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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의 요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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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0-27 05:20 조회1,9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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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話頭禪)의 요체1


 


성엄 선사


 


 


화두를 발견하기


()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해탈입니다. 하지만 역대 선사들의 가풍에 따라 선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든 선사들 중에서도 6조 혜능(慧能638~713)의 가르침이 선 전통의 토대를 확립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은 인도 승려였던 보리달마(菩提達磨?~536?)를 통해 인도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습니다. 보리달마는 훗날 선종의 초조(初祖)로 불리게 됩니다. 혜능 이후 선종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섯 종파가 생겨났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은 조동(曹洞)과 임제(臨濟) 두 종파만 살아남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선()이 젠(Zen)으로 되고, 조동은 소토(Soto), 임제는 린자이(Rinzai)가 되었습니다. 화두법(話頭法)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그것이 임제종 계열의 독특한 면모이고 다른 선의 종파는 이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중국에서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모든 종파가 이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의 전통에서 이 방법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분은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 선사라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조동종의 굉지정각(宏智正覺1091~1157) 선사는 묵조선(默照禪)을 제창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어록에서는 그 자신도 화두법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이 두 방법 모두 각 종파 선사들의 전법(傳法)을 통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습니다.


 


화두법은 공안(公案)’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일본에서는 이 용어를 코안(koan)’이라고 발음합니다. 이것은 근대 이전 중국의 사법제도에서 볼 수 있던 소송 사건 등의 공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선에서 말하는 공안은 어느 선사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어떤 일화나 사건인데, 그 선사의 깨달음과 직접 관련되는 일화인 경우가 많습니다. 훗날 선 수행자들은 많은 공안을 수행의 주제, 곧 참구(參究investigation)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공안 전체가 늘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안이 복잡하고 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선사들은 어떤 공안의 핵심 요점, 혹은 결정적인 문구나 낱말을 뽑아서 그것을 수행의 도구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화두란 것은 어떤 공안에서 나온 하나의 조각-하나의 물음 혹은 낱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화두가 반드시 공안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가 하면, 어떤 것들은 스승이 제자에게 그냥 하나의 수행방법으로서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자상으로 화두(話頭)’말의 머리 혹은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근대 중국의 대선사인 허운(虛雲1840~1959) 선사는 화두를, 우리의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기 직전의 자리라고 설명합니다. 화두를 수행할 때 수행자는 질문하듯이 그 문장이나 어구를 염하지만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해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화두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추론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그 생각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를 보는 것이 됩니다. 이론상,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자리를 탐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자리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두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래적인 해탈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부처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우리의 번뇌나 생활상의 문제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개념, 지식 그리고 이전의 체험을 내버려야만 화두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롯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화두 자체를 결국 타파해야 합니다.


 


 


호흡을 관하기


처음 좌선을 하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망념(妄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화두를 들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호흡 관법을 닦아도 됩니다. 그것은 호흡을 세거나(數息) 호흡을 따르는 것입니다. 호흡을 세는 것은 몸을 이완하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숨을 한 번씩 내쉴 때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속으로 세고 나서, 다시 하나부터 시작합니다. 숨이 코를 들고나는 것을 느끼면서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합니다. 세다가 잊어버리면 하나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합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호흡에 숫자를 붙이지 않아도 숨이 드나드는 것을 명료히 자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있으면 자각을 코끝에 두고, 숨이 들고나는 것을 아주 또렷하게 경험하십시오. 아니면, 호흡과 함께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데 주의를 집중해도 됩니다.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호흡 따르기(주시하기)를 수행하게 됩니다. 물론 원한다면 먼저 호흡 세기를 하지 않고 바로 호흡 따르기를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호흡 세기를 시작하는 편이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더 쉽습니다.


 


호흡 관법을 할 때도 계속 망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그냥 그 망념을 놓아 버리고 호흡법으로 돌아가십시오. 호흡을 세는 도중이었다면 다시 하나부터 세기 시작하십시오. 결국 망념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마음이 한결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면 화두 수행을 시작해도 됩니다.


 


 


염불


마음을 가라앉히는 또 하나 간단한 방법은, 서방정토의 부처님인 아미타불과 같은 어떤 부처님의 명호를 마음 속으로 염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염할 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속도로 염하십시오.  너무 빨리 하면 신경이 예민해질 수 있고, 너무 느리게 하면 망념이 많아지거나 졸음이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염불을 한 번 하고 나서 숫자를 붙일 수도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나. 나무아미타불, .” 이런 식으로 열까지 붙이고 나서 다시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호흡이 아니라 그 염불 어구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흡을 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염불을 하는 목적은 망념을 줄이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선 수행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함이며, 자기 자신을 알면 궁극적으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알기 어렵고, 자아를 제어하기는 더 어려우며, 자아를 해탈시키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무지와 번뇌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제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번뇌가 있고, 자아집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수행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이 속박에서 해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안내자로서 개념들이 필요하고, 어떤 수행방법이 필요합니다.


 


선이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자아감(sence of self)이 몸, 마음 및 외부환경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방법의 면에서 첫째 원리는, 외부환경에서 일어나는 자아감에서 초연해지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아감에서 초연해지며, 마지막으로 우리 마음의 활동에서 일어나는 자아감에서 초연해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자아감에는 감각, 느낌, 관념, 사고들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집착입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자아감을 분리하고, 고립시키고 좁혀 나갑니다. 이렇게 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이 참으로 화두를 이용하여 자아감을 타파하고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초심자들은 우리의 신체적 감각에서 일어나는 자아감을 포착하면 화두법에 들어가기 쉽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좌선하며 앉아 있는 여러분의 체중을 자각하거나, 콧구멍을 통해 드나드는 숨을 자각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감각들은 모두 여러분이 인식할 수 있는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런 것들을 누가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제가 자아감이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 자각하는 그 누구’, 경험하고 있는 그 누구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아감을 포착하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십시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다른 데로 떠내려가지 못하게 묶어두는 닻으로 삼으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자아를 분명히 자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이미 집중되어 있고 차분하며 강한 자아감이 없다면, 바로 화두를 시작해도 됩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몸이 아직도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오늘 하루 동안은 자신의 감각들을 지켜보는 수행을 하십시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을 곧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냥 앉아 있기 편안한 자세를 취하십시오. 몸을 이완하고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자각하십시오. 호흡에 대한 자각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알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호흡 때문에 존재하고 있고, 살아 있는 한은 호흡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호흡에 대한 자각을 유지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느낌을 얻습니다. 계속해 나가면 호흡이 느려질 것이고, 더 깊어지고 더 낮게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럴 때 배가 올라왔다 꺼졌다 하는 것을 자각해도 됩니다.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것을 자각하되 그에 대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이와 같이 수행하면 집중력과 꾸준함이 늘 것이고, 편안한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자아감에 대한 자각 가까이에 머무르십시오. 그렇게 하면 얼마 후 화두법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몸을 이완하려면 먼저 눈을 이완하고, 얼굴 근육을 이완하고, 머리를 이완하십시오. 곧은 자세를 유지하되 아랫배도 반드시 이완하십시오. 몸을 이완하는 이 기본 사항들을 유지할 수 있으면 호흡이 부드럽고 원활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어느 부위가 긴장되어 있으면 숨이 가쁘고 답답할 것입니다. 제가 방금 말한 방식대로 몸을 이완하면 호흡이 자연히 부드럽고 원활해지게 될 것입니다. 배가 올라왔다가 꺼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고, 호흡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이완하고 순간순간 여러분의 자아감을 자각하십시오.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렇게 하십시오. 만일 마음이 딴 데로 흐르는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호흡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환경에서 초연해지십시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만일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마음을 쓰면 망념들에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그저 바로 이 순간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을 시시각각, 순간순간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이 현재의 경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이나 마음에 대한 자각에 기초하고 있는 여러분의 자아감입니다.


 


 


새의 두 날개와 같이


모든 좌선 수행은 우선 마음을 안정시키고 조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좌선을 할 때 겉보기에는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상당히 바쁠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고요한 겉모습이 산란한 마음을 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선 수행은 새의 두 날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날개는 수행을 이끄는 개념, 또 한 날개는 수행방법입니다. 새가 날려면 두 날개가 있어야 하듯이, 올바른 개념과 적합한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가 참으로 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선의 개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얻는 한편 화두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극히 고요하고 아무 번뇌가 없을 때는 그 마음이 열려서 광대해집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본래 상태를 드러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지혜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지혜로 충만해 있을 때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화두를 참구하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단 하나의 물음에 대해 그 해답을 얻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거듭 묻되,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물어야 합니다. 어떤 물음입니까? “무엇이 무()인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 “태어나기 전의 내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단 한 마디로 된 화두, 예컨대 ()?”를 참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음이 해소될 때까지 다른 모든 생각을 물리치고 화두를 물으십시오. 여기서 핵심은 그 물음이 논리적 사고나 개념적 사고로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화두를 선택했거나 화두를 받고 나면, 오로지 그것만 견지해야 합니다. 화두를 계속 바꾸게 되면 일관된 힘을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사실 초견성(初見性)을 한 뒤에도 같은 화두를 가지고 평생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 화두를 가지고 깨달음을 거듭 체험하다 보면 마침내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무()인가?” 화두를 사용할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수행법의 초기부터 사용되어 온 아주 강력한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좌선을 시작하면 이 수행에 바로 들어가서 여러분의 물음을 거듭거듭 힘있게 던지십시오. 예를 들어 마음속으로 무엇이 무인가? 무엇이 무인가? 무엇이 무인가?” 하고 묻게 됩니다. 이때 그 물음은 그 화두를 향해야지 자기자신을 향하면 안됩니다. 적당한 간격으로 계속 묻되 늘 어떤 의문의 마음으로 물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그 방법 속에 자리 잡게 하고, 그것과 친구가 되십시오. 마음 속에 그 해답을 찾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을 때, 그것을 일러 화두 참구라고 합니다. 화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 때는 그것을 분석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 물음을 물어 들어가 화두가 스스로 답을 내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이런 자세로 그저 계속 화두를 물어 가십시오. 물음의 방향을 돌려-해답이 자신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하면서-여러분 자신에게 묻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생각을 하게 되고, 머리가 답답해질 것입니다.  만약 그 물음을 여러분 자신에게 돌리게 되면 여러분의 잠재의식에서 어떤 해답을 얻어낼 지는 모르지만, 그런 해답은 어김없이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적인 해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냥 그 가짜 대답들이 사라지게 내버려두십시오. 자기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것은 내가 찾는 답이 아니다.” 그리고 화두를 계속 물어 가십시오.


 


화두가 의문의 마음 없이 계속 되풀이하여 묻는 진언(嗔言)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 물음에 대해서는 두 번째 생각을 거기에 보태지 마십시오. 영리한 사람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물음을 물어서 어떻게 선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무엇이 무인가?”를 묻는다고 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믿음과 확신이 부족한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그 화두가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화두를 그냥 선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 보십시오. 화두는 그냥 바로 이렇게 하십시오. , 화두를 계속 물어 들어가 그것이 답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의 핵심은 여러분의 마음을 화두에 집중할 뿐 아니라, 어떤 답을 알고 싶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마음을 집중하고 해답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갖추어지면 여러분의 자아중심이, 말하자면 코너에 몰리게 됩니다. 끈질기게 물어 들어가면 자아가 마침내 갈 곳이 없어져서 사라집니다. 자아가 사라지면 찾던 답이 저절로 드러나고, 여러분은 해탈의 상태를 직접 알게 될 것입니다.


 


화두를 물어 가는 동안 망념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즉시 그냥 화두를 들고 계속 물으십시오. 이렇게 하면 화두를 사용하여 망념을 물리치게 됩니다. 지혜의 금강검(金剛劍)으로 망상을 끊어야 한다는 선 격언이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이 이 검을 쥐고 있으면 자연히 사라집니다. 그러니 화두를 여러분의 금강검으로 여기십시오. 거듭거듭 화두를 물어 가야 하고, 화두가 여러분에게 해답을 내놓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저 계속 화두를 묻고 망념이 일어날 때마다 다시 화두를 드십시오. 그러다 보면 진정으로 화두를 참구하게 됩니다. 그 지점에서 이른바 의정(擬情: 의심의 느낌)이 일어날 것이고, 결국 그것은 대의단(大疑團: 큰 의심덩어리)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 큰 의심이 타파되면 화두의 답을 얻게 됩니다.


 


두 가지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화두를 분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바른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절대로 호흡을 제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컨대 망념을 억누르기 위해 호흡을 제어하면 안됩니다. 망념이 있으면 그냥 화두를 들고, 그것을 절대 호흡과 연관시키지 마십시오.


 


화두와 공안의 기능은 소위 말하는 큰 의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의심은 회의나 의구심이 아니라, 그 화두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해 몹시 답답하고 궁금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일체를 집어삼키는 의문의 상태, 그 화두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답도 타협하지 않는 가차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러한 해결은 생사대사(生死大事)에서의 해탈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의심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일시적인 감정의 의정에서부터, 여러분의 모든 일상 활동 속에서도 저변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의심의 흐름도 있고, 여러분의 온 세계가 이 강렬한 궁금증 속으로 다 빨려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큰 의정도 있습니다. 그 의심이 최고조에 이르면 그것이 광대해지고 스스로 유지됩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 큰 의심이 폭발하면, 여러분의 자아감이 문득 사라지고 깨달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화두는 대단한 도구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참구하여 그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선의 전통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화두가 많이 있지만, 제가 하는 선기(禪期)에서는 네 가지가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무엇이 무()인가?”(역주: 이것은 어떤 것이 무인가?”로 옮길 수도 있다. 이 화두를 무란 무엇인가?” 하고 단어 순서를 바꾸어 묻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럴 경우 물음의 중점이 에서 무엇으로 옮겨가, 생각이나 추측에 빠지거나 해석과 설명을 요구하기 쉽다는 것이다. 다른 화두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누가 염불하고 있는가?”로 하면 안된다) 입니다. 이 화두는 한 제자가 조주(趙州,778~897)선사에게 이렇게 물은 데서 나왔습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선사는 ()” 라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아니다또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역설적인 문답은 선종사(禪宗史)에서 가장 유명한 공안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화두는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 입니다. 여기서 송장은 우리 자신의 육신인데, 왜 송장입니까?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혼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의 송장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이 화두를 든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따지지 마십시오. 그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 라고만 물으십시오.


 


세 번째로 흔히 쓰는 화두는 중생들이 생사윤회 속에서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는 가르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중생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다른 화두와 마찬가지로 그저 그 물음을 계속 물어 가되, 만약 놓치면 다시 들어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네 번째 화두는, 염불을 통해 오롯한 마음을 닦는 중국 스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두 번째 생각을 일으키거나 어떤 답을 찾아 옆길로 가지 않고 곧바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조금 다른 형태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누구인가?” 로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말한 네 가지 화두 중에서 선중(禪衆)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것은 무엇이 무인가?”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화두를 들기가 어려우면 다른 화두 가운데 어느 화두를 들어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무엇이 무인가?” 또는 ()?”를 권장합니다. 이 화두는 어떤 부작용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화두입니다. 그래서 만일 무엇이 무인가?” 를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나는 누구인가(Who am I)?”도 인기 있는 화두이지만, 이것은 선의 전통에서 전통적인 화두는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물음의 중심에 를 두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이 를 놓아 버리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역주:  라마나 마하르쉬의 가르침으로 널리 알려진 나는 누구인가?”는 외관상 화두 같지만 실은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의 유지를 통해 를 소멸하려는 자기탐구법의 초기 단계에서 사용하는 언구(言句)이며, 자기자각에 익숙해지면 이것을 화두처럼 계속 물을 필요가 없다. 여기서는 를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라는 느낌(자아감) 자체가 탐구의 대상이며, 따라서 자각이 곧 탐구(의심)이다. 요컨대 이것은 묵조적 자기자각에 화두적 탐구가 가미되는 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무()인가?”


무엇이 무인가?”는 제가 보통 권하는 화두입니다. ()는 자아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 무아(無我)의 상태입니다. ‘무아(no-self)’란 여러분이 라고 아는 상주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무아가 깨달음의 본래적 상태입니다. 지금 무아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직접 체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아를 직접 체험하려면 무엇이 무인가?” 라고 물어서, 여러분의 온 생명을 이 물음 뒤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긴장하고, 걱정하고, 초조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더 없는 간절함과 오롯한 마음으로 화두를 의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자세로 무엇이 무인가?” 하고 물으십시오. 그러면서도, 긴장해버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신체적으로 긴장이 되면 온 몸이 뻣뻣해지고 숨이 갑갑해지며, 가슴에 압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긴장되면 기진맥진하여 혼침(昏沈)에 떨어지거나 망념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몸이나 마음에 긴장 없이 모든 초점을 화두를 묻는 데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법입니다.


 


 


화두 수행의 단계들


화두는 세 가지 수준 또는 단계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 화두 염하기, 화두 묻기, 화두 참구하기입니다.


 


첫째 단계인 화두 염하기(念話頭)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마음속으로 화두 문구를 거듭거듭 염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답을 알아야겠다거나 화두의 의미를 발견해야겠다는 절박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다소 진언처럼 계속 반복해서 염하거나, 마치 염불하듯이 그렇게 합니다. 이 수준에서는 아직도 망념이 많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꾸준히 하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화두 묻기(問話頭)에서는 그 답을 알고 싶은 큰 욕망이 수반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단순히 화두를 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을 간절히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럴 때는 그 화두에 큰 매력이나 흥미를 느끼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화두에 끌리게 되고, 그래서 망념이 대폭 줄어듭니다. 망념들이 사라지면서, 비록 아직은 화두와 하나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행에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여러분이 여전히 화두와 대립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분명히 화두와 별개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화두를 묻는 자이고, 화두는 여러분에 의해 물어집니다. 이 힘을 유지하는 것은 그 답을 알고 싶어하는 여러분의 강한 절박함입니다.


 


세 번째 단계인 화두 참구하기(參話頭)에서는 여러분이 더 이상 화두와 별개가 아니고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사실 여러분은 그 물음에 의해 완전히 집어삼켜집니다. “무엇이 무인가?”가 여전히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사라지고 소위 의정(擬情, doubt sensation)’ 이라고 하는 깊은 궁금증의 느낌만 남게 됩니다. 여기서 ()’란 의구심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 답을 알고 싶은 바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묻고 궁금해 하는 마음입니다. 그 한가운데서 여러분은 완전히 이 의정과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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