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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본래 제 성품 닦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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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상행 작성일10-07-22 23:15 조회3,00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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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본래 제 성품 닦는 것
 
 
공부가 도(道)를 이루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나 부려 서로 이기려고 한다면
변소(便所)에 단청(丹靑)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 <선가귀감 55>
주해(註解): 말세(末世)에 어리석게 공부하는 것을 특별히 일깨우는 말이다.
공부란 본래 제 성품을 닦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생각일까!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다면
변소에 단청하는 격이 돼

사족(蛇足): 절을 한다든가, 경을 본다든가, 또는 참선을 한다든가,
이런 것들이 모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한 경우는 없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내가 삼천 배를 열 번이나 한 사람이야.”, “내가 참선을 이십 안거를 난 사람이야.”,
 “내가 금강경을 달달달달 외우는 사람이야.” 이런 생각, 이런 표현이야말로
변소에 단청(丹靑)하는 격이 되고 만다.
 
여기 보면 전습위인(全習爲人)이라는 표현이 있다. ‘온전히 남을 위해서 닦는다’는 말이다.
수행자가 안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겉으로 떠벌리게 마련이다.
우리 속담에도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자기 마음속이 충실한 사람은 밖으로 떠벌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속이 허한 사람은 자꾸 밖에 관심을 두게 마련이다.
남의 살림살이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 남의 허물을 보는데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
 이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기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부실한 사람이다.
 
자기 마음의 살림살이가 충실한 사람은 지금 내 마음공부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남의 마음공부 시켜줄 겨를이 있으랴? 자기
마음도 자기가 닦기 어려운데 남의 마음까지 닦아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부는 남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공부도 아니고,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공부도 아니고, 스스로 자기 마음의 살림살이를 충실하게 해 가는 공부다.
 
자기 마음의 상태, 공부의 상태, 또 앞 일 이것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보다 스스로를 더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바깥의 것들에 자꾸 끄달리다 보니까,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밖에 대한 관심, 반응 이런 것들을 일시적으로라도 쉴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분별심을 쉰다”고 하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나다 남이다, 이렇게 둘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전부 “분별심”이다.
그 분별심을 일시적으로라도 쉬게 되면, “분별력이 오히려 증장(增長)”한다.
밖의 살림살이에 일시적으로 쉬니까 내부의 살림살이가 충실해지는 것이다.
 
남의 마음, 남편 마음, 아이들 마음, 부인 마음, 닦아 주려고 안달하지 말고,
내 마음부터 닦자. 내 마음부터 닦아서 궁극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불자의 자세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행복의 충만함을 느끼고,
 남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창조자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불자라면 행복을 창조 당하는 이가 되지 말고, 행복을 창조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댓글목록

도안문님의 댓글

도안문 작성일

혹여 제가 그런 일들을 한지 뒤돌아보아집니다.
빈수례가 요란하다지요..
속이 허한 사람음 밖으로 자꾸만 외쳐된다는 말씀도 역시 옳은 말씀입니다.
나를 한 번 돌아보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