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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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상화 작성일12-05-25 02:02 조회2,751회 댓글0건본문
까털복숭아나무는 이른 봄 연한 잎을 내며 화창한 봄날 화려한 분홍 꽃을 피우고 변덕스런 봄비바람에 우수수 한바탕 꽃잎을 떨구고, 여름내 푸르렀다 가을 찬바람에 잎이 져 한겨울 소복이 흰 눈꽃 덮는 날 숨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다음 해 새 봄에 다시 싹이 터 오르겠지요. 생명은 이렇게 생멸(生滅)과정을 거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며 이어갑니다. 바위나 구름이나 무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자연이 계절의 조건에 따라 눈에 보이게 변화한다는 것은 알기도 믿기도 쉽지만 우리 자신의 육체도, 마음도 찰나 순간 나고 머무르고 무너져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이렇게 무상한 변화를 거듭한다는 사실을 알기도 어렵고, 또 믿기는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나는 오늘도 내일도 바로 같은 ‘나’라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딱히 어느 한 순간을 붙잡아 ‘나’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고정된 모습으로의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눈에 보이는 이 몸이 ‘나’라고 믿고 이 몸을 아껴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로 오늘도 거울 앞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치장을 하면서 만족스러워 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볍게는 피부 관리부터 심한 경우 반복적이고 강박적이고 그 결과 중독성이 강한 성형수술 까지, 자신이 꿈꾸는 ‘나’의 허상을 만들고 부수기를 마치 모래성을 쌓고 허물듯 합니다. 나 이외의 신을 믿지 말라하신 한 성인의 말씀의 본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나 본래 변하고 불만족스러운 ‘나’를 새롭게 변함없는 모습의 만족스러운 ‘나’로 만들고자 하였으니, 불만족스러운 자신에 대한 불안은 세세생생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뭔가 계속 손을 보지 않으면 밖으로는 타 존재와의 비교 경쟁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내적으로는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육체를 ‘나’또는 ‘내 것’이라고 스스로 너무나 사랑하여 굳게 믿고 붙잡아 집착하지 않으면 추하게 늙고 변하여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 같은 공허함으로 인한 존재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이 생멸과정일 뿐이라는 진실 이외의 상을 만들어 향수를 뿌려 공양하는 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영원히 존재하고자 하는 본래적 생명 지속의 욕구가 우리의 근본 고통의 뿌리임을 바라봅니다. 그 ‘나’에 대한 유지 욕구에 대해 집착하여 놓지 않음이 또한 근본 고통의 뿌리임을 봅니다. 이 육체가 ‘나’이고 ‘나’란 이렇게 실재한다고 잘못 알고 믿는 것이 근본 고통의 뿌리 중의 뿌리임을 깊게 바라봅니다.
찰나 한 순간도 생멸의 반복일 뿐이니 그 한 순간 틈새 속에 영원히 실재하는 ‘나’, ‘내 몸’은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집착을 내려놓을 때, 존재의 근본 고통이란 본래 없었음을 증득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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