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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의 요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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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0-27 05:00 조회1,7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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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話頭禪)의 요체2


 


성엄 선사


 


화두 참구하기


화두 수행은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화두인 그 물음을 묻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물어 가는 것을 화두 참구라고 합니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생각하여 답을 내려고 애쓴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이 내놓은 어떤 답도 틀린 것입니다. 그 답은 화두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대혜종고 선사는, 화두를 하는 올바른 방법은 가장 이익이 될 때를 위해 기력을 아껴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이 무인가?” 하고 묻기만 하니 얼마나 간단합니까? 게다가 여러분 자신이 그 답을 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화두가 답을 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엇이 무인가?”를 단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저 절박하게 물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혼침에서는 깨어나고, 망상은 그치고, 몸은 이완하십시오. 이것은 정말 쉽고, 힘든 것이 없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너무 애를 쓰면 기력이 고갈될 것이고, 어떤 답을 생각하려고 애쓰면 망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화두 수행을 시작할 때는 여러분의 몸과 그 감각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신체적 자각을 유지하면서 마음의 경계(境界, 인식의 대상들)속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십시오. 마음과 몸이 하나라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만일 느낌과 생각을 순간순간 자각한다면, 명료한 자아감을 가지고 자기를 제어하게 될 것입니다. 통증이든 졸음이든 망념이든 아니면 몸의 불편함이든, 스스로에게 내가 이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십시오. 이렇게 꾸준히 해 나가면 자기를 더 잘 제어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자아감이 안정되어 마음을 붙들어 메게 될 것입니다. 결국 모든 망념과 미혹된 생각이 이 단 하나의 자아감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화두를 들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명료한 자아감 속에 자리 잡는 것이 아직은 힘들다 해도, 그냥 화두를 시작해도 됩니다. 기억해야 할 주안점은 화두법이 힘이 안 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순간순간 그것을 붙드는 것뿐입니다.


 


먼저 명료한 자아감 속에 자리 잡은 다음 화두를 들도록 해 보십시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라도 화두를 들 수는 있지만 십중팔구 마음이 분산되고 들뜰 것입니다. 그럴 때는 인내심이 중요합니다. 안 그래도 망념에 끄달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번뇌를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망념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저 화두로 돌아가십시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들뜰 때도 같은 방법을 쓰십시오.  그저 화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추구하거나 자신의 상황을 배척하려고 드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쪽이든 마음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열쇠는 인내심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 열쇠는 화두를 놓칠 때 화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명료한 자아감 속에 자리 잡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아주 좋습니다. 꾸준히 해 나가서 이 자아감 속에 머무를 수 있으면 화두를 효과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먼저 안정시켜도 되고, 바로 화두를 들기 시작해도 됩니다. 어느 쪽이든 얼마간은 수행이 필요할 것입니다.


 


 


의정을 일으키기


의정을 어떻게 일으킵니까? 화두의 답을 알고 싶은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화두를 물어 가면 됩니다. 화두는 치열하게 들 수도 있고, 좀더 이완된 방식으로 들 수도 있습니다. 몸 상태가 좋고 의지력이 강한 사람들은 한결 치열한 방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좀더 이완된 방식을 권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치열하게 화두를 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이완된 방식이 더 적합합니다. 반면에 선기(禪期)와 같은 일정한 기간 동안 수행할 때에는 치열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어느 방식이든 마음을 사용하여 화두를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한 방식과 이완된 방식의 주된 차이는 사실 마음자세의 차이입니다. 치열한 방식은, 바다 한가운데서 통나무를 붙들고 있는데 만일 그것을 놓쳐 버리면 익사할 그런 절박한 상황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직 화두만이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와 같은 절박함으로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오롯한 마음으로, ‘가 무엇인지 혹은 자신의 화두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해야 합니다. 포기함이 없이, 더 없는 절박함으로 계속해 나가십시오. 잠시라도 그것을 놓아 버리면 죽는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치열함이 있으면 망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수행은 이음매가 없고 틈새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치열한 방식을 쓰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더 빨리 성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 치열한 방식에 따르는 첫 번째 위험은, 화두를 단순히 묻기 보다는 화두를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 마음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이것이 치열해지면서 두통이 오거나 머리가 뻐근해지거나 현기증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위험은 그런 치열함과 더불어 강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마음 상태가 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장애들을 마장(魔障)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은 수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환영(幻影)이나 환각입니다. 치열한 방식의 세 번째 위험은, 화두 물음에 호흡을 맞추려고 들거나 그 물음이 여러분의 호흡 패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한, 긴장 기타 불편함이 초래되어 수행을 장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화두를 치열하게 들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위험 요소입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치열한 방식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됩니다.


 


이완된 방식에서도 여러분은 화두의 답을 알고 싶어 하지만, 특이한 체험을 구하거나 무엇을 없애려고 하면서 아주 세게 밀어붙이지는 않습니다. 오롯한 마음으로, 그저 그 답을 알고 싶은 욕망을 유지해 갑니다. 이 방식은 한결 이완되어 있지만 그래도 이음매가 없어야 합니다. ‘이음매가 없다는 것은 화두를 물을 때마다 망념이 스며들지 않고 마음이 또렷하다는 뜻입니다. 이완되어 있으되 또렷한 가운데 화두를 묻고, 화두에 대한 관심을 계발하고, 화두를 묻는 일의 가치를 인식합니다. 이것은 강아지가 오랫동안 공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완된 방식에서는 관심을 키우고 그 물음의 가치를 알아야 하며, 심지어는 화두를 가지고 놀아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마치 귀한 기름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길을 가듯이 해야 합니다.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야 하고, 따라서 최대한 깨어있는 마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 마음의 깨어 있음은 주의 깊은 것이지, 긴장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이완된 방식을 시용하다가 피로해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몽롱하기 때문입니다. 화두를 또렷이 지닐 수만 있다면 잠시 화두를 내려놓고 휴식해도 됩니다. 기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화두를 드십시오. 일상생활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저 또렷하고 집중된 마음을 유지하면서 이따금씩 화두를 드십시오. 그리고 어떤 당면 과제가 있을 때는 화두를 내려놓고 오롯한 마음으로 집중을 유지하면서 그 과제를 완수하십시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 과제나 대화가 끝나면 다시 화두를 들고 또렷하게 화두를 지어가면 됩니다.


 


이런 식의 수행은 비록 이완되어 있기는 하나, 마치 낙숫물이 결국에는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방식으로 수행하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여러분의 인격이 다듬어져 있고, 마음이 아주 명료하고 확장되어 있으며 끝없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점진적으로 여러분의 인격은 더 다듬어지고 더 안정되며, 마음은 더 명료해지고 더 확장됩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해도, 여러분이 깨달았다는 것을 스승이 알아차릴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는 그 깨달음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 사이 여러분의 번뇌가 사라지고 인격이 더 안정된 것입니다. 이런 방식에서는 치열한 방식에서처럼 깨달음이 돌발적으로 신속하게 일어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깨달음이 가능합니다. 그에 비해 치열한 방식에서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더 빠를 수 있지만,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이완된 방식이 깨달음으로 이끌어줄 수는 있지만, 깨닫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게으르게 수행하면서도 자신이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름이 가득 든 그릇의 비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그릇을 들고 걸어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기름을 흘리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걷는 것이 아무리 느리다 해도 아주 또렷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서두르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시간적으로 여유를 두어야 합니다. 조금 피로하거나 지루하다고 해서 매번 그릇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그것은 게으른 것이고 진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완된 방식의 핵심은 끊임없이, 그러나 구하지 않는 자세로 계속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방식을 택하든 이완된 방식을 택하든, 부디 부지런히 수행을 하십시오. 화두를 하지 않는 분들도 기름이 가득한 그릇을 들고 걸어가는 비유를 응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아주 주의 깊은 마음의 또렷함으로 그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아주 주의 깊게 또렷한 정신으로 수행하고, 망념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십시오. 마음속으로 오로지 화두만 있게 되면,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켜도 됩니다. 그럴 때는 자연스럽게 의정이 일어날 것이고, 대의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망념이 있으면 의정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좌선 도중에 신체적이거나 심리적인 반응들을 몇 번씩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반응들은 통증, 욱신거림, 감각의 마비, 가려움은 물론, 몸의 떨림이나 흔들림 같이 저절로 일어나는 움직임일 수도 있습니다. 몸이 따뜻함이나 차가움, 극도의 열이나 냉기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치열한 수행에서 오는 심리적인 반응들은 주로 환각과 번뇌입니다. 환청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만 들리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이전에 일어난 실제 사건들이 마음속에서 재연되는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좌선 종이 울린다든가 예불 독경 소리가 들리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환영(幻影)은 무엇을 계속 응시하고 있을 때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올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여러분이 눈을 감고 있을 때 보는 장면이나 이미지들로서 진짜처럼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환영이 나타날 때에는 눈을 크게 뜨고, 대상을 너무 집중해서 보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냄새나 향기를 경험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흔히 기억에 의해 촉발됩니다. 감촉도 온갖 다양한 환각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이 반드시 신체적 접촉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피부가 건조한 느낌과 같이 아주 일반적인 느낌일 수도 있고, 몸이 아주 유연하거나 아주 긴장되어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유형의 신체적 환각은 몸이 확장되거나 줄어드는 느낌, 떠오르거나 가라앉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환각이며 무시해 버려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여러분이 수행하는 방법을 계속 견지하십시오.


 


환각은 탐애와 혐오의 마음, ,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특별한 체험을 구하는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혐오는 어떤 경험들을 회피하거나 억누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심리적인 반응들이 일어날 것이고 환각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치열한 수행에서 보통 나타나는 신체적, 심리적 반응들입니다. 그런 것을 경험해도 무방하고, 경험하지 못해도 무방합니다. 계속 수행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 제가 말한 것을 여러분이 귀담아 들었으니 자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겠지요.


 


 


화두 수행의 의미


허운 선사께서 법문을 하실 때는 이따금 제자들에게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수행을 당신이 방해하는 것을 참회하면서도 주칠법사(主七法師, 선칠을 주재하는 스님)로서 법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저도 병이 났으니, 본 주칠법사도 아마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허운 선사처럼 저 역시 불법(佛法)을 가르치지 않으면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실은 제가 말을 하든 않든 어느 쪽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법()을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귀로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두서없이 하는 말을 듣느니 자기 화두를 오롯이 참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수행을 하면서도 이런 이야기 중 어떤 것을 화두와 뒤섞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 법문이 두서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무시하고 그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멋진 일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 망상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수행을 돕기 위해 이런 망상이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결국 모든 생각은 산만한 사고에 불과한데, 왜 우리가 산만한 사고를 더 해야 합니까?


 


조주 선사는 언젠가 말하기를, 하루 24시간 중 자신의 마음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좌선할 때는 물론이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수행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송장처럼 걸어 다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범부들은 깨어있는 동안은 오롯이 수행할 수 있지만 잠들어 있을 때는 대개 수행을 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고봉원묘(高峯原妙, 1238~95) 선사는 언젠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7일 내리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면 깨달을 것을 보증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 머리를 끊어 가라.” 이 이야기는 허운 선사가 사용한 하나의 공안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고봉 선사의 주장을 뒤집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7일 동안 지속적으로, 이음매 없이, 틈새 없이 그리고 완전한 명료함으로 7일 밤낮에 걸쳐 화두를 수행할 수 있다면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왜 여러분은 7일 내리 틈새 없이 수행하지 못하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 답은 여러분에게 결의가 부족하다는 것이 되겠지요. 불교 용어로 이것을 대서원(大誓願)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결의가 부족하면 망념이나 주위 환경에서 나는 소리, 몸의 불편함, 이런 저런 것의 방해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발동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순간순간 방법을 고수할 수 있으면 더 큰 자신감이 생길 것입니다. 역으로, 자신감이 생기면 생길수록 여러분의 결의도 더 강해질 것입니다. 애당초 결의가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벗어났다는 것을 발견하면 다시 방법으로 자신을 돌려 세워야 합니다. 매번 좌선할 때마다 이러한 서원을 세우면 나중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방법을 고수하는 데 익숙해질 것입니다. 방해 요인 없이 편안하게, 이음매 없이, 틈새 없이 화두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의심을 일으키지 못한 채 화두를 들기만 하면 그것은 그냥 진언을 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는 기껏해야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정도겠지요. 그래서 의심이 필수적입니다. 화두를 들 때는 동시에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꾸준히 하다 보면 결국 대의단이라는 것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큰 의심이 반드시 깨달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의심이 없는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를 지속적으로 들고, 의심을 일으켜서 그것이 결국 큰 의심 덩어리로 발전할 수 있게 하며, 그런 다음 그 큰 의심을 타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안한 마음으로 거기 앉아 있으면서 어떤 때는 가 있고 어떤 때는 없다면 그것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하는 요령은 팽팽하게, 다시 말해서 틈이 없이 하되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두를 지속적으로 하면서도 애씀 없이 하도록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이것이 화두 수행의 과정입니다.


 


화두법을 수백 년 동안 해 왔지만 현대에 와서야 허운 선사는 화두라는 말을 설명했습니다. 허운 선사는, 우리의 마음을 밝혀서 자신의 참된 자성을 보는 것이 화두를 하는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참된 자성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성(佛性)입니다. 불성이 무엇입니까? 불성은 공성(空性, emptiness)입니다. 공성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공성은 아무 대상이 없는 텅 빈 상태가 아니고, 일종의 결핍도 아닙니다. 이 공성은 중생이라고 하는 것, 부처라고 하는 것의 실체 저변에 있는 것입니다. 공성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우리의 본래 성품으로서 내재해 있는 불성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중생들의 마음을 참구하고, 불성을 참구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을 정확히 아는 것이 부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중생, 부처는 하나입니다.


 


이것은 화두와 어떻게 관계됩니까? 중국어로 ()’이라는 뜻인데, 때로는 마음속으로 하거나 입 밖에 내어 하는 입말로도 번역됩니다. ‘()’ 라는 말은 머리’, ‘’, ‘수원(水原)’ 혹은 근원을 뜻할 수 있습니다. 입말의 수원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간단히 말해서, 입말이 무엇입니까? 입말은 우리가 의사 소통을 하고 생각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입니다. 이 기호들 이면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이면에 있는 것은 근원 혹은 수원입니다. 이 수원은 어떤 대상이나, 이 기호들이 나오는 어떤 원래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확히 공성입니다. 이 공성은 무엇이 없거나 허공처럼 빈 것이 아닙니다. 실은 그것은 중생과 부처들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 (), 불성의 관계는 우리가 (화두를 통해) 그 입말의 근원을, 즉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부처 마음을 탐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공()의 마음이고 우리의 참된 불성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직접 탐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바깥의 어떤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대상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대립하겠지요. 따라서 화두법은 기호를 사용하여 기호들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운 선사는 우리가 화두를 말로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수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라고 말하고 나면 그것은 이미 그 생각의 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의 머리혹은 근원은 대상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꼬리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라고 묻는 것은 꼬리를 쫓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여 마음을 탐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참된 불성을 탐구합니다.


 


화두법을 사용하기 위해 그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이 방법을 쓰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참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 질문을 한두 가지 받아 보겠습니다.


 


선중 : 한번은 낮에, 마치 문이 갑자기 열린 것처럼 느껴져 제가 화두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고, 화두가 분명하게 잡혔습니다. 외부 환경을 지각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부담되지는 않았고, 그냥 일종의 먼 빛 같았습니다. 생각들이 오고 갔지만 그것들은 힘이 약했습니다. 그 생각들이 일어나자마자 어떤 힘이 그것들을 쓸어버린다는 느낌이 들었고, 저는 화두를 계속 들 수 있었습니다.


 


성엄 : 그것은 좋은 체험이지만 의심이 없었습니다. 의심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지속될 만큼 강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별 거 아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그런데 내가 과연 뭘 원하지? 모르겠다.” 고 하십시오. 그저 화두를 들고 이 모름을 일으키십시오. “무엇이 무인가? 모르지만 알고 싶다.”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무엇이 떠오르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건 아니야.’ 모르는 가운데 를 계속 드는 것이 의심을 일으키는 방법입니다. 그런 체험 같은 것들은 일어나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깊은 체험이 아닙니다. 그저 화두를 계속 지어 가십시오.


 


선중 : 저는 과거에 하던 수식법(隨息法)이 계속 돌아오는 바람에 화두를 하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엄 : 바로 지금 그대는 화두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어떤 것이 과거의 경험에서 다시 돌아오면 그냥 놓아 버리고 화두를 계속 지어 가십시오. 물론 습관상 그 호흡법으로 거듭거듭 돌아가겠지요. 그러나 유일한 방도는 그대 자신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예전 습관이 돌아오면 그냥 그것을 놓아 버리고, 거듭거듭 화두를 계속 지어가십시오. 때가 되면 화두를 고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다른 방법은 해 보지도 못하겠지요.


 


 


직접 관법


집중적인 선칠(禪七, 7일간의 선 수행)의 환경에서는 화두법을 늘 사용해야 하고, 경행(經行, 행선) 중에도 그래야 합니다. 경행은 실은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수행할 기회입니다. 그러나 걷는 동안 환경 속의 소리와 형상에 주의가 끌릴 수 있습니다. 이미 의정을 일으켰다면 이런 지각들이 여러분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고, 여러분은 그저 화두를 지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지각의 방해를 받는다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편으로 직접 관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에서는 그냥 눈이나 귀를 사용하여 목전의 대상을 직접 지각하도록 마음을 훈련합니다. 그 핵심은 분별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름 붙이지 말 것, 묘사하지 말 것, 비교하지 말 것입니다. 목전에 무엇이 있든 그냥 있는 그대로 지각되게 하십시오. 그것이 직접 관법입니다.


 


이것을 잘 하게 되면 공()을 관()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용법에서 관()이란 것은 생각하기’, ‘성찰하기혹은 분석하기를 뜻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예컨대 공을 관한다는 것은 공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은 그냥 하나의 비개념적 지각 방식으로, 마음을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직접 관법에서 공을 관하기로 어떻게 옮겨갑니까? 직접 관법에서는 여러분이 지각하는 그 대상 이외에는 마음에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아무 개념도, 명칭도, 비교도 붙지 않으면 마음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로 오랜 시간을 계속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 깨달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각되는 대상을 지각하는 어떤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행법(行法)에 통달하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은 관()의 대상에 고착됨이 없이 명료함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합니다.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공을 관하기 시작합니다. 공을 관하려면 마음이 대상들의 형상이나 소리에 고착되지 않게 하십시오. 외부의 사건이나 상황에 고착되지 말고, 내면의 생각이나 관념에도 고착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안팎으로 마음이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내면에서는 많은 생각이 일어날 것이고, 바깥의 많은 것들을 지각하게 되겠지만, 마음이 그 모든 것에서 떨어지게 하십시오. 마음을 예컨대 소리에 머무르게 하는 직접 관법과는 달리 이제는 그것을 그냥 놓아 버립니다. 마음의 자유로운 흐름이 여러분의 지각에 끄달리지 않게 하십시오. 만일 형상들을 보게 되면 그것들이 마음의 내용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냥 놓아 버리십시오. 내면의 생각과 개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놓아 버리십시오. 많은 것들이 떠오를 수 있지만, 여러분은 단순히 머무르지 않음의 상태, 놓아 버림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험의 과정과 그 후의 놓아 버리기를 고수하십시오. 그것은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하나의 연속적 과정이며, 거기서 사물들은 여러분의 인식의 장에 나타났다가 제풀에 사라집니다. 이것을 아주 잘 하게 되면 대의단의 타파를 우회하고도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방법은 쉽지 않지만 또한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화두, 직접 관법 그리고 공을 관하기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최소한 화두에는 친숙합니다. 둘째로, 여러분에게는 직접 관법이 있습니다. 이름 붙이지 않기, 묘사하지 않기, 비교하지 않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공을 관하기, 즉 여러분이 경험하는 일체를 놓아 버리기입니다. 이 마지막 것은 그냥 여러분에게 맛을 보라고 내놓는 하나의 찬일 뿐입니다! 자기비하적인 생각들을 하지 마십시오. 이따금 사람들은 많은 번뇌를 가지고 있다가도, 갑자기 이 번뇌들이 싹 사라지고 마음이 문득 평화로워 집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이 수행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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