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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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상행 작성일10-07-12 23:47 조회3,012회 댓글3건본문
신행의 의미
대승불교에서는 실천 수행의 단계를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신(信)·
해(解)·행(行)·증(證)이 그것이다. 신(信)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믿는것이고,
해(解)는 자신이 믿고 있는 가르침은 어떠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이해하
는 것이며, 행(行)은 믿고 이해한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실천하는
것이고, 증(證)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달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단계 중에서 믿음[信]과 이해[解]의 관계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입장이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중요시하고,대승불
교는 이해보다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로부터 인도의 종교가나 사상가들은 세 가지 범주로 종교나 사상을 분류했다.첫째
는 '의례의 도'이다. 희생이나 예배 또는 고행 등으로 성립되는 종교를 가리킨다.둘째
는 '지혜의 도'이다. 종교의 지적 부분 내지 지식을 중심으로 성립하는 종교를말한다.
셋째는 '신앙의 도'이다. 절대귀의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가리킨다. 이 세가
지 가운데 초기불교는 '지혜의 도'에 해당되며, 후기의 대승불교는 '신앙의 도'에해당된
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그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보고·알고·이해함을 강조하고 있다.불교의
경전에는 일반적으로 '신앙' 혹은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saddh , Skt. raddh)'라는
낱말이 있다. 하지만 삿다(saddh )는 맹목적인 '신앙'이기 보다는 오히려 신념에서나
온 '확신'에 가깝다.
초기불교에서는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붓다의가르침
은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어라'고 하는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관해 언급한 불교 경전의 도처에서 사용된 표현법은 "티끌없고
더럼 없는 진리의 눈(法眼, Dhamma-cakkhu)을 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에도달
했고,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파악했으며, 의혹을 건너서 흔들림이 없다." "이와같이 올
바른 지혜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본다." 깨달음은 언제나 지식 혹은 지혜(a-dassana)
를 통해 보는 것이지, 신앙을 통한 믿음이 아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한결같이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초
기불교가 이러한 성향을 띄게 된 것은 '개인의 도'와 '지혜의 도'에 초점을맞추었기 때
문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대중의 도'와 '신앙의 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다소
맹목적인 믿음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마스다니 후미오 박사에 의하면, '지혜의 도'에서 출발한 초기불교가 짊어지고 있던최
대의 제한 또는 모순은 그것이 '소수인의 도'라는데 있었다. 즉 "이 가르침은슬기로운
자(智者)에게 맞는 것이며, 어리석은 자(愚者)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대승불
교에서는 개인의 도가 아니라 대중의 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는 자기형성에전
념하는 '소수의 도'이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광대한 도',혹은
대중과 더불어 탈 수 있는 '큰 수레'(大乘)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결국대승불교
는 '대중의 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대승불교도의 입장에 대해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다음과 같이말
했다. "재가신도는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 초월적지혜의 방
법에 귀의(Bhakti)의 방법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나가르주나(N g rjuna, 龍樹)는어렵
고 힘든 '지혜'의 방법과 쉬운 '믿음'의 방법을 구별했다. 그 둘은 모두 같은목적지로 이
끌어간다. 그것은 마치 바다로 가든, 육지로 가든 동일한 마을을 여행할 수 있는것과 같
다. 어떤 사람들은 활기차고 엄정한, 명상을 필요로 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어떤사람들
은 귀의라는 도움 수단[방편]을 손쉽게 행함으로써, 즉 붓다의 이름[佛名號]를부르면
서 붓다를 생각함으로써 '물러서지 않는 자리[不退轉位]', 즉 완전한 깨달음에이르리라
는 확신을 갖고 그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위에 곧바로 다가설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믿음이 부차적인 덕이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와 동등한 위치를차
지하게 되었다. 믿음의 구제력은 옛 학파들이 추정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다.인류가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자기훈련과 활력이 필요한'지혜라는 힘
든 방법'은,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승려들 일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적당치않았
다. 이러한 여건에서, 손쉬운 믿음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길이었다.
이러한 사상사적(思想史的) 과정을 거쳐 대승불교에서는 믿음이 지혜와 자비의실천에
있어서 불가결한 제일의 덕목이 된다. 특히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면 믿음의중요성은
극치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권 화엄경의 현수품(賢首品)에 나오는 다음의게송
(偈頌)이다.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일체의 모든 착한 법[善法]을 길러내고,
의심의 그물을 끊어 제거하고, 애욕에서 뛰어나며,
열반의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열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대승불교의 믿음에 관한 사상의 근거를 초기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經集)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다."<182>
"사람은 무엇으로 (생사의)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무엇으로 바다를 건너며,
무엇으로 고통을 극복합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습니까?"<183>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써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지혜로써 완전히 청정해진다."<184>
위 게송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도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이아니
라 지혜의 증장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하는 기본 전제로서의기능이었
다. 하지만 나중에는 '절대 확실한 믿음'이라는 사불괴신(四不壞信)으로 확립된다.사불
괴신이란 불(佛)·법(法)·승(僧)·계(戒)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말한다. 이것이갖추어질
때 비로소 불교적인 세계관·인생관에 투철하여 의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오른
자를 최하위의 성자로 간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
訥, 1158-1210) 스님은 그의 저서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있으
나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무명(無明)만 증장(增長)하고, 이해는 있으나 참다운믿음이
없으면 삿댄 견해만 증장한다. 그러므로 알라. 믿음과 이해가 서로 겸해야만도(道)에 들
어감을 빨리 얻는다."라고 했다.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대해 이보다 더 명쾌하게설명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믿음과 이해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올바
른 실천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또한 옛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있으되실천
이 없으면 마치 눈은 있는데 다리가 없는 것과 같고, 실천은 있으되 믿음이 없으면마치
다리는 있는데 눈이 없는 것과 같고, 믿음과 실천이 둘 다 온전하면 마치 밝은 눈과건강
한 다리와 같아서 능히 천리를 갈 수 있다."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에서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법구경(法句經)대구(對句)의 장
(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록 많은 경전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 수행하지 않으면,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세는
목동과같나니, 수행자로서의 아무런 이익이 없다."<제19게>
"비록 경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법을 잘 수행하여 번뇌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현재와 미
래에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참된 이익이다. 그는 그것을 다른이들과
나눈다."<제20게>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스스로 실천하여 얻는 바가 없다면아무
런 소용이 없다. 마치 종일토록 남의 돈을 세는 것과 같이 자신의 이익이 되지못한다.
불교에서 일관되게 실천을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오직
자신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열반을 증득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 vijj cara asam-panna)이란
이름이 있다. 팔리어 윗짜(vijj )는 지혜[明]이고, 짜라나(cara a)는 실천[行]이며,삼빤
나(sampanna)는 갖춤[具足]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명행족은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분, 즉 앎과 실천을 두루 갖춘 분이란 말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언행(言行)이일치했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과 실천하는 발[智目行足]을 갖추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불교도가
되며, 그때 비로소 크나큰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실천 수행의 단계를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신(信)·
해(解)·행(行)·증(證)이 그것이다. 신(信)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믿는것이고,
해(解)는 자신이 믿고 있는 가르침은 어떠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이해하
는 것이며, 행(行)은 믿고 이해한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실천하는
것이고, 증(證)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달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단계 중에서 믿음[信]과 이해[解]의 관계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입장이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중요시하고,대승불
교는 이해보다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로부터 인도의 종교가나 사상가들은 세 가지 범주로 종교나 사상을 분류했다.첫째
는 '의례의 도'이다. 희생이나 예배 또는 고행 등으로 성립되는 종교를 가리킨다.둘째
는 '지혜의 도'이다. 종교의 지적 부분 내지 지식을 중심으로 성립하는 종교를말한다.
셋째는 '신앙의 도'이다. 절대귀의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가리킨다. 이 세가
지 가운데 초기불교는 '지혜의 도'에 해당되며, 후기의 대승불교는 '신앙의 도'에해당된
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그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는 처음부터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보고·알고·이해함을 강조하고 있다.불교의
경전에는 일반적으로 '신앙' 혹은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saddh , Skt. raddh)'라는
낱말이 있다. 하지만 삿다(saddh )는 맹목적인 '신앙'이기 보다는 오히려 신념에서나
온 '확신'에 가깝다.
초기불교에서는 언제나 앎과 봄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붓다의가르침
은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지, '와서 믿어라'고 하는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관해 언급한 불교 경전의 도처에서 사용된 표현법은 "티끌없고
더럼 없는 진리의 눈(法眼, Dhamma-cakkhu)을 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에도달
했고,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파악했으며, 의혹을 건너서 흔들림이 없다." "이와같이 올
바른 지혜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본다." 깨달음은 언제나 지식 혹은 지혜(a-dassana)
를 통해 보는 것이지, 신앙을 통한 믿음이 아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한결같이 믿음보다는 지혜를 통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초
기불교가 이러한 성향을 띄게 된 것은 '개인의 도'와 '지혜의 도'에 초점을맞추었기 때
문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대중의 도'와 '신앙의 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다소
맹목적인 믿음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마스다니 후미오 박사에 의하면, '지혜의 도'에서 출발한 초기불교가 짊어지고 있던최
대의 제한 또는 모순은 그것이 '소수인의 도'라는데 있었다. 즉 "이 가르침은슬기로운
자(智者)에게 맞는 것이며, 어리석은 자(愚者)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대승불
교에서는 개인의 도가 아니라 대중의 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는 자기형성에전
념하는 '소수의 도'이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광대한 도',혹은
대중과 더불어 탈 수 있는 '큰 수레'(大乘)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결국대승불교
는 '대중의 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대승불교도의 입장에 대해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다음과 같이말
했다. "재가신도는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 초월적지혜의 방
법에 귀의(Bhakti)의 방법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나가르주나(N g rjuna, 龍樹)는어렵
고 힘든 '지혜'의 방법과 쉬운 '믿음'의 방법을 구별했다. 그 둘은 모두 같은목적지로 이
끌어간다. 그것은 마치 바다로 가든, 육지로 가든 동일한 마을을 여행할 수 있는것과 같
다. 어떤 사람들은 활기차고 엄정한, 명상을 필요로 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어떤사람들
은 귀의라는 도움 수단[방편]을 손쉽게 행함으로써, 즉 붓다의 이름[佛名號]를부르면
서 붓다를 생각함으로써 '물러서지 않는 자리[不退轉位]', 즉 완전한 깨달음에이르리라
는 확신을 갖고 그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위에 곧바로 다가설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믿음이 부차적인 덕이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와 동등한 위치를차
지하게 되었다. 믿음의 구제력은 옛 학파들이 추정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다.인류가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자기훈련과 활력이 필요한'지혜라는 힘
든 방법'은,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승려들 일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적당치않았
다. 이러한 여건에서, 손쉬운 믿음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길이었다.
이러한 사상사적(思想史的) 과정을 거쳐 대승불교에서는 믿음이 지혜와 자비의실천에
있어서 불가결한 제일의 덕목이 된다. 특히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면 믿음의중요성은
극치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권 화엄경의 현수품(賢首品)에 나오는 다음의게송
(偈頌)이다.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일체의 모든 착한 법[善法]을 길러내고,
의심의 그물을 끊어 제거하고, 애욕에서 뛰어나며,
열반의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열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대승불교의 믿음에 관한 사상의 근거를 초기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經集)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다."<182>
"사람은 무엇으로 (생사의)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무엇으로 바다를 건너며,
무엇으로 고통을 극복합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습니까?"<183>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써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지혜로써 완전히 청정해진다."<184>
위 게송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도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이아니
라 지혜의 증장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하는 기본 전제로서의기능이었
다. 하지만 나중에는 '절대 확실한 믿음'이라는 사불괴신(四不壞信)으로 확립된다.사불
괴신이란 불(佛)·법(法)·승(僧)·계(戒)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말한다. 이것이갖추어질
때 비로소 불교적인 세계관·인생관에 투철하여 의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오른
자를 최하위의 성자로 간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
訥, 1158-1210) 스님은 그의 저서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있으
나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무명(無明)만 증장(增長)하고, 이해는 있으나 참다운믿음이
없으면 삿댄 견해만 증장한다. 그러므로 알라. 믿음과 이해가 서로 겸해야만도(道)에 들
어감을 빨리 얻는다."라고 했다.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대해 이보다 더 명쾌하게설명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믿음과 이해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올바
른 실천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또한 옛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있으되실천
이 없으면 마치 눈은 있는데 다리가 없는 것과 같고, 실천은 있으되 믿음이 없으면마치
다리는 있는데 눈이 없는 것과 같고, 믿음과 실천이 둘 다 온전하면 마치 밝은 눈과건강
한 다리와 같아서 능히 천리를 갈 수 있다."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에서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법구경(法句經)대구(對句)의 장
(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록 많은 경전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 수행하지 않으면,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세는
목동과같나니, 수행자로서의 아무런 이익이 없다."<제19게>
"비록 경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법을 잘 수행하여 번뇌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현재와 미
래에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참된 이익이다. 그는 그것을 다른이들과
나눈다."<제20게>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스스로 실천하여 얻는 바가 없다면아무
런 소용이 없다. 마치 종일토록 남의 돈을 세는 것과 같이 자신의 이익이 되지못한다.
불교에서 일관되게 실천을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오직
자신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열반을 증득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 vijj cara asam-panna)이란
이름이 있다. 팔리어 윗짜(vijj )는 지혜[明]이고, 짜라나(cara a)는 실천[行]이며,삼빤
나(sampanna)는 갖춤[具足]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명행족은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분, 즉 앎과 실천을 두루 갖춘 분이란 말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언행(言行)이일치했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과 실천하는 발[智目行足]을 갖추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불교도가
되며, 그때 비로소 크나큰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목록
무상행님의 댓글
무상행 작성일
이번주에 ..
신행에 대해서 강의가 있겠지요...
이런 내용일런지..
알수는 없지만..ㅎㅎ
혜안등님의 댓글
혜안등 작성일
지혜의 눈과 실천하는 발을 갖추고자 불교대학을 다니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주 7월 15일(목)에는 성공스님의 "불교의 이해와 신행" 시간이며 1,2학년 합동수업일입니다.
종강도 얼마남지 않았으니 1학기 마지막 까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봅시다.
날마다 축서사 홈을 위하여 애써주시는 무상행님께 거듭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보현반장님의 댓글
보현반장 작성일
늘~ 잘 보고 있어요.
무상행 반장님 .. 요즘 넘 열심히 하시는것 같아요..
본받아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목욜날 뵈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