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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날마다 좋은 날’/ 고우큰스님(다시 올립니다..아래파일이 깨져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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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상행 작성일10-07-19 21:21 조회3,05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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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날마다 좋은 날’/ 고우스님


“왕이 신하들에게 ‘너희들이 살아온 역사를 글로 적어오라’고 명령했다.
왕이 여러 사람들이 적어온 것을 공통점만 추려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태어나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다가 죽는다.’
(청중들을 바라보며) 여러분들만 고민을 가지고 있고 마음에 걸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외적인 조건만 좋았다 뿐이지 내면으로 들어가면 똑같다.
고민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한 셈이다. 그래서 (고통은) 외적 조건으로는 풀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을 나와 (고통을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여러 종교를 섭렵했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수행법을 배워 마음속이 아주 평안해지는 경지를 느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보면 여전히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독자적으로 수행을 해
‘나(我)’라는 존재를 깨닫게 됐다. 나라는 존재가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똑같은 원리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존재 원리는 당시나 지금이나 같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니 행복해졌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부처님께서는 작은 왕국의 왕으로 살 것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원리를 알려
갈등과 전쟁이 없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셨을 것이다.
만약 왕을 하셨다면 역사 속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행복을 찾기 위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순간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되면 행복할 것인가. 아마 당선될 때 정도가 행복하지 않을까.
그 뒤로는 고통의 연속이며 퇴임 후에는 더 큰 불행이 찾아온다.
반면 중국의 운문스님은 부처님 행복은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했다.


불교는 자율의지를 강조한다. 잘못한 것도 자신의 자율의지에 의해서이며
이를 고쳐서 바로 쓰는 것도 자율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존재 의미도 자율의지와 연관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평범’하며 ‘우리와 같다’.
그분의 위대한 점은 그 원리를 발견했다는데 있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도 있다.
<금강경>은 존재 원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공통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세상의 존재는 9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태’ ‘알’ ‘습지’ ‘화’에다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다.
이 지구상 모든 존재가 똑같은 원리로 존재한다.
이것을 알면 환경 빈부 정치 전쟁 등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알게 된다.


절에 많이 가고 머리 깎고 승복입고 있다고 해서 불자는 아니다.
불자 여부는 ‘생각’이 결정한다. 선종(禪宗)에서는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중국의 마조스님에게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불법을 구하려 합니다.” 그러자 마조가 이렇게 말한다.
“자기의 보배창고(寶藏)는 살피지 않고서 왜 자꾸 밖으로 찾아다니느냐.”


불교는 여러분이 갖고 있다. 나한테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대주가 마조에게 절하고 묻기를 “무엇이 저 혜해(慧海)의 보배창고입니까?”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묻는다. ‘여러분에게 있는 보물 창고가 무엇이냐.’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다.

마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묻는 바로 그 놈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답한다.
‘듣고 있는 바로 여러분이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다.
이것을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어떤 일을 하든 역기능이 없고 순기능만 생긴다.


이 원리를 이해한 사람 중에 유마거사가 있다.
부처님의 제자인 수보리가 유마거사를 찾아가 탁발을 하니 유마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육도외도에 떨어져야 내 밥을 얻어먹을 자격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외도(外道)여야 밥을 준다니 무슨 말인가. 존재 원리를 알면 불교든 기독교든 회교든
어디가든 상관없이 갈등 없이 어울려 살 수 있다.
내 존재 원리를 알면 어디가든 갈등 전쟁이 없어지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욕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땀을 식히러
바라문의 마을로 가서 나무 밑으로 들어가는데 한 바라문이 침을 뱉고 욕을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웃으며 나오셨다. 바라문 마을과 달리 다른 마을에서는
선물을 주며 환대했지만 부처님은 받지 않으셨다. 한 바라문이 왜 욕을 하는데도
웃으면서 나오느냐고 묻자 부처님이 이렇게 답한다.
‘좋은 선물도 짐이 돼 안 받았는데 안 좋은 선물을 왜 받겠는가.’


화려한 삶을 산다는 연예인들이 잇따라 자살하는데 무엇이 그들을 자살로 몰아가는가.
우리들의 삶은 예전에 비해 훨씬 풍족해지고 화려해졌는데 왜 마음은 삭막하고 각박해졌는가.
내가 아는 어느 식당 주인의 예를 들어 행복을 생각해보자.
영주 시내 사는 그 분은 바빠서 절에 자주 못 왔지만 절과 스님 봉양을 잘했다.
그래서 어느 날도 절에 잠시 와서 바삐 가는 것을 붙들어 놓고 말했다.
‘장사하면서 도 닦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시험해보고 실제로 효과가 있으면 불교 공부 좀 해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식당 손님을 돈으로 보지 말고 나의 은인으로 생각해라.’
왜냐하면 손님 때문에 집도 사고 아이들 공부도 시켰으니 은인 아닌가.
생각이 바뀌면 손님이 어떻게 보이겠나. 건성으로 하던 인사도 진심을 담아 하게 되고
반찬에도 더 정성이 담기게 된다. 그러니 손님들이 맛있다고 더 찾게 되는 것이다.
얼마 뒤 그 사장이 장사가 아주 잘된다며 찾아왔더라. 이것이 불교다.
손님을 돈 벌이가 아니라 은인으로 보는 것이 실제로 제대로 보는 것이다.
불교는 이처럼 생활 속에서 찾는 것이다. 생활을 떠나 불교를 찾는 것은 ‘토끼 뿔 찾는 것’과 같다.


(여러분) 생각에 따라서 운명이 바뀐다. 기업가가 노동자를 돈벌어주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의 은인으로 생각하면 노동자도 그 마음을 알아 회사를 위해 더 일한다.
노동자가 능력 있는 사장 덕분에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일이 더 즐거워진다.
세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주장을 많이 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사고다. 불교는 절대적인 긍정을 말한다. 생각이 곧 내 생활이고 운명이다.
사람들의 본바탕은 절대 나쁘지 않다.
다만 착각과 오해로 인해 그것을 제대로 못 꺼내 쓰는 것일 뿐이다.


행복을 못 찾는 첫째 이유는 밖에서 찾기 때문이다. 내안의 보물을 두고 밖에서 맴도는 것이다.
보물 창고는 보고 듣는 바로 그놈이다.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원래 ‘그것’은 맑고 깨끗했는데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면서 오염이 되었다.
그것이 착각과 오해임을 알면 오염된 것이 정화가 된다.
불교에서는 이를 법성이라고 하고 자성이라고 한다. 둘째는 집착이 나를 괴롭힌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 원리를 알게 되면
이것을 사랑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스님은 결론에서 “공(空)을 알게 되면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본질을 보게 된다”며
“남을 차별도 하지 말고 남과 비교도 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함을 알면
행복하고 마음도 안정되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 불교신문 2640호/ 7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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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무상행님의 댓글

무상행 작성일

어디서 에러가 났는지..
다시 올림니다..ㅠ

혜안등님의 댓글

혜안등 작성일

생활속의 법문을 명쾌하게 해 주시던 고우스님의 말씀을 또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어 정말 좋습니다.
늘 우리 도반님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좋은 법문 올려주시는 무상행님덕분에
오늘도 한가지를 깨치고 배워봅니다. 날마다 좋은 날 ! 날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