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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부처님 실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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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한순 작성일06-01-23 10:27 조회2,8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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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차에 꽃향기를
담고 -


이곳 농장엔 야생 벚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화실이 있는 베란다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크기 시작했습니다. 수년 후부터는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맛이 요상했습니다. 꽃은 영판 매화꽃인데 열매 생긴 것이 버찌라 하기엔
너무 크고 자두라 하기엔 너무 작았습니다. 그 놈은 체리플람(cherry
plum)이 분명했습니다. 시드니에는 8월에 벌써 각종 벚꽃들이 다 폈건만
봄이 늦은 이곳은 9월 초가 되어 겨우 녹두알만큼 작은 꽃망울이 생겼습니다.
싱거운 차에 띄우는 재미로 금년에도 고것들을 채취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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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보니 지난해에는
8월 26일이 첫 채취일 이었는데 이번 봄은 한 일주일 늦었나 봅니다.
그러나 아직도 차가운 아침공기여서 비가 온 날엔 물방울과 함께 따다보니
손등이 한참 얼얼해 있기도 했습니다. 바람 부는 날에는 꽃망울을 따는
동안에 이미 피어버린 꽃송이들이 머리위에 하얗게 눈처럼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꽃잎이 다 터지기 전에 서둘러서 매일아침 땄지만 한 열흘
지나고 나서 어느새 활짝 다 펴 버렸습니다.


그렇게 소중히 모은
꽃망울들을 욕실옆의 온수 보일러통에 올려서 말립니다. 한국에선 전기옥돌
매트에 잘 말린다고 하지만 없는 거 찾을 수는 없고 있는 거 찾아서
해 보니 이번 것은 그런대로 색깔도 깨끗하고 향기도 넉넉히 들어 있습니다.
체리플람이 끝날 무렵 정원건너 저쪽에는 복사꽃이 한창입니다. 그놈들을
또 일주일 따고 보니 이번엔 현관 앞에서 레몬 꽃망울이 마악 터지려고
합니다. 잘 익은 봉오리에 손을 대니 팽팽한 꽈리가 탁 터지듯이 꽃잎하나가
피어나옵니다.우리 농장엔 아직 자급자족할 차재배가 준비되지 않은
터이어서 우선 꽃차나마 이래저래 만들어 보는 재미에 푹 빠져 봅니다.
그동안 실패하면서 배운 경험으로 이제 여러 가지 향의 꽃차를 우리
집을 찾는 나그네들과 다인들에게 맛보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느긋해 집니다.


오렌지 나무 밑에는
어미거위 한 마리가 용맹정진 중입니다. 보리수나무 밑이 아니다 해도
괜찮은지 벌써 3주째동안 꼼짝도 아니하고 알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옆에서
손을 뻗쳐 오렌지 꽃을 따고 있어도 모른 척 미동도 않습니다. 다른
어미거위 중 한 마리는 차고 담벼락에 또 한 마리는 집 뒤 흙 담벼락에
붙어서 면벽참선을 하느라고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꼼짝없이 둥지에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수행중인 어미거위들에게만 오래된 사과나 상추
잎파리를 공양한다든지, 또 새 꽃차 맛을 보여주려고 우리 회원들만
챙기면 부처님께는 큰 실례겠지요. 그래서 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꽃망울들을
채취해서 첫날처럼 참선방에 계신 부처님 앞에도 놓아드렸습니다. 또
일년을 기다려서야 하니 그 고운 향기를 올해 마지막으로 실컷 맡으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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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직 따로이 다실이
없어서 참선방을 많이 이용합니다. 예전엔 불교를 알지 못한 채 불교미술에
먼저 감탄을 해서 티벳의 탱화를 구해다 놓고 보면서 그리고 버어마에서
오신 약사불이나 중국에서 모셔온 문수보살 조각상을 보고 또 보고 하다가
그냥 그분들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구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시는 성인들이시니 자연히 집안 웃어른들처럼
공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그 앞에 있으면 저절로 예를 갖추게
되고 그 예스러운 마음이 정갈해 집니다. 그렇게 예술품을 바라보던
눈에서 수행자를 보게 되고 그 눈이 또 마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단지 이제는 그림이나 조각상이
아니라 그 마음이 퍼져서 그 방을 메웠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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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방의 분위기,
느낌, 공기에서 만도 그 분들을 충분히 느낍니다. 그런 방의 조화를
깨트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그 방의 다구들을
옮겨 나가는 손길이나 행동거지가 가끔 소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대개 왼편쪽에
계신 부처님께는 고개만 까딱 인사하면서 ‘아이고 부처님, 제가 좀
바빠서 그냥 갑니다.’ 어느 때는 수선스럽다 싶어서 ‘오늘은 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하고 양해를 구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오른편에 있는 다구들에게만
볼일을 보고 휑하니 나와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버릇없이 등만
보인 그 실수가 생각이 나면 지나가다 그 방문을 빼꼼히 열고 ‘그때는
실례가 좀 많았습니다.’하고 사과를 합니다. 최근엔 부쩍 건망증이
심해져서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는다는 것이 부엌까지 들고 와서는
무의식중에 냉장고에 넣어버린 일도 있는지라 시드니 가는 차도구 보따리
속에는 항상 빠트리는 것이 있어서 차시동 걸어놓고도 금새 헐떡거리며
또 그 방에 들어갑니다. 차도구 보따리라 하면 그것이 요즈음 저의 출장
보따리입니다.


다도교실에 오는 다우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준비해간 보따리를 풀고 여러 가지 차가 든
유리병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비교하면서 지껄이다 보면 이 무슨 허깨비
짓인가도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가 아직도 많이 부족한 이 사람이
주위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담고서 몸이라도 바르게
앉아서 심신에 약이 되는 좋은 차를 공손히 우려주고, 계절과 효능에
맞는 꽃 한송이씩을 띄우다보면 차 속에 빠져서 내 생각은 없어지고
맙니다.


문득 깨어나서 따뜻한
찻물에 피어나는 꽃잎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 꽃을 닮았다고
느낄 때는 1시간 30분 거리의 프리웨이를 달려서 내려온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입니다. 한송이의 꽃차에도 마음이 즐겁고 아름다워 할 수 있는
저들을 위해서 축서사에서 맛 본 향기로운 솔차를 권해서 남의 땅에서
낯선 것에 치인 마음들을 씻어주고 싶습니다.허나, 호주 소나무는 호주사람을
닮아서 길고 힘없어 보여서 싱거운 맛일 것 같으니 추운 곳에서 태어난
짭짜름한 한국 솔방울이 아쉽기만 합니다.


물론 굳이 매화차나
솔차가 아니라 해도 마음으로 마시는 차라면 어떤 차라도 제 맛을 낼
것입니다. 그동안 편하게 마시기만 하던 생활차라 손만 놀리던 다례의식차를
넘어서서 들뜨고 허전한 마음을 잡아주고 채워주는 수행차도 함께 마시며
공부합니다. 차생활이 우리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나 향수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즐겁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니 이곳의 다민족과도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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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주위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자료수집도 많이 되었는데 이 기회에 서울 예지원의 이민수
선생님, 시드니 여성의 공간 한복희 공간장님, 서울 서초동의 전명진
교무님, 부산의 김화주 선생님 그리고 축서사의 계법스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오늘 아침, 그 방을 살짝 열어보니 어제 놓아두었던 레몬꽃
향기가 가득 했습니다.


부처님과 관음보살님도
그 꽃향기에 취하셔서 눈이 다 풀어져 보입니다. 저는 무릎걸음으로
살금살금 들어가서 ‘어제도 또 실례가 많았습니다’하고 삼배를 올렸습니다.
역시 자비로우신 부처님과 보살님이시라 ‘괜찮다. 괜찮다’하십니다.
꽃향기에 취하셔서인지 그들은 ‘더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림도, 상도
없는 그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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