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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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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4-28 15:45 조회2,7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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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

기후스님

큰절 가는 오솔길에 털신 발자국이 공룡의 화석처럼 남아서 얼고 녹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춘분을 5일 정도 남겨두고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겨울 추위가 모질게 문수산 골짜기에 들이닥쳐 부드럽던 흙 길을 콘크리트 바닥처럼 꽁꽁 얼어붙게 할 땐 저 길이 언제나 녹을 수 있으려나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 길을 오르내리곤 했었는데……. 입춘, 우수가 지나고 3월이 가까워오자 어느 새 땅이 질퍽거리더니 이젠 다시 굳어져서 편한 마음으로 그 길을 오가게 되었다.

인간사 모든 것도 그처럼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딴딴하게 굳어져서 갈라 터질 것 같던 가슴속 응어리도 부드럽게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인 것을 그 당시엔 별 거 아닌 것에도 토라져서 실쭉거리며 혼자서 뒤돌아 앉아 상대를 야속하게 생각하면서 지내온 지난 삶의 편린들이 어디 한 두 조각이었던가? 이것저것에 부딪치고 온갖 것을 보고 들으면서 세상살이 연륜이 깊어지다 보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게 되고, 헝클어졌던 자신의 삶의 문제도 봄기운에 녹아드는 언 땅처럼 부드럽게 풀려 가는가 보다. 그래서 ‘신토불이’라는 문구도 우리 것을 먹어야만 된다는 좁은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에 바탕 하면서도 자연과 인간의 존재 양식이 다르지 않다는 좀 더 폭 넓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삶의 주변이 몇 갑절 더 윤택해지면서 개인적 삶의 질도 상당하게 향상될 것이다.

그런 원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있는 생명체가 바로 날짐승들이다. 그들은 집도 절도 없이 산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내면서 자신들의 정서를 소리로 표출시킨다. 그들 중 바위틈이나 나무 등걸 속에 비교적 안전하고 튼튼하게 집을 짓고 사는 부엉이나 소쩍새, 올빼미 등은 어지간한 맹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캄캄한 겨울밤에도 가끔씩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겨울 먹거리를 넉넉하게 준비해 두고 살기 때문에 배를 두드리며 콧노래를 부르면서 엄동설한을 즐기지만 애벌레나 곡물 등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되는 여타의 몸집이 작고 기운이 없는 대부분의 산새들은 노래는커녕 겨울 지내기가 몹시도 힘들어서 어서 빨리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마른 풀 숲에서 알몸을 부지한다.

봄기운이 맴돌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축복의 봄노래를 부르는 새가 뻐꾸기이다. 초봄에 우는 그들의 음성은 원기가 부족해서인지 허스키하게 울듯 말듯 하다가 갑자기 뚝 끊어지기도 하는 등 정서 불안의 징후가 분명하게 묻어난다.

어릴 때부터 전해들은 전설에 의하면 뻐꾸기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눈만 뜨면 목이 메어 서글프게 운다고 했다.

자·식·죽·고·아·내·죽·고·나·는·어·이·살·란·말·가 ?

하기야 몸 숨길 곳도 없는 황량한 겨울 산에서 식량도, 아내도, 자녀도 없는 처량한 홀아비 신세라면 그 어떤 생명도 그런 타령이 나오질 않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것은 인과에서 나오는 분명한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뻐꾸기는 소쩍새와 비슷한데 8∼10월경 때까치나 종달새 등 남의 둥지에 회갈색의 알을 한 개씩 낳아서 그들이 알을 품게 한다. 더욱 얄미운 것은 주인집 알 보다도 먼저 부화가 되어서 주인집 알들을 전부 내버리고 마는 얌체 짓을 일삼으니 그 어찌 아내와 자식들이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그 다음이 휘파람새로서 여름에는 나무숲에서 살다가 겨울에는 평지에 내려와서 지낸다. 부리가 가늘고 뾰족해서 마치 휘파람 소리 비슷하게 애절한 음성으로 노래 하기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이 새 역시 겨울나기가 무척이나 버거워서 훈풍이 남녘에서 불어오는 기미가 느껴지면 이젠 살았다 하고 사방에 자신의 건재함을 그렇게 알리는데 일부 지방에선 애기 죽은 귀신이 새가 되어서 그렇듯 구슬프게 운다고 했다.

그 뒤를 이어 까치나 종달새, 참새류 등 온갖 잡새들이 있다.

봄맞이 소리에 제일 느려 터진 것이 바로 꿩이다. 이것은 새라고 하기엔 몸집도 좀 크고 나는데도 둔하다 보니 알 낳는 시기도 6월 전후인데 그때가 되어서야 까투리가 알을 낳거나 품고 있으면 장끼가 높은 곳에서 망을 보면서 자신들만의 신호로서 소리를 내지르곤 한다.

그처럼 모든 생명체는 기분이 좋으면 노래를 부르고 위급하면 큰 소리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래서 소리는 생명의 울림이요, 그것의 강약과 고저의 흐름은 생명 안위(安危)의 전주곡이다. 그래서 본인도 기분이 좋을 땐 휘파람이나 유행가를 욕실에서 불러댄다. 그곳은 좁은 공간인데다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에 노래 실력이 좀 부족해도 그럴듯하게 들리고 또 나처럼 치아나 음성이 시원찮고 끝말이 분명치 못한 입장에선 그곳이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목포의 눈물이나 낙동강 처녀 등 트로트 노래를 서너 곡 연거푸 부르고나면 더부룩하던 뱃속에 청심환이 들어간 듯 부글거리던 속내가 시원해진다. 그때보다도 한 단계 더 컨디션이 좋을 때면 설거지(시드니에서)를 하면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오백년 일부분(한 오백년 살자더니 웬 성화냐)을 관세음보살로 바꿔서 큰소리로 반복해서 부르고 나면 타향살이에서 오는 온갖 시름들이 일순간에 달아나는 듯한 감정을 맛보곤 했다. 이처럼 노래는 즐거움을 나타내는 생명성의 근원이자 살아있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출양식이다. 특히 혼자 부를 때 보다는 여럿이 함께할수록 좋고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은 만큼 노래가 주는 감흥의 강도도 그에 정비례한다.

특히 지금처럼 힘든 때일수록 함께 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의 삶을 안정되고 평화스럽게 가꾸어 갈 수 있게 하는 좋은 밑바탕이 될 수가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선대 조상들의 많은 공덕과 깊은 은혜, 그리고 자연의 가없는 도움을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 필요한 것을 생산해서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지구촌의 모습, 그래서 불교에선 함께 모여 서로에게 의지해 가면서 생존하고 있는 군상(群像)을 중생(衆生)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나만이거나 우리 집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지나친 이기적 발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간혹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기모순이며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 대한 모욕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힘든 일이 생기면 힘 따라 서로 도우며 함께할 때 그 힘듦을 줄이고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동참해서 따스한 마음으로 축하를 해 줄 때 그 경사의 눈금이 배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엔 신뢰를 바탕 해서 사랑이 오가고, 주고받으면서 인정이 샘솟아 사람 냄새나는 세상이 구현되는 것이다. 그것을 말이나 관념으로만 끝내면 우선은 자신의 삶이 초라해지고 허허로워서 그들 스스로가 힘겨워 하면서 마침내는 병을 얻게 되어 피폐해진 자신과 마주하게 되어 있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중생과 더불어 고락을 나눌 수 있는 정신적 자세와 실천이 뒤따를 때 가정엔 화기(和氣)가 들어차고 사회엔 정의가 실현 될 수 있다. 그것의 매개체는 우선은 물질이다. 인간은 물질이 없으면 존립할 수가 없으며 정신이 없으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이 둘의 조화로움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 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며 공업(共業)중생으로서의 피차의 깊은 책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좀 더 가진 이는 함께 나누려 애쓰고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는 미성숙한 이들을 보듬고 감싸서 그들의 성숙을 도와야 한다. 그것의 실현에는 육바라밀과 사무량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힘 따라 실천하면 된다.

요즘 설익은 미디어의 세뇌로 인해서 너도나도 앵무새 흉내 내듯 그저 쉽게 미국발 금융위기를 되뇌이고 있는데, 사실은 우리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그런 문제의 삼독심을 이미 키워오고 있었음을 모른 척 덮어두고 어떤 특정 대상이나 국가에 그 책임을 몽땅 전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지금이라도 남의 탓만 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있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지나친 물질주의에서 나오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의 틀을 부수고 잘못된 자기를 해체해 보려는 자기성찰을 꾸준하게 해야 된다.

그렇지 않는 한 앞으로 닥쳐올 물질주의에서 오는 폐해는 지금의 강도(强度)보다 몇 갑절 더 큰 울림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내리칠 것이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과 나누는 기쁨을 더욱 더 절실하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되는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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