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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祖師禪)의 종지(宗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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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1-16 10:12 조회1,9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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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祖師禪)의 종지(宗旨)


 


 


이하는 수행자들의 주요쟁점에 대하여 육조단경과 몽산법어집의 논지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1, ()에 대하여


만약 자기를 분명히 알지 못했거든 선지식을 참문하여 생사의 근본을 요달할 것이니 서둘러 스승을 찾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되리라.


 


만일 견성을 못하고서 인과(因果) 등을 말한다면 이는 외도법(外道法)이며 천경만론을 설하더라도 불법이 아니니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았더라도 역시 외도이니라.


 


생각 없음을 종()으로 삼고 모양 없음을 체()로 삼고 머무름 없음을 근본으로 삼나니 상( : 모양)에서 상을 떠나고 생각에서 생각을 여의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음이니라.


 


자성을 깨닫고서 생각을 일으키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때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나니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는 근원에서 움직이지 않음이니라.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 한다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자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나니 밖으로 미혹하면 상()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하느니라.


 


망념을 제거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하나 만약 이러하다면 무정(無情)과 같아서 도리어 도를 장애하나니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느니라. ()과 혜()는 일체요. 등과 불의 관계와 같으니 단지 곧은 마음을 행하되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행삼매라 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하네. 보시공양(布施供養)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三業)은 그대로 있네.


 


 


2, ()에 대하여


 


스스로 깨달아 수행함은 말로 다투는데 있지 않다.


 


밖으로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면 자성(自性)을 끝내 깨닫지 못하리라.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달으면 단번에 닦음이며 미혹한 이는 입으로 떠들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만약 계행이 없으면 공중 누각을 지음과 같음이요. 인과를 무시한다면 극히 손해가 크니라.


 


그대의 계정혜(戒定慧)는 작은 근기(根氣)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대근인(大根人)에게 권하는 것이니 성품을 깨달으면 계정혜 또한 세우지 않느니라.


 


성품을 보기만 하면 음욕이 본래 공적(空寂)해서 끊어 제거할 필요가 없으며 또 집착하지도 않으리니 설사 남은 습기(習氣)가 있더라도 해치지 못하리라.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성()을 없애고는 청정신(淸淨身)도 없느니라.


 


법은 원래 세간에 있으니 세간사(世間事)를 떠나지 말라. 삿됨도 바름도 모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라.


 


 


3, 참선(參禪)에 대하여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며 묘한 깨침은 마음의 길이 극에 다다라서 끊어져야 하느니라.


 


좌중(座中)에 힘 얻기가 가장 쉬우니 단정히 정좌하여 평상으로 눈을 떠라. 눈이 안정되면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면 몸도 안정되나니라. 만약 정()을 얻었을지라도 이것을 능사로 삼지 말고 선정(禪定)신통(神通)도 논하지 말지니 정중(定中)에서도 화두가 현전하여 성성(惺惺)해야 하느니라.


 


대중 가운데서 공부하되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장님이나 귀머거리처럼 하되 경이나 어록을 보지 말며 일구(一句) 화두를 몰록 들어 눈썹 위에 두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정진하되 억지로 용을 써서 화두를 들면 공부가 힘을 얻지 못하리라.


 


온갖 공안을 풀어 알려고 하지 말지니 설사 알았다 해도 끝내 아는 것이지 깨달음은 아니니라.


 


본참(本參) 공안이 끊어짐이 없어야 참의심이라 할 수 있나니 동정(動靜)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다가 차츰 꿈 속에서도 화두가 들려 활발발(活潑潑)하여 움직여도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병아리가 알에서 껍데기를 쪼고 나올 때처럼 의심덩이가 깨지고 정안(正眼)이 열려 통연히 자기를 밝히게 되리라.


 


깨달은 후 고현(高玄)을 속히 찾아가 단련하여 법기(法器)를 이루되 조사 공안을 한 꼬챙이에 꿰면 제불(諸佛)묘리(妙理)에 두루 원만하리라. 스승이 허락하면 다시 숲 속에 들어가 띠집 토굴에서 인연 따라 고락을 나누되 무위탕탕(無爲蕩蕩)하여 성품이 백련 같을 때 시절이 되면 산에서 나와 밑 없는 배를 타고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할지어다.


 



 


 


 


 


공부인의 생명은 정진(精進)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사유의 세계 저 건너입니다. 그러므로 로켓이 대기권을 박차고 나갈 때와 같은 정진력(精進力)이 아니고는 고향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공부는 대중 속에서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일반 공부와는 반대로 자기가 쥐고 있는 일체의 식견을 몽땅 내려놓고 화두를 들되 한 시간을 앉더라도 칼을 뽑아 든 장수처럼 정진해야 졸음과 망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냇물이 맑고 잠잠하면 바닥이 저절로 드러나듯이 정진력이 쌓이면 의식과 호흡이 자연히 가라앉아 화두가 안착되고 건강도 따라서 좋아 집니다. 그러나 이때쯤 갖가지 능력이나 지견이 열리기도 하는데 여기서 깨달았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좌선 시에는 바로 앉되 어깨에 힘을 빼고 눈을 떠야 합니다.


 


신심이 하늘을 찔러 처절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몸은 어느새 조복 받고 나아가 사회생활 속에서도 잡념이 주인행세를 못하다가 꿈마저 사라지는데 좌선이 꿀맛 같은 시절을 거치면 어느 날 문득 망상이 뚝 끊어집니다.


 


여기서도 화두가 간절하여 목숨을 다하는 곳까지 이르면 바야흐로 화두는 한 점 티없이 하루 종일 맑고 맑아서 의심덩이가 우주에 꽉 차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밥도, 잠도 잊은 채 며칠을 화두 일념의 세계에 푹 빠지다가 무엇을 보거나 듣는 순간 천년 물독이 펑 깨지면서 홀연히 참 자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뜨거운 눈물이 바다를 이루는 동시에 ()’, ‘뜰 앞의 잣나무’, ‘판치생모’, ‘만법귀일’…… 등등 깜깜했던 소식들이 주루룩 돌아가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이 세계, 이 맛을 함께 즐길 벗이 없으니 고향의 노래(게송)만 수시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가 공부의 시작이요 위기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참 수행자라면 당당하게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여 진위를 확인 받고 살림을 서로 거량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눈 밝은 본분종사 밑에서 중중의 향상일로 관문을 두루 투과해서 법을 쓸 줄 알 때 비로소 인증을 받아 대장부의 활개를 치는 것이 선문의 전통입니다.


 


먼저 물을 마셔본 후 물을 이용해서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듯이 를 찾아서 그릇 따라 당당히 굴리고 사는 것이 불법이요 대자유인이지 위풍이나 고고한 인품 또한 도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선법은 선오후수(先悟後修)요 돈법(頓法)이라 오랜 수행 끝에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물맛도 못 본채 물 연구만 하고 있거나 선문답에 급급한 사람은 도반이 될 수 없으며 끝내 책과 입을 닫지 못하는 사람은 구도자가 아닙니다.


 


참선은 신통, (), (), 단전, 명상, 위빠사나 등과도 거리가 먼 수행법입니다. 알고 보면 이 공부는 할 것도, 한 것도 없는 공부라서 일상 그대로가 법이요 번뇌가 즉 보리인 까닭에 도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조사선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이 법은 종교 이전의 세계이지만 스승 없이는 할 수 없는 공부입니다. 나와 우주의 근원을 밝히는 큰 공부이지만 자칫하면 일생을 그르치게 됩니다.


 


요즈음 서양에서도 물리적 가치관을 반추하며 영원한 행복을 위해 수행에 관심을 갖는 모습은 인류의 한 가닥 희망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인연이 다하면 그토록 아끼던 이 몸마저 보내줘야 할 터인데 여러 스승과 도반의 은혜는 어찌 다 갚고 두 다리는 언제쯤 쭉 펼 수 있을는지……


 


 


2007년 甲年을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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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됨을 애써 구하지 말고 모름지기 견해를 쉬되 마른 나무처럼 고요함에 빠지면 결코 깨닫지 못하리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데 도달하면 나무통 밑바닥이 툭 꺼져서 환희처를 얻게 되나니 극히 오묘하고 깊은 근본 당처를 몸소 밟아 들어가야 본래 면목을 확연히 볼 수 있느니라.


 


아난이 견성하고도 증입하지 못함은 마치 호화 주택을 만나고도 그 문에 들어가지 못함과 같으니라.


 


정진력이 없으면 죽음의 문턱에서 복종 당하고 앞이 캄캄하여 갈팡질팡 할 것이다.


 


정진(精進)이 건성이면 공부는 말 뿐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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