 들것입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면 제어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습니다. 아이는 먹는 것을 좋아해서 24시간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만해져서 어린 나이에 당뇨가 나타나는 등 건강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단호합니다. 식이요법밖에 아이의 병을 고칠 방도가 없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음식을 조절하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대로 먹던 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어머니에게 울며불며 먹을 것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이 때 마음이 약해져 이전처럼 주다가는 아이의 건강이 더 악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애처롭지만 식단에 의한 음식을 일정량만 주고 그 외에는 아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다가 실신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조금 줍니다. 실신하는 것도 문제가 되니까요. 그런 과정이 계속 되면 결국 아이는 달라진 환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달 후면 하루 3끼만 주어도 군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떼를 써도 통하지 않으니 포기하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아이를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의 몸은 바로 비만아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제 멋대로 지냈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뻗었고 등이 가려우면 등을 긁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명(無明)이라는 지방질로 비만이 되었습니다. 비만을 고치기 위해 의사[부처님]는 참선요법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참선을 하려니 우선 좌선이라는 식이요법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하고 싶은 대로 놀던 육신은 놀라 울며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아픔이라는, 또는 가려움이라는 울음을 웁니다. 이 때 요구를 들어준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입니다. 실신 바로 직전에 조금만 요구를 들어주어 길을 들여야 합니다. 이제는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길들여야 합니다. 그것만이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그리고 그 일은 반복된 훈련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눈물이 나올 때까지 제7식을 제어하며 참는 것이 중요합니다.




좌선은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해야 합니다. 허리도 너무 꼿꼿이 세우면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자연스러운 척추 뼈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은 오른 손 위에 왼 손을  포개고 엄지를 둥글게 모아 배꼽 아래 5cm 정도에 있는 단전에 가까이 하고  발목 교차지점 위에 올려놓습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제일입니다. 어떤 이는 주먹 쥔 두 손을 각각 양 무릎 위에 올려놓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몸의 기가 모아지지 않고 흩어져 단전이 허해져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한번 해 보면 금방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혼침(昏沈)과 망상(妄想)만 치성한 경우.


일단 몸을 조복(調伏) 받았으면 화두를 드십시오. 화두는 여러 가지가 많지만〈이 뭣고〉를 권합니다. 이 뭣고는 다름 아닌〈참나〉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에게 존재하고 있다는 참된 나. 제7식의 행위를 주도하는 가짜의 나가 아닌 진짜의 나는 과연 무엇인고... 제불보살과 역대 조사(祖師)와 천하 선지식(善知識)들이 한결같이 〈각자 가지고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한 나의 참 모습. 이것이 과연 무엇인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알 수 없는 참 나를 깊이 궁구(窮究)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알 수 없으니 자연히 의문[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만일 참 나를 알았다면 깨쳤다는 말인데 지금 나는 깨치지 않았으니 참 나를 모른다는 말이고, 모르니 알고 싶어 의심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화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합니다. 사량분별은 제7식의 전매특허이니까요. 사량분별로 화두를 드는 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입니다. 고양이는 맡긴 생선을 날름 먹고 말듯이 사량분별은 화두를 망상으로 바꾸어 가지고 놀 것입니다.




사량을 하지 않으니 화두를 들면 그저 막막합니다. 이 모습을 조사스님들은 은산철벽(銀山鐵壁)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막하여 답답한 상태를 느끼면 오히려 그것은 화두가 잘 들리고 있는 증거니 더욱 분발할 일입니다. 그런데 몸이 편안하면 망상이 밀려옵니다. 망상은 전5식을 통한 제6식에서 일어나는 것과 제6식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최종적인 활동은 제7식이 하는 것이지요.




늦은 가을,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 전면이 통유리로 된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을 합니다. 눈으로는 창 밖에서 내리는 빗물을 보고, 코로는 커피 향을 맡고, 입으로는 커피 맛을 음미하고, 몸으로는 따듯한 실내 온도를 느끼며, 귀로는 옆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옛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장래 일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낭만적인 풍경 같지만 공부하는 분상(分上)에서 보면 이 사람은 현재 망상에 푹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좌선을 하는 이유는 바깥경계로부터 들어오는 이런 전5식을 통한 망상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상시 우리는 잠잘 경우를 제외하고는 5감(感)을 통한 정보를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이 정보는 모두 번뇌망상의 근원입니다. 제한된 공간에 우리 몸을 고정시켜 두는 좌선은 현재의 5감을 차단하여 망상이 일어나는 근원을 막아줍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쉬어집니다.




그래도 일어나는 망상은 제6식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6식에는 전5식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제6식은 단편적인 상(相)만 떠올릴 뿐이고 그 상을 연결하여 소설을 쓰고 각색을 하여 영화로 만드는 '위대한 감독' 은 언제나 제7식입니다. 그래서 앉아있으면서 우리는 미국과 일본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과거와 미래도 자유자재로 왕래합니다. 5감이 멈추니 오히려 더 치성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한시도 망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좌선을 하지 않는 평상시에는 감각적인 전5식에 치중하기 때문에 망상은 잠깐 숨어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에 마음이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틈만 나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커피 마시는 사람의 경우처럼 '동시상영'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망상이 일어나는 이유도 몸이라는 비만아의 경우처럼 그 동안〈마음〉이라는 비만아를 자유방임주의로 키웠기 때문입니다.




좌선은 모든 공부의 기초이기 때문에 좌선을 빼놓고 공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초공사가 부실한 상태에서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기초가 잘 되어 있어야만 건물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을 올리지 않으면 잘 다진 기초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정중공부인 좌선이 기초공사라면 동중공부는 건물과 같습니다.






역류(逆流)공부




우리는 좌선할 때 망상을 제어하고 참 마음을 찾습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이 망상인 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망상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다면 바로 다시 '이 뭣고' 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좌선시간은 망상과 화두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으로 한 시간을 다 보내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화두를 계속 들면 망상이라는 '비만아' 도 차츰 고분고분해질 것입니다.




좌복에 앉아 있을 때는 특별히 새로 업을 지을 일이 없습니다. 망상은 업의 나툼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왜곡된 제7식의 명령으로 업을 짓게 됩니다. 모든 행위는 무의식중에 제7식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남이 나를 칭찬하면 좋아하고 비난하면 미워합니다.




내 자식, 내 남편, 우리 와이프, 우리 식구, 우리 민족이라는 한계를 지어 남에게는 배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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