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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법공양 의례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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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화심 작성일07-01-13 10:17 조회3,003회 댓글1건

본문

그 중 매 향 의례와 연등회만 살펴보기로 한다.



[1] 留共養 倫흡

告햐曷는 스승에게 향을 사르면서 법을 설해 주기를 간청하는 게이다. 고향 게는 불교 본래의 헌공의례인데 비해 埋香은 불교 의식이 민중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의례로 민간신앙 형태로 구체화되었던 의식이다.

香은茶.花.果.米와 함께 다섯 가지 공양 물에 속한다. 향이란 선인들이 제사를 올릴 때 불을 피워 사르는 나무를 말하는 것이다. 이 향을 태우는 풍속은 창공에 떠도는 영혼을 이끌기 위한 촉매이며 의식인 것이다. 향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으나 매 향에 쓰이는 향은 어떤 것인가. 『고려도경』에 사향(麝香), 독누(篤樓), 용뇌(龍腦), 전단(旅檀)등이 있으며 침수(愛北水)향을공회 때 태운다(『선화봉사고려도경』 제30권 기명 1)는 기록이 있다. 이 중침수향은 향목이 굳은 목심(木,已,) 부분으로 물에 가라앉는 것이 향기가 짙다고 한다

향 중에서 가장 좋은 침 향을 불전에 올리거나 땅에 묻는 매 향 의식이 14, I5세기 여말산초의 변환기에 행해졌던 것이다. 이 매 향의 풍습을 기록한매향비가 현재 5一6기 전하고있어 주목을 요한다 건립 연대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성 삼일포 매향비

1309년(충선왕 1)

2) 정주 매향비

1335년(충숙왕 복위 4)

3) 영암 암각 매향비

1344년(충목왕 원년)

4) 사천 매향비

1387년(우왕 13)

5) 암 태도 매향비

1405년(태종 5년)

6) 해마 매향비

l427년(세종 9년)



위의 매향비들은 ''내세(來世)의 복을 빌기 위하여 향을 강이나 바다에 담가 묻는[매향]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매향처

1) 고성군 삼일포의 남쪽 호반에 있었다고 하나 비석은 없어지고 비문의 탁본만 전해진다.

2) 정주군 덕 언 면 침향동3)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854) 사천시 곤양면 홍사리(상무데미 )

5) 신안군 암태도

6)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

위의 1) 2)는 현재 비문 을 볼수 없는 실정이어서 3)~6)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은 1988년 지방기념물제119호로 지정됐으며 필자가'93년 8월, '94년 8월 두 차례 답사한 바 엄길리의 진산이라 할 철암사7부 능선에 위치해 있다 본래 엄길리 일대는 영암만의 만입처(현재 간척지)로서 은적산 계곡물이 해수와 마주치는 지점에 자연석 그대로 위치해 있다.

4)는 홍사리 주민들은 '상무데미산' (향을 묻은 산)이라일컬으며 '상무데미' 는 옛날에는 사천만에서 치솟은 바다줄기로 호수가 나들던 약40om 넓이의 바다이자 강이었던 곳으로 담수와 호수가 함수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1910년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간척 된 전답지이다

5)는 10여 년 전만 하여도 간척시 갯벌로 연결되던 독립된 섬이었다.

6)은 1978년 발견 당시 50여 년 전 인근 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그 뒤 부근에서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불가에 구전되는 것에 따르면 매 향의 최적지는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함수 되는 지점이라 한다 앞에 소개한 매향처들의 공통점도 해수가 유입되는 내만(內灣) . 첨입부(添入部)인 것이 그러면 왜 매향비와입지 조건이 해안 지방에 한정되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된다. 이는 을 볼수 없는 실정이어서 3)~6)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은 1988년 지방기념물제119호로 지정됐으며 필자가'93년 8월, '94년 8월 두 차례 답사한 바 엄길리의 진산이라 할 철암사7부 능선에 위치해 있다 본래 엄길리 일대는 영암만의 만입처(현재 간척지)로서 은적산 계곡물이 해수와 마주치는 지점에 자연석 그대로 위치해 있다.

4)는 홍사리 주민들은 '상무데미산' (향을 묻은 산)이라일컬으며 '상무데미' 는 옛날에는 사천만에서 치솟은 바다줄기로 호수가 나들던 약40om 넓이의 바다이자 강이었던 곳으로 담수와 호수가 함수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1910년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간척 된 전답지이다

5)는 10여 년 전만 하여도 간척시 갯벌로 연결되던 독립된 섬이었다.

6)은 1978년 발견 당시 50여 년 전 인근 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그 뒤 부근에서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불가에 구전되는 것에 따르면 매 향의 최적지는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함수 되는 지점이라 한다 앞에 소개한 매향처들의 공통점도 해수가 유입되는 내만(內灣) . 첨입부(添入部)인 것이 그러면 왜 매향비와입지 조건이 해안 지방에 한정되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된다. 이는 여말선초의 변혁기의 왜구의 창궐과 상관성이 있다고 본다.정치적인 불안과 왜구의 침탈이라는 현실적 위기감은 당시 민중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것이다.

결국 매향지의 민중들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감을 떨칠 수 있는 방법으로 미륵 신앙과 집합된 매 향을 택했던 것이다.특히 미륵 신앙 가운데서도미륵하생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미름하생 신앙은 상생 신앙이 상품인을 위한 것인데 반해 하품인을 위한 것이었고, 하품수자는 하생한 미륵의 용화회에 참여함으로써 정토에 왕생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품수자인 민중은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공양)자기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발원 내용을 매형비문에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결국 그들의 고통과 불안을 땅에 묻는 의식이었던 것이다.단순한 향나무가 침형으로 탈바꿈하는 때가 곧 미륵불이 출현하는 때이고, 그때 그들도용화 세계에 태어나 묻어 두었던 향을 꺼내 부처님께 올리고 해탈을 이루겠다는 소박한(민간 신앙과 불교 의례가 습합된소망이 매 향 의식을 낳았던 것이다.



(2 燈供餐鏃

원래 燈은 어둠을 밝혀 주는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지혜에 비유하여 불전에 등을 바치는 등 공양을 향 공양과 함께 매우 중요시해 오고 있다.

연등에 관한 기록이 여러 경전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佛訛施燈功德章邑』에 불 . 법 . 승을 믿어 약간의 등을 바치어도 그것으로 받는 혜복(惠駭)은무궁 무진하고 불멸(붙報滅) 후에 등을 탑사(黔)에 밝히면 현세에서는 3종의 청정한 마음을 얻을 것이요, 내세에서는삼십삼천(三-卜三天)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또 『賢愚祐에서는, 가난한 여인 난타가 정성껏 바친 한 등은 왕이 바친 다른 여러 등이 꺼지어도 끝까지 안 꺼졌다 한다. 『삼국유사』 권 제5 감동 제7 「省t季還生條」에도 불등(佛愷)의 설화가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참된 마음과 등의 소중함을 밝힌것이다.

이렇게 등을 밝힌다는 것이곤 연등(燃燈)이요, 연등을 보며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곧간등(看愷) . 광등(觀燈)이다-이러한 연등의례는 다시 전화하여 법회화(法會化)되었으니 이것이 연등회(燃燈숍) .관등회 (觀燈會)이다.

佛에 대한 공양의 한 방법으로서 인도 이래 연등은 이어져왔으며,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연중행사가 되었다. 신라 진흥왕 12년 팔관회 개설과 함께 연등회도 국가적 행사로 열리게 된다. 그런데 팔관회가 본래 불교 의식의 하나로서 일일 일야에 한하여 팔계를 닦는 것이었으나 풍수지리 도참 사상이나 오행사상 등을 수용하여 민중화된 불교로 변모되었다. 연등회 역시 순전한 불교 행사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신라인의 동해 용진 신앙(東海肴a承申信仰)은 농경 사회에서 농작의 풍흉이 풍신이나용신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 관념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정월 15일 간등(看愷)은풍우신으로서의 용산에 대한시동기원제인 용동제 (龍童祭)와 농사와 관련 있는 태알성수제(太一星宿祭)가 불교의 등공양탓1 연등(燃燈)과 습합되어 10월 팔관회와 함께 국가적인 행사(台蓼國佛孰)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고려 태조 왕건에 계승되고 있다.

「訓要十條」 제6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소원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천령, 오악, 명산, 대천, 용산에 봉사하는 것이니, 후에 간신들이 혹 이에 대해 가감을 건의하는 것을 금지하라.태조의 호국 신앙과 연관된샤만적 밀교 적 요소를 연등회 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규경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의하면 중국, 일본에도 연등은 있으나 집 집마다 장간(長竿)에 등을 다는 것은 진역(虞域)에서만볼수 있는 바그간두(竿頭)에는 치미(雉尾)를 부치는데 이것은 고려의 구풍(舊風)이라 한다 장대 끝에 꿩털을 다는 것은 조류 숭배신앙에서 오는 고대 종교 즉샤마니즘적 요소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고려사』 세가(世家)36 충혜왕 후 3년 6월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甲寅幸示桿寺 燈燭輩結香徒設祝齋於是寺 王神座齋筵.여기의 향도(香徒)라는 것이 민중 불교 단체인 것으로 보아 연등의 샤머니즘적 요소를 감지하게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자 태종 원년 8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하여 재래의 팔관,연등을 없앨 것이 주청(奏請)되어, 2월 15일 연등 대신 정월 15일 수륙제(야<趣祭)가 열리게 된다. 상원 연등(上元燃燈)은 없어지게 되었지만 오늘날의 초파일 행사로서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민간 신앙과 함께 민중 속에 살아 전해지고 있다.

이 연등회는 신라의 팔관회에서 시작되어 고려 초에는 정월 보름과 2월 15일에 행하다가 최이(崔,1'끔)가 4월 초파일로 고정시켰다 한다 석가탄알의 속절화는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온 풍속과 습합된 것이라보여진다. 즉 신라 때 새해의 풍년 기원제가 정월 보름에 행해진 듯하고, 또 그 이전 시월제천(十月祭天)의 추수 감사제와 같은 성격의 행사로 보여진다. 농경 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태일성(太一星)이나 달에 기고하는 민간신앙이 매년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동국세시기z에 정월(正月)상원(上元)을 등절(燈節)이 러한 것은 좋은 방증이 되고 있고, 불교적인 의미가 퇴색된 채 민 속화하여 일반적인 등석(燈夕) 또는 아동 중심의 명절이 되었음을 최남선은 『조선상식』에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옛날의 휘황 찬란한 연등놀이나 제등 행사는 볼 수없고, 다만 1970년대에 이르러 석가탄알도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불교 신도들의 대대적인 연등 행사 대열이 도시의 거리나 각 사찰에서 이어 지고있다 관등놀이할 때 불려지던민요로 「燈打令」이 전해오고있다



얼종덜종 호랑등은

만첩청산 어디 두고

저리공중 걸렸느냐



물색 좋다 초록등온

황새장사 어디도 고

저기 높이 걸렸느냐



꼬부랑 꼽잘 새우등은 얼 멍이 구멍 왜마다하고저리공중 걸렸느냐

(下略)



Ⅲ. 결연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불교헌공 의례에서 민중들의 소망이 담긴 갖가지 민속을 살펴보았다. 기원 자는 부처님 전에 나아가 불을 밝히고 향을 지핀 다음 정성스레 달인 차를 올린다. 향.등.차가불.법.승삼보를 공양하는 목적으로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삼보는 무분별 평등(無分別平等)의일심(一,已,)이며, 공양은 무엇인가를 바쳐서 '참생명을 기른다'는 뜻이 있다. 우리 민중들의 의식 속에는 불교의 '진실된 참 생명 정신'과 민간의 풍속이 어우러져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정각도량 94/11



*참으로 어렵습니다.. 옮겨 오면서 이해하지 못하는부분이 많아 옮길까 말까 망설이다 이리 옮겨봅니다.


댓글목록

심자재님의 댓글

심자재 작성일

참으로 어렵습니다..맞습니다...286머리보단 몸으로 행해야함을 알면서도 맘대로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