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11/15<불교문화 8> 강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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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상화 작성일12-11-23 00:04 조회3,220회 댓글1건본문
불교문화 8 강의 요약 보고서
강의 제목 : 불교문화 8
강사 : 최영식 교수님
강의일자 : 11월 15일
대구보다 확실히 춥다. 여기는 겨울이 벌써 온 듯. 지난주 다 못한 석굴 사찰에 대한 이야기.
<한국의 석굴 사찰>
인도의 초기 불교 가람에서부터 시작한 형식. 가람은 스님들이 사는 집, 성원, 성.
- 두 종류
1. 탑원굴: 차이트야. 전면은 네모난 방, 장방형, 내부는 원형. 경주 토함산 석굴암.
2. 승원굴: 비하라. 중앙 사각형 굴실 두고 주위에 작은 굴실 배치. 스님들의 주 거처 및 수행처.
우리나라는 단단한 화강석. 1,300년 전 도구로 화강석 판다는 것 불가능. 그래서 경주 석굴암은 말이 굴이, 파고 들어간 게 아님. 산허리에 토함산 500m 약간 능선, 평지가 있는 곳에 정리, 굴처럼 덮음.
중국은 화강석 아닌 사암. 모래가 단단해 진 곳. 수행하고 있으면 또 다른 스님이 옆으로 또 파고 들어감. 비하라는 혼자 들어가 앉아 수행하는 곳. 중국 돈황 기준으로 그런 석굴이 2,000개가 넘음.
우리가 알고 있는 석굴암 외 제2석굴암이 있다는 것은 잘 못 암. 부개(?)에 가면 삼존석불. 자연 구멍에다가 부처님을 모신 것. 불자들끼리 소문. 공식 명칭은 석굴암 아님. 토함산 보다 100살 정도 더 오래되었음. 앞 네모난 방있고 안에 둥근 방, 그 사이에 복도, 짧은 복도를 비도라 함. 그 둥근 방에 부처님 모심. 이 스타일이 차이트라. 인도나 중국 스님들이 수행하던 작은 굴은 비하라.
우리나라 석굴암 하나밖에 없을까 의구심. 1,300년 전. 과연 우리나라 석굴암 하나밖에 없을까?
토함산 석굴암은 전방후원형. 탑원굴. 약 1,300년 전 8C 중엽 김대성에 의해 조형. 석굴암의 정면은 동해를 바라보고 있음. 동짓날, 해가 뜰 때 제일 먼저 부처님 얼굴 비치게 방향을 잡아놨음. 일 년 중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을 때가 동지. 건축하는 사람들 건물 설계할 때 고층 아파트 지을 때 뒷동이 앞동에 가리어 그림자 추움. 최소한 뒷집 하루에 햇빛이 4시간 이상 들어가게 해줘야 법적으로 괜찮음. 그런데 1,300년 전 어떻게 동해안 해 뜰 때 가장 고도가 낮을 때 그 시절에 부처님 딱 비추도록 했을까. 1~2년 만에 됐겠는가? 23년 걸렸다. 불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751년부터 약25년, 정확히 23년 동안 건축. 굴을 파서 만든 게 아님. 부처님 모시고 옆에 십대제자 조성해서 그 곳을 덮음. 나중에 흙. 궁륭穹隆. 요새 말로 돔(dome)건축이라. 돔 천장형 둥글게. 요즘은 어렵지 않지만 그 전 기술로는 대단함. 온도, 습도 자연히 조절, 물방울 하나 안 맺히도록. 중간에 병이 나버림.
지금은 안타깝게도 인공적 실내 환경 조절, 일 년 내내 온도 20°, 습도 50°. 들어가서 부처님 만지면 사람 피부 같다. 징으로 쳤을 텐데, 요즘은 갈아내는 열 기계 있지만, 1,300년 전 보통일이 아니다. 그것도 하얀 화강석. 치면 칠수록 색깔이 하얘짐.
여기는 경주, 토함산, 앞에 불국사, 동쪽을 바라보는 쪽 석굴암이 해발 약 500m 자리 잡고 있음. 석굴암 본존에 석가불좌상을 보면 연화대좌 높이 약 1.6m, 항마촉지인, 기단의 최하부가 3.7m, 본존불 높이 3.4m.
지금 서서 사진 찍은 모습, 높이별로 부처님 표정이 다 다르다. 선 자세에서 봤을 때 가장 근엄한 모습. 방향, 위치, 높이에 따라. 감실에 빙 돌아 여러 분 모심. 딱 두 군데 제일 앞 쪽 비어있음. 도둑맞음.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음.
천장 한 가운데가 균열. 처음 만들 때부터. 본존불은 화강석에 조각. 늘 우리 짱돌 생각. 워낙 많아 개념 없지만 서양에 나가면 우리나라 돌 대단함.
높이 약 3.4m, 어깨 드러낸 옷 주름으로 불상에 생명감 주고 있음.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눈을 아주 가늘게, 대단하고 자비로운 표정. 항마촉지인, 왼손은 선정인, 오른손 무릎에 걸친 채 검지손가락 땅을 향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나타낸 모습이기 때문에 성도상이다.
1901~1951년 까지 이 대 불상은 이렇다. 오만 새들이 똥싸고 청태 끼어 엉망.
다음은 구한말 석굴암 지붕, 지붕을 덮어 둠. 1910년 나라 잃고 그 당시 토함산 동해바라보고 있는 석굴사(당시), 당시는 가려면 상당히 힘듦. 박정희대통령 때 길 냄. 1960년 말 까지 토함산 걸어 올라가야 했음. 일본 우체부가 우편물을 배달하고 보니까 그 앞 절 있는데 무언가가 무너져있음. 조선총독부에 보고를 함. 토함산 조사 시작. 현장 기사를 내려 보냄. 젊은이. 일본 고교토목과 졸업한 사람.
일본은 2차세계대전서 벙커, 탱크 들어가는 기술 좋음. 이리저리 끼어 맞춤. 처음부터 콘크리트 아님. 3년 동안 시도, 실패. 결국 두께 90cm 철근콘크리트. 폭탄이 떨어져도 안 깨짐. 거기다가 십대제자상들 하나씩 붙임. 그 때부터 석굴암 숨을 못 쉼.
그 전 본존불과 십대제자 모시고 돌로 덮음. 햇빛 잘 비침, 그 돌 틈 사이로 미세하게 환기. 전혀 이끼 끼지 않음. 조립과정 중 망침. 나라를 빼앗긴 이유와 우리가 보존을 잘못한 이유.
다 허물어졌을 때의 사진. 일본사람들 찍은 사진. 지금 모양보다 오히려 허물어졌지만 원상태 보존. 이런 돌들 보임. 굴이 아니라 만들어 덮었다.
1913년 일본인 콘크리트 다시, 앞이 바로 동해. 이때쯤 해무가 불어 산으로 올라 옴. 물기, 이끼 낌. 청태도 연하지만 뿌리 있어 뜯으면 화강석도 뜯겨 나옴. 돌에 곰보 생김. 하다가 안 되니 나중에 뜨거운 증기 쐬어 청소. 많이 망쳐 놓음.
1963, 64년 우리 손으로 다시 정리 모습. 이미 일본인 원형 훼손. 콘크리트 붙어 지금도 현재 기술로는 손 못 댐. 자칫 조각상들 다칠 수 있다.
석굴암 올라가는 길, 제 자리를 못 찾아간 석재. 저 돌들이 다 들어갔다면 지금의 모양이 될 수 있었을까. 돌이 상당히 많음. 올라가다 왼 쪽. 이 돌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디쯤 들어가 있을까 생각해 보시라.
1917년 일본인들 보수를 완전히 끝내고 난 다음 모습. 기차 터널, 굴 같다.
1963년 우리 다시 복원. 그 당시 문화재관리국. 작년 돌아가신 황수영박사 석굴암에 푹 빠진 분. 목조 팔작 기와지붕 전실 앞 만듦. 지금은 참배객들 여기까지만 들어감. 나머지 유리로 막음. 뒤쪽 사진. 그 아래는 콘크리트. 단면도로 보면 조금 쉬울 듯. 앞 쪽 인공 환기조절. 기계로 뚫어보니 90cm.
예술성은 몰라도 일본 토목 기술 대단. 원형대로 복원하려니 콘크리트 뜯어내는 것이 숙제로 남음. 돌아가며 십대제자와 사천왕 등 조각.
키 160cm정도 사람이 불산 높이의 3배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면 뒤에 광배 보임. 이 법당의 사진 찍은 각도가 좀 더 낮아야. 부처님 머리 뒤에서 빛이 나야. 조각가가 고려해서 높이 등을 만듦. 그 외 실측 자료 참고.
여기 부처님 계시고 뒤에 보살입상 2,3번에 서 있고 특히 십일면관음입상이 바로 뒤에 서있음. 옆 공기 정화 기계실에서 공기 불어 넣음. 창 밑 아래, 또 한 군데는 부처님 앞에, 뒤에 만듦. 공기가 되돌아 나가는 곳. 뒤에 가로*세로=75cm*75cm 365일 안 쉬고 돌아가도록. 십일면관음입상 바로 앞에 공기 구멍. 부처님도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정말 아름다움. 다른 조각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뛰어남. 약간 웃음 지음. 손가락, 발가락 섬세함. 우아한 높은 연화좌 차별. 지금 일반 참배객들 못 들어감. 유감.
내부배치도. 전방, 네모난 방, 후원, 둥근 방, 연결은 비도, 전방후원. 십대제자 죽 있고 십일면입상 있고. 나와서 보면 옆에 자세히 보면 철문, 기계실, 통풍기 공기 넣어줌. 벨트 자주 교체. 안에는 소음. 언젠가는 없어져야. 자연 그대로 가야.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 위해 불국사, 전생 부모 위해 석굴사 만들었다 함. 창건 후 신림과 표훈 두 선사 머무르게 함.
일본에는 교회 찾아보기 힘듦. 성당은 남쪽 나가사키에 많음. 카톨릭 들어 옴. 95%이상 일본인들은 불교. 꼭 백제시대 연상 됨. 절이 산에 있지 않고 동네에 있음. 지금 교회나 첨탑들이 동네 있듯이. 그들이 한국 와 보니 대단한 걸 발굴.
일제시대 보수 공사 후 1912~1915년 약 3년 간 그들 나름대로 대규모 보수공사.
1. 첫 번째 수복 때 붕괴 직전 상태
천장 새서 비, 흙에 반 이상 다 묻힘.
2. 보수 후에도 비 샘. 그 후 콘크리트 사용 보수. 부처님 완전히 갇혀있음.
3. 외면상 수리, 복원 불가능. 파괴시키는 결과. 50년, 100년 쯤 후면 기술 있지 않을까.
4. 본존불 아래 찬 물이 흘러가게 해야. 그래야 결로 생기지 않음.
해방 후 우리가 1961~63년까지 63년 때 제일 공사 많이 함. 또 콘크리트 침. 지금은 부처님 이중으로 갇혀있음. 국보24호.
처음에는 통풍구조 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바람 잘 통함. 원래 유리 같은 것 없었다. 본래 개방, 열린 구조. 직경 수 십cm 돌들이 지붕 천개석, 부처님 머리 위 천장 위 1m정도 쌓여 있음. 대단했음. 독특한 덮개, 얼기설기 돌 틈 숨 자연스럽게 쉼. 다공층 구조물. 공기층 함유, 안 밖 공기 수시로 통하도록.
원래 숨 자연스럽게 쉬고 하루 종일 햇빛, 물방울 맺히지 않음. 혹시 싶어 발 아래 차가운 물 흘러가도록. 부처님 윗부분과 아랫부분 온도 차이 생김. 온도차이가 생기면 공기는 움직임. 여기가 20°, 아래가 10°도이면 온도 차이가 크면 클수록 공기 이동 빨라짐.
봉화에는 아직 전통 주택. 방바닥 뜨끈함. 옛날 천장은 서늘. 요강 꽝 꽝 얾. 요즘 아파트는 바닥 난방, 우리 집 위 천장도 윗집 바닥이어서 난방. 들어가면 얼굴부터 후끈. 안 좋음. 머리는 차가워야. 위나 아래나 온도 차가 안 남. 전통 한옥은 17° 차이가 남. 창문 한지 숨을 쉼. 유리창은 못 쉼. 공기 중 습기 빨아 들임. 실내 방안 뜨끈하면서 공기가 빙글 돌게 됨. 그 때 한지 머금고 있는 습기를 방 안에 내어 줌. 건강에 제일 좋은 습도는 50%. 겨울 아파트 방안 20° 안 됨. 맨날 감기. 요즘 침대 사용. 방 아래 60cm 가장 건조. 10%도 안 됨. 딱 침대 높이 이다. 코, 기관지 다 마름.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온돌. 석굴암. 1,300년 전 적용해서 바닥에 차가운 물 지나도록. 실내공기 조절, 물방울 안 생김. 정말 과학적.
석굴암 축성은 은장기법 사용. 유럽 지중해 여행 때 터키의 에페소 기원 전 건물 남아 있음. 우리는 나무로, 그곳은 돌로 지음. 지진이 어마함. 돌들 남아있지만 허물어져있다. 우리 석굴암 뜯을 수 없으니 은장기법 볼 수 없음. 그 은장기법을 그곳에서 봄.
돌기둥이 하나로는 높히 못 올라가니 두 개 연결해서 세워야. 나무 같으면 깍아서 주먹장기법으로 맞출 수 있지만 돌은 안 됨. 돌 한 가운데 구멍 파서 가장자리에서 구멍까지 들어가는 길 팜. 쇳물 녹여 부음. 그 쇠가 돌과 돌 사이 못 역할을 함. 지진으로다 넘어가 있음. 일부 터키 후손들이 복원했지만 제가 볼 때 완전한 복원 불가능. 옛날 동네 30만명 살았다는, 어마함.
석굴암은 1,300년 전 돌과 돌을 연결. 신라시대 지진이 많았던 듯함. 석가탑이 1,300년 동안 지진 버틴 흔적 많음.
그렇다면 토함산 석굴암만 있을까? 우리가 만든 이중 콘크리트 원형 복구가 가능할까? 아무도 모름. 원형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해서 몇 년 동안 헤맴. 신라 때는 그야말로 불국토였는데 하나 밖에 없었다? 전방후원 형태의 차이트야 석굴 찾아냄. 신통방통함.
사실은 소문 들음. 논문 쓰고 있을 때, 경남 사천 보안암 석굴. 딸 고3 입시 때 핑계로 집사람과 함께 한 번 기도하러 가자. 다솔사 절이 있음. 사찰 내 300평 정도 녹차로 유명. 다솔사 말사. 비구니스님 두 분. 그 밑 면사무소 문의 모름. 어떤 젊은 여직원 언제 소풍 갔다가 거기가 석굴암 얘기 들음.
산꼭대기, 사람 있으면 전기 다 들어감. 전봇대보고 감. 나중에 보니 길 있음. 사실 그 전 날 팔공산 조난, 새벽에 들어왔는데 다음날 가기로 되어 있어서. 석굴암 복원생각, 카메라 등 자연 상태로 있다면 환경 실측도구, 온도, 습도, 풍속 등.
공교롭게도 석굴암처럼 똑 같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음. 높이도 해발 약 500m. 나이도 100살 적음. 1,200년 전 서로 다르지 않음. 100년 정도면 서로 영향 받게 되어있음. 규모는 작음. 전방후원형. 작지만 비도도 있음. 1,200년 전 고대로. 부처님 모시고 돌 덮어 놓음.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경남 유형문화재 제39호. 국보감이다. 문화재청에 있는 한 국보로 승격시킬 예정. 정면 9m, 측면 7m, 적지 않다. 벽 두께가 작은 데가 2m, 큰 데가 3m, 돌이 전부 구들장 같은 돌로 덮음. 2~3m폭 작은 게 아님. 큰 돌들을 지붕으로 올리고 그 틈으로 숨 쉼. 이끼 없음.
토함산- 신라1000년 부처님 얼굴 계란형
고려시대- 500년, 불교가 국교
조선시대- 500년,
신라시대와 좀 다름. 좀 못남. 얼굴이 긺. 백제는 빼빼함. 날씬하고 길죽. 고려는 못나고 길죽.
뒤에 보면 16나한상 팔만한 돌이 16개. 자세히 보면 조각. 석불 높이 1.8m, 토함산은 3.4m, 석굴 재료는 점판암. 편평하고 구들장 같은 돌. 바위 주름 뜯으내면 엄청나게 이런 돌 많음. 자연스럽게 그 곳 모심. 사실은 도선선사가 만듦.
신라 초기 풍수는 중국 영향. 좋은데 찾다보니 온 산 무덤이 되어버림. 절집 다 됨. 통일신라 말 고려 초 도선스님은 우리식 풍수, 자생 풍수. 좋은 땅만 좋은 땅이 아니다. 나쁜 땅도 비보를 해주면 좋다. 안 좋으면 탐하나 만들어라. 그러면 좋아진다. 전라도 백제 땅이나 고려 땅 밑으로 탑이 많음. 터 안 좋을 때 많이 만듦. 절 짓고 싶은 데 안 좋으면 탑 많이 만듦.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배 모양인데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을 막아야 배가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곳이 실상사. 자생풍수는 액땜 해주면 좋다. 풍수도참설 나옴. 도선스님 만든 석굴암.
굴 아님. 돌 덮음. 경사지. 축대하니까 마당이 나옴. 그 곳 만듦. 비구니스님 살고 있음. 사진을 찍어야하는데 그것까지는 좋다. 안에 가서 상세하게 찍고 기계로 측정해야. 사진 밖에서만 찍으라고. 굉장히 무서움. 절집 공양하면서 간장 쓱쓱 닦아먹은 게 그 곳이 처음. 무조건 남기면 안 된다고. 그래서 우리 집 애 고3 천배 기도시간 요청. 내부 사진, 측정, 환희심이 남. 그렇게 기분 좋은 적 없음. 이제야말로 석굴암 제 모습대로 만들 수 있겠다. 환경을 그대로 옮기면 된다는 생각에. 달리 아픈 것 하나 없음. 대구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요즘 디지털 카메라. 그 때는 다 인화해야. 일 년에 수천 장 찍음. 사진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음. 단골 사진관에 턱 맡김. 빨리 현상하라고.
그런데 죄를 받음. 현상하는데 사진관 큰일. 사진이 안 나옴. 아예 먹통이 아니라 모든 사진이 반만 나옴. 바깥 사진은 나왔는데 안에 찍은 사진만. 처음 찍은 게 아니다. 다락방, 마루 밑. 부처님도 반 잘려. 하나밖에 생각 못함. 부처님께 거짓말. 다시 가서 사진 찍을 자신 없음. 반 나온 사진 그대로 논문에 씀.
이 사진에도 기둥 서 있음. 비도 있음. 똑 같음. 비도 짧음. 고려부처님. 얼굴 시커멓게. 작은 돌 뒤에. 16나한. 둘이 기도하기 딱 맞음. 도선스님 영정.
봉명산 다솔사 보안암. 공식명칭.
안에 이끼 안 낌. 돌 틈 숨 쉼. 해도 잘 받음. 온도, 습도, 토함산 석굴암도 이래야. 벽 두께가 2~3m. 두껍다. 철문. 한 마디로 못남. 못난 부처님 고려. 일본 나라 호우류지 백제(구다라)입상.
이 토함산 석굴암 90cm철거만 해결하면 됨. 토함산 석굴암 관계되는 곳이 동해구. 입구 자. 동해 쪽 입구. 신라 역사 1,000년에서 8년 모자람. 992년. 천 년 간 한 나라 역사 보존하려면 어려움. 외적 쳐들어오는 경우 많음. 서라벌 놓고 보면 관포(동해) 취약함. 대종천이라는 큰 천. 요즘은 동해가 점점 융기. 물 위로. 반대로 일본은 니가다 쪽 물 속 내려감. 독도 우리 땅 할 필요 없음. 몇 만 년 뒤는 독도, 울릉도 다 연결될지도.
신라 천년 어떻게 전쟁 한 번 없었을 것인가? 동해에서 대종천으로 바로 경주 들어갈 수 있음. 땅 힘듦.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려 함. 임금들마다 어떻게 동해를 지킬 것인가? 그래서 이름하여 동해구. 신라 동해구는 어딘가? 오랜 세월 지금은 토사로 막혀버림. 댐까지 만듦. 지금은 대종천에 물 없음.
신라 동해구와 관련된 유적지를 보면 첫째 토함산의 석굴암, 감은사(바닷가쪽), 이견대(건물), 문무왕 수중릉, 이 네 개가 신라를 지킴. 장군은 제일 뒤에서 지킨다. 석굴암.
감은사는 동탑, 서탑 탑만 남은. 탑은 삼층석탑 아주 큼. 왜 크게? 멀리 바다 적들 오다 탑이 보여야 절 있는 줄 앎. 옛날 승병들 있어 적들이 저기로 가면 안되겠다 생각.
이견대利見臺는 물가에 있음. 포병대 중 제일 앞 좌표 알려 줌. 관측도 함. 바닷가 제일 앞 보초들 서 있는 곳.
그 다음 문무왕릉. 이 네 군데가 관계. 다 사찰. 그런데 부처님이 문무왕릉쪽 바로 보고 있음. 옛날 연기도 피우고 적 알려 줌. 먼 바다 보임. 날 좋은 날은 일본도 보인다는 말.
감은사 두 탑, 절은 온데 간데 없음. 기단 남아있음. 마루 남아 있음. 마루가 여기는 돌로 되어있음. 귀틀 모두 돌. 저 돌 다 들고 가서 화단 만드는데 써 버림. 문무왕이 내가 죽거든 가장 약한 동해를 용이 되어 지키겠노라. 아버지가 감은사 짓다 돌아가시니 아들이 완성, 화장하여 동해바다 안장, 물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도록. (그 혼도)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이견대는 파수대. 여기서 보면 수중릉 보임. 지금은 돌 돌출. 1,300년 전에는 돌출되었을까? 실제 화석 조개 나오기도 함. 옛날 물속에 있었음. 산꼭대기가 될지도 모름.
<보너스 강의>
아수라장: 불교 용어. 범어로 asura. 인도에서 전쟁을 일삼는 나쁜 귀신을 일컬음. 불교 수호신인 제석천과 싸움. 그 장소가 아수라장.
만자卍字: 절집 지붕에 표시. 본마음의 근본적인 마음자리를 뜻함. 범로 Srivatsalksana 스리밧살크사라, 행운, 길상을 뜻함.
원상: 우주 만유의 근본자리. 나고 죽고 가고 옴의 변함이 없는 자리. 우너 하나 그려 달라가 아니라 원상 하나 그려 달라가 맞음.
원이삼점圓伊三點: 불․법․승 삼보를 상징. 간혹 절 모퉁이에 있음. 우리나라 삼보 사찰은 어디인가?
불- 양산 통도사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 있음.
법- 해인사 팔만대장경
승- 송광사 큰스님들 많이 배출.
불교기: 5가지 색깔. 세로선, 가로선. 1954년 공식 승인. 1882년 영국계 미국인 국적자인 불교신자 올코트(Colonel Henry Stell Olcott)가 스리랑카 불교 부흥운동 돕다가 불교도신자협회 창립. 우리나라 1952년 세계불교도에서 처음 사용. 우리나라 최근에 많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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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부처님 법을 구하며 살아가는 힘
황색: 부처님의 몸의 빛과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붉은색: 항상 쉬지 않고 수행에 자비와 정진
흰색: 악업과 번뇌를 없애는 청정의 지혜
주황색: 그릇된 꾀임에 잘 견뎌내는 인욕의 지혜
가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 세로선은 영원불멸 뜻.
법륜: 교법의 의미. 부처님 입멸 후 부처님 존상 대신 상징물
운문사 가면 큰 돌 조성. 법륜 불자회가 운문사에서 26년 전 시작.
향로석: 법당 앞에 있음.
괴불대: 탱화걸이. 깃대 꽂는 단간지주와 혼동. 양쪽 구멍 뚫려 있음. 야단법석 시 뒤에 탱화 걸이. 한 번씩 장대 내 걸어야. 동화사 대웅전 옛날 사진.
석등: 모양 많음. 야외 예불 때 불 밝히기 위한. 보통 사찰 중안. 탑 하고 같이 배치. 다른 말로 광명등. 초기 하나, 차차 대칭 두 개 설치.
기본 모습은 하대, 중대, 상대, 화사석. 끝이 올라간 것 화려한 것은 고려.
아래 석등은 법주사 쌍사자석등. 배를 맞추고 있음. 배를 맞추면 애를 잘 낳는다는 속설.
실상사- 우리나라 제일 큰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
네모난 것도 있음. 일본 호텔가면 한국서 가져온 것 많음. 화남.
절은 온데 간데 없고 석등만 남음. 도굴꾼들 석등 싣고 가버림. 사진 상부 날아감. 화사석만 남음.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부도 앞 석등 위치.
봉발탑: 석가모니 부처님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 양산 통도사 용화전 앞 우리나라 유일함. 국가지정 보물 제 471호. 돌 하나로 뚜껑까지 표현. 명칭 봉발‘탑’으로. 삼국유사나 사기에 미래에 올 부처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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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우리나라 불교 건축과 문화에 대한 눈이 넓어지고 오랜 역사 속의 장인들의 불심에 감동되는 즐거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많은 내용 강의 감사합니다_()_
댓글목록
길상화님의 댓글
길상화 작성일
녹음해 주신 성담님께 감사드립니다.
올코트의 오계 수계 그림과 불교기 그림이 안 뜨네요.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