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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이 한암스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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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융 작성일13-02-05 22:24 조회2,29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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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가 한암에게

- 한암이 아니면 누가 나의 知音이랴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할 뿐더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원개사(遠開士)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진실하고 곧았으며 학문은 고명하였다.

서로 세상을 얻은 듯 추운 겨울을 함께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아침저녁의 안개와 구름,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가 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쓸쓸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하지 않았던가.

슬프도다.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 눈 맑은 제자와의 이별 앞둔 스승의 애틋한 아쉬움 드러나

현대 한국선불교의 도화선을 당긴 프로메테우스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가 한암중원(漢岩重遠, 1876~1951)을 만난 것은

1899년 경북 청암사 수도암에서 였다.

 

당시 대강백이었던 경허는 송곳을 턱밑에 받쳐 들고 치열한 정진을 하던 중‘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확철대오한 뒤 선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특히 이 해에 가야산 해인사 조실로 추대된 경허는 수선사를 창설하고

‘함께 정혜(定慧)를 닦아 도솔천에 나자’는 결사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어느 가을날 오후 24세의 눈 푸른 청년 한암이 찾아온 것이다.

한암은 첫 눈에 경허의 깊은 눈 속에서 2600년 전 사바세계에 나투었던 부처의 모습을 보았다.

한암은 간절히 법을 청했고 경허는‘무릇 있는 바 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란

금강경의 한 구절을 설했다.

 

한암은 이를 듣자 안광(眼光)이 홀연히 열렸다.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모두 자기 자신 아님이 없었다.

아홉살때 서당 훈장에게‘반고 이전에 누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진 후 돌덩이처럼 단단히 맺혀있던 응어리가 확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희열에 찬 한암은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했다.

다리 밑에 하늘이 있고 머리 위에 땅이 있네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한암은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운수행각을 그치고 경허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경허는 『선요(禪要)』의 한 구절인

‘어떤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라는

문답 대목을 인용하며 거기 모인 대중을 향해 그 뜻을 물었다.

모두들 어리둥절 하는 가운데 한암만이 즉각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기와 담벼락이 앞에 있다’고 답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경허는 다음날 법상에 올라 대중을 돌아보며‘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넘어섰다’고 선언했다.

한암의 깨달음을 인가(認可)한 것이다.

 

경허가 한암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 것은 이로부터 몇 년이 흐른 1903년이다.

그는 한암에게 보살이라는 의미의 ‘개사(開士)’라는 존칭과 함께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는 찬사를 보낸다.

 

뿐만 아니라 경허는 시 한 수를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간곡한 부탁도 남기고 있다.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않은 데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이란 예사라서 어려울 게 없지만

뜬세상 흩어지면 또 언제나 보랴.

경허는 이별의 아쉬움과 더불어 한암이 자신과 같이 가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다. 이에 한암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로써 답한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 없을까요.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 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습니다.

한암은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스승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근대 선문을 활짝 열어 제친 불세출의 선지식이자

자신의 심안(心眼)을 열어 주었던 은사였건만 ‘회자정리(會者定離)’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임을 한암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이런 연유로 경허는 한암을 자신의 깊은 울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지음’으로 표현했을 듯도 싶다.

 

여하튼 경허는 이후 삼수갑산 등 북녘에서 빈 배처럼 떠돌며

마치 십우도(十牛圖)의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설움 받는 민중들 속에 묻혀 살다가 함경도에서 입적했다.

1912년 4월 25일이었다.

한암은 뒷날 「선사 경허화상 행장」에서‘오호라! 슬프구나,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렵거늘 비록 잠시 친견을 하였으나 우리들 무리는 오래 모시고 참선을 배우지 못하고 귀적(歸寂)하시던 날도 또한 후사를 참결(參決)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움과 슬픔을 토로했다.

 

오고가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훤히 알았던 스승 경허와 그 제자 한암. 이들이 나눴던 훈훈하면서도 선기(禪氣) 번뜻이는 편지는 『경허집』과 『한암 일발록』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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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반야월님의 댓글

반야월 작성일

대선지식인이자,중생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경허스님과 한암스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글을 올려
주셔서 몰랐던 부분을 알게 돼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