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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과 죽비

선수행의 길 - 혜국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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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0-24 18:34 조회1,9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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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행의 길


- 혜국 스님 -

 

 

마음을 찾으려면 화두를 잡아라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옵니다. 젊은이나 노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죽음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겨울이 오기 전에 기름을 준비하고 따뜻한 옷을 준비할 줄 알면서, 누구에게나 오는 이 확실한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  나는 누구인가?

•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냥 먹고 자는 일은 동물들도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가지고 잘 살 수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쯤 모든 인간은 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만 합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30, 40년 전의 굶주리고 못살 때 보다 몸이 편안하고, 입가에 미소가 돌고, 마음에서 큰 용기가 쏟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더 불안해 하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문명 등의 바깥에서 오는 것들로는 우리의 생활이 결코 편안하고 행복해 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온과 행복이 바깥의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가 돌아가고 우리의 가정살이가 돌아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법칙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모두가 마음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행복하게 살고자 하면, 주인공인 마음을 찾고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찾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이요, 참선 중에서도 반드시 화두를 드는 간화선법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요즘 일부에서는 화두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던 화두가 중국에 와서 생겨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말씀화', '머리두', 곧 말의 머리, 말하기 이전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화두의 '말씀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고 받는 말이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것, 모양이 생겨나기 이전 자리'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이 화두는 이 세상이 생기기 이전의 모양 없는 바로 그것이요,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불생불멸).

 


따라서 이 화두는 부처님 당시에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오늘이 자리에도, 또 억만년 후에도 화두는 분명히 있습니다. 언제나 분명히 있는 그것이 중국에 와서 문자로 정리되었고, '화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비유하면, 세종대왕이라는 분이 나오기 전에도 '아버지, 어머니'는 있었지만, '아버지'라는 글자와 '어머니'라는 글자는 세종대왕이 나온 다음에 만들어진 경우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 화두참선법은 주인공을 찾는 공부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보고 듣고 말을 합니다. 그럼 대체 누가 보고 누가 듣고 누가 말을 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손을 올릴 수 있고 내릴 수 있는 것도,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고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 이라고 표현하여도 30방이요 '영혼'이라고 해도 30방이지만, 부득이 '마음'이라는 이름을 빌려 설명하겠습니다.

 


내 안에서 이 마음이 잠깐만 나가버리면 우리는 손을 든 채로 뻣뻣한 시체가 됩니다. 나의 몸뚱이는 잠깐 빌려 쓰는 기계이고, 참마음은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입니다. 그것에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영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며, '잠재의식', '정신' 이라고도 합니다. 일단 이름이 붙으면 틀린 말이지만, 그 마음이 나가버리면 죽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며 그 마음이야말로 참된 '나'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께서 참선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선을 하여 마음 주인공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있습니다. 흔히들 참선을 할 때 마음을 비운다고 합니다만, '내가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유심입니까? 무심입니까? 당연히 유심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비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번 더 낸 것이니, 결국 허물에다 허물을 쌓은 격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멍청하게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참선용어로 '무기'에 떨어져 버립니다.

 


실로 우리의 눈이나 귀로는 마음이라는 주인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유심으로는 볼 수가 업습니다. 무심의 경지에 가야만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심이 되고자 하면 허물이 붙고 그냥 우두커니 있으면 무기에 빠집니다. 그래서 참선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심이 되려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 그 경지는 책이나 다른 무엇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 있는 세계에 의지하여서는 모양 없는 무심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무심의 세계는 머리로 아무리 따져보아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화두를 하면 무심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화두는 말 이전의 세계, 모양이 있기 이전의 세계이기 때문에 무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곧 화두는 '나' 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만 타파하면 바로 우주의 대진리를 깨닫는다' 는 조사스님의 말씀을 100% 믿고 참구해나가다가, 마침내 무심경지에서 마음과 하나가 되는 그 시간에 무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계란은 계란 안의 세계 밖에 모릅니다. 불투명한 껍질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어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지는 세계를 계란은 아무리 알고자 하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바깥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품어줘야 합니다. 20일만 품어서도 안됩니다. 21일이 되어야 계란의 껍질이 탁 터집니다. 어떤 때 터지는 것인가? 어미 닭과 계란의 체온이 꼭 하나가 될 때 저절로 툭 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란이 툭 터져 병아리가 바깥에 나오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바깥 세상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병아리처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인이 삼라만상을 환히 보는 것을 우리는 '도를 통했다', '무심을 이루었다' 고 합니다. 아집과 번뇌의 껍질 속에 갇혀서 '본다, 못 본다' 하던 벽을 싹 허물어, 모든 망심을 떨쳐버렸기 때문에 무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가지고 눈을 보려는 허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지식의 올바른 지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화두는 정답이다

 

화두란 생하고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이전에도 부처님 이후에도 우주 자연 법칙이 있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소식이 있듯이, 화두 또한 미래의 법이 다하도록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바로 '나' 의 참 생명을 말하는 것이므로, 화두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코 화두 참선법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질문을 합니다.

 


"화두를 십 년 넘게 하였지만, 도무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 모양입니다. 스님은 어떻습니까?"

 


나도 처음 참선을 시작할 때는 참선이 얼마나 안 되던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습니다. 화두를 드는 방법이 잘못 된 것은 아닌가 하여 중간에 포기할까도 생각해 보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는 주력수행으로 바꾸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황을 거치다가, 마침내 화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참선공부를 한 대부분의 선지식들도 이처럼 방황의 시기를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두가 잘 안 된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창피해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화두가 잘 되지 않더라도 참선을 하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입니다.

 


모든 우주의 소식은 내 몸 안에서 일어나 내 몸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순간 선한 생각이나 보리심을 낼 때나 또는 화두에 집중할 때, 내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든 생명은 환희의 춤을 춥니다. 반대로 내가 한 생각 화를 낼 때, 내 몸의 털구멍에 있는 8억 충들이 대지진을 느껴 한없이 불안에 떠는 것입니다.

 


결코 내 몸뚱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뚱이는 내 것이 아니요 내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살생이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나'를 포기하는 자살은 이 우주 하나를 완전히 폭파시키는 행위입니다.

 


자살을 결행할 만큼 독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차라리 참선을 하십시오. 참선을 통하여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제도하십시오. 참을 '나'를 살리는 가장 큰 방생은 내 마음과 대화를 나누는 길인 화두를 참구할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표현을 한 것이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께 여쭈었습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동문서답같이 들리겠지만, '뜰 앞에 잣나무' 라는 이 여섯 글자야말로 정확한 해답입니다. 곧 '뜰 앞의 잣나무' 는 조주 스님의 참 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요, '조사서래의' 에 대한 정확한 해답입니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화두를 정신 통일 또는 정신 집중의 한 방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화두의 정답에 십만팔천리나 떨어진 것이요, 화두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화두는 곧 정답입니다. 이 마음을 그 이상은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가장 정확하게 표현을 한 답입니다.

 


물론 의심하라고 화두를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못 알아 들었기 때문에 이 답을 확실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면 '왜 정전백수자라 했을까?' '왜?' 하고 의심을 일으켜 들어가야지, '뜰 앞의 나무를 무조건 긍정해 버리거나 '뜰 앞의 잣나무'에 집착하여 생각을 굴리게 되면 이미 정답과는 10만8천리 떨어진 것이 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우리 몸뚱이를 이끌고 다니는 참 주인공을 찾으려면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아무리 따져봐야 3차원의 세계밖에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차원이 없는 무차원의 세계인 우주의 진리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차원의 세계인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려면, 무차원의 정답인 화두에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중의 장애와 극복

 

 이제 화두를 하면서 부딪히는 장애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시다. 먼저 '이뭣고' 화두를 가지고 '화두 드는 법'을 예로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뭣고' 화두를 할 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이 뭐꼬?"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할 줄 아는 놈이 뭐꼬?" 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들을 줄 아는 놈이 뭐꼬?" 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느 것이 '이뭣고' 화두 드는 정답이냐?" 고 질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부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따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얼마만큼 '나' 의 인생을 거기에 투자하여 번뇌망상의 세계를 길들여 나가느냐를 따질지언정, 이게 맞는가 저게 맞는가를 따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 할 줄 아는 놈이 뭣고' 와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이 뭣고' 가 꼭 같은 말인데, 그 차이를 가지고 벌써 방황한다면, 자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참선을 한참 하다 보면 '무언가' 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참선을 십 년 이십 년을 하여도 전혀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작한지 열흘 보름도 안 되었는데 귀신이 보이는 사람, 조상신이 보이는 사람, 부처님이 보이는 사람, 별별 것이 다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그 사람 생각의 그림자입니다. 그 까닭을 알면 이 문제를 쉽게 극복할 수 있으므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 물이 담긴 컵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 물에 흙을 넣고 휘저으면 탁한 흙탕물이 되어버리고, 그 물에는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물이 있으면 그 물에 달이 비치기 마련인데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휘저어 흙탕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달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 또한 그와 같습니다. TV보는 흙탕물, 가정불화라는 흙탕물, 번뇌 망상이라는 흙탕물을 휘휘 휘젓고 있는데 어떻게 달이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휘젓는 것을 멈추고 나면 그 안의 찌꺼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솔잎이 떨어진 물에는 솔잎이 보이기 시작하고, 낙엽이 떨어진 물에는 낙엽이 보이기 시작하며, 돌멩이가 들어간 물에는 돌멩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참선을 하다가 이러한 찌꺼기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은 '내가 잘 수행하여 보인다' 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가라앉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그 자연법칙과 하나가 되는 것이 화두인데, 그 화두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현상을 보는 놈이 따로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일단 '아! 이런 것이 보였다' 하는 생각이 들면 망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망상이 차츰 멈추어 무언가가 조금 보였는데, '보였다' 는 생각에 빠지면 그 물을 다시 한번 더 휘저어 놓은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현상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무엇이 보이거나 말거나, 그쪽에 집착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선을 하다 보면 그러한 것들이 일어나거나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 대자연이란 찰나도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문을 열어보면 더운 바람은 저쪽으로 나가고 찬바람은 이쪽으로 들어옵니다 잠깐도 쉬지 않고 바람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강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있거나 없거나 바닷물이 일렁이듯이, 우주 대자연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 인간도 우주대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따뜻한 물을 먹으면 몸이 더워지고 찬물을 먹으면 몸이 차집니다. 또 술을 먹으면 술기운에 의해 움직이고, 마약을 먹으면 그 기운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컵 안에서 물이 가라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이 몸뚱이가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는데도, 유독 참선할 때만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평상시에 우리가 그러한 변화를 예의 주시하지 못한 채 세상살이에 너무 젖어 들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화두는 깊이 참구하지는 않고 '무슨 귀신이 보인다' 거나 '어떤 현상이 나타났느니' 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까?

 


일단 무엇이 나타나면 무조건 화두로 돌아오십시오. 십리 밖의 사람이 보이든 천리 밖의 사람이 보이든, ' 흙탕물이 가라앉다 보니까 내 번뇌 망상의 일부분이 보이는구나' 하고 얼른 화두로 돌아와야 합니다. 

 

 

 

참선에 투자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일평생을 보면서 우리의 갈 길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같은 위대한 분도 6년 고행을 하시며 많은 역경을 건너왔지 않습니까? 미녀가 나타나 유혹을 하고 창칼을 든 사람이 나타나 위협을 하는, 별별 마장이 다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장들은 결코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 안에서 나타나는 에너지의 싸움입니다.

 


곧 참선을 하면 우리의 몸 안에서 백색기운과 흑색가운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참선을 할 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우리 몸 안에 있는 흑색의 감정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참선을 하다가 잘 안 되는 과장을 꼭 겪게 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의 몸 안에는 무엇이 꽉 차 있습니다. 번뇌 망상들로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는 '업' 이라고 합니다. 잠자는 번뇌세포, 화내는 번뇌세포, 그리워하는 번뇌세포..., 그러한 번뇌세포들이 우리 몸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 기운들은 우리 몸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번뇌의 세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기운이 화두입니다. 화두 기운이 들어오면 번뇌망상의 세포들은 죽어 없어지게 됩니다. 이를 불교용어로는 '업장소멸'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업장소멸이 가장 잘 되고 가장 빨리 되는 길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길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을 그만 두시고 보리수 아래로 들어가실 때, '이미 참선을 실답게 보여주셨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고행을 내버리고 보리수 아래로 가신 것은 조용히 마음을 관찰하는 중도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흔히 중도라고 하면,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닌 중간의 길' 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중도란 이쪽 변도 저쪽 변도 취하지 않고, 완전히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부득이 그것을 표현하자면 '바를 정'의 '정도' 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참선해서 화두가 익어가면 하얀 기운에 의해 검은 기운이 점점 줄어듭니다. 흙탕물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란 밝음의 상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있다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어두움이란 없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광명부재의 현상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곧 백색 기운, 화두 기운이 없는 부분만큼 흑색 기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20%되면 흑색은 80%로 줄어들고, 화두가 30%되면 흑색은 70%로 줄어들어 갑니다. 이렇게 점점 흙탕물이 가라 앉다 보면 '나' 의 지나간 과거가 보이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 거기에 속지를 말아야 합니다. 흰 색깔이 60%쯤 되면, 지금까지는 검은 색깔의 안경을 써서 검게만 보이던 세계에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내 몸 안에서 새까만 색깔이 나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고 할지라도, 한 생각 돌려 먹으면 그 색깔이 금방 흰 색깔로 변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흰 색깔이 많아지면 가정이 안정이 되고 모든 일들이 잘 되어 갑니다. 그러나 검은 색깔이 많아지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당나라 마조 스님의 법맥을 이은 제자 중 염관 선사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염관선사는 저녁공양을 마친 뒤, 방에 앉아 밖을 무심하게 내다보다가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두 명의 사미승이 큰 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까지 닿는 광명이 솟구치더니, 하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의 보살님들이 내려와 찬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착하고 차하도다, 참으로 거룩하도다. 부디 그 마음을 변치 말고 활연히 대도를 깨달아 모든 중생을 제도할지니라."

 


도력이 높은 염관 선사였던지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 까닭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길래 저렇듯 큰 보살님이 함께 찬탄을 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데, 조금 지나자 보살님들이 하나 둘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시커먼 구름이 일어나더니 마왕 파순의 마구니 군단이 추한 냄새를 풍기며 몰려왔습니다. 사미승을 에워싼 마구니들이 바닥에다 침을 튁튁 뱉으면서 이상한 춤을 추며 지옥으로 향하는 길로 유혹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구나.'

염관 선사는 두 사미승을 불러 물었습니다.

"조금 전에 너희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우리가 출가하여 진흙 속의 연꽃과 같이 청정수행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수행이 힘들더라도 기필코 대도를 이루어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갚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만 이야기 하였느냐?"

 


"그러다가 나중에는, '불교 공부가 밑도 끝도 없는지, 어떤 스님은 오래도록 참선공부를 하였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고 오히려 위장병에 걸려 고생만 하더라' 는 등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을 집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하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염관 선사는 두 사미승에게 직접 목격했던 광경을 이야기해주고 교훈을 내렸습니다.

 


"너희가 불법 문중에 들어와 도를 닦고 중생제도를 하겠다는 장한 생각을 하였을 때는 너희 마음으로부터 광명이 샘솟아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대보살님을 임하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너희가 편안함만을 찾고 도 닦기를 포기하는 생각을 내었을 때는 보살들이 떠나가고, 생사와 지옥의 길로 이끄는 마왕 파순 등의 마구니들이 나타나 너희를 유혹하였느니라. 이를 잘 새겨서 밝고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도록 하여라."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보존법칙'에 근거하여 에너지와 질량을 따로 놓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의 '등가원리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질량' 이고, '질량=에너지'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다시 말해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예전에는 따로 분리하여 보았는데, 아인슈타인 이후에는 모양 있는 것이 모양 없는 것이고, 모양 없는 것을 모양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입니다.

 


앞의 이야기에 두 스님이 나무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하늘에서 천인들이 내려왔다는 것은 결코 거짓 현상이 아닙니다. 에너지가 질량화 되고 색이 되며, 질량인 색이 에너지가 되는 이 마음법칙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부처님 세계의 백색 에너지가 내려온 것입니다.

 


부처님 세계의 기운은 이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커튼을 치고 문을 닫아 걸어 못 들어오게 할 뿐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누구나 부처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태양광명이란 부처의 성품과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커튼을 치고 문을 닫고 있으므로, 태양광명이 아무리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으며, 부처의 성품이 발현될래야 발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 자연법칙은 결코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습니다. 억지를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태양광명은 내가 받아주면 들어오고, 내가 커튼을 쳐놓으면 커튼 앞에서 멈출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빛을 안 보내주고 공기를 안 보내주는 법은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해주는 것이 우주 자연법칙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우리가 한 생각 좋은 마음을 내면 몸 안에서 맑은 기운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커튼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부처의 기운인 태양광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화두라고 하는 그 세계에 '나' 의 시간을 투자해 보십시오. 도는 하는 것만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건대, 참선을 하면서 무슨 신기한 일이 나타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기한 일이 안 나타나는 것이 잘된 공부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죽었던 몸을 벌떡 일어나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절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주자연법칙에 수순하는 쪽에서 가르친 부처님 법이므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고 바르게 이끌어 주고자 한 것입니다. 실로 신통변화를 부린다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법을 추구하면 마음 법을 바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끌려가지 말고 화두 하나에만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정녕 화두와 씨름하고 참선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참되게 하고 내 인생에 남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은행에 저금한 돈과도 같습니다. 저축해 두었다가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습니다. 더욱이 완전한 깨달음을 열어 부처를 이루게 하거늘, 참선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내가 눈을 감고 죽어갈 때 '나' 의 정신세계에는 어떠한 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인가? 그때 한 폭의 그림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면 참으로 잘 산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법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인 마음법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먼저 간 사람에게는 물질이 저절로 따라오고, 마음이 뒤에 있는 사람은 물질이 쫒아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업을 쌓는 가장 수승한 방법 또한 마음을 닦는 참선수행법인 것입니다.

 


부디 마음이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서 마음을 위해 살고, 마음 닦는 쪽으로 나아가십시오. 날아다니는 법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법을 배우면 천만년이 지나도 이 우주자연의 법칙을 알 수 없지만, 마음을 찾는 쪽으로 공부를 하다가 마음을 알게 되면 하루 아침에 삼천대천세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거듭 청하건대, 우리 모두 참선에 대해 애정을 가져봅시다. 참선을 하는 시간에 대해 애정을 가져 봅시다. 내 마음과 대화를 하고 내 마음의 양식을 쌓는 화두참선법에 투자하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그림을 그리는 시간입니다.

 


저 넓은 허공은 먹물을 칠해도 묻지 않고 페인트를 칠해도 묻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화두참선을 하여 저 허공과 같이 때묻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참마음을 회복해가지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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