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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속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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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8-09 18:02 조회3,2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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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속이지 말라

성원스님_제주 약천사 부주지

 

 

여름 안거가 끝나고 도반스님들을 만났다.

단순이 친분을 쌓기 위해 만난다기 보다 몇 개월 동안 떨어져 살면서 못 다한 얘기들을 나누고 싶어서 우리들은 무슨 의무같이 함께 모이곤 했다. 각자 흩어져 지낸 안거기간 동안 만났던 스님들과의 일들을 얘기로 꽃을 피우는데 대부분 지대방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바로 축서사에서 안거를 마친 도반의 너무나 진지한 대화에 모두 숙연해졌다. 선원장 무여큰스님과 함께 하면서 지켜본 큰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아스라이 느껴지는 봉화라는 깊은 산속 이미지에서 열하의 번뇌조차 식혀주는 향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특히 스님은 참선하는 선실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일(如一)한 모습을 보여주셨다며 자신이 받은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열을 다해 한참을 이야기 했다.

언젠가 외국에 갈 때였다. 입국 신청서를 쓰는데 직업난이 있었다. 순간 뭐라 써야 할지 망설여졌다. ‘승려’ 라는 것을 한 번도 직업이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은 터라 난감해하고 있자니 곁에 있던 스님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정말 승려라는 명칭이 직업으로 분류 될 수 있을까? 행정 편의상 그럴 수는 있겠지만 출가자들은 스스로 승려의 생활을 직업으로 생각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업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민하다가 스스로 직업을 수행자라고 기입했던 기억이 난다.

아련하고 고고한 생각을 좇아 달려온 출가자의 삶에서 수행이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일상에서 최초 출가의 목적이었던 수행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을까? 혹 승려의 지위가 성직으로 둔갑하고 있지는 않을까 매일 되돌아보고 반성하곤 한다. 돌이켜보면 수행과 관련한 조사스님들의 고구정령한 경험담과 수행과정에 있어서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에 따른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출가 후 우리들에게는 또다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 되는 게 사실이다. 오랜 시간 학습 받고, 고민을 하면서 도달한 것은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너무나 단순한 명제였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

모든 수행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튼튼한 수행의 집을 지을지라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기자심(不欺自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어쩌면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수 있는 참다운 상태는 자아를 완성한 상태 즉, 해탈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궁극의 목표가 불교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불기자심(不欺自心)!

어쩌면 이 말은 너무나 평범해서 수행자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어린학동들에게 가르쳐주는 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을 속이지 말자’ 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읊조렸다.

하지만 곧 자신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개념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준이 되는 자신이라 할 것인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만과 자존과 욕망으로 가득한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회한을 일으키면서 다시 한 번 이 명제는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엇이 자신이란 말인가? 모든 삶의 가치를 투영할만한 지고한 자신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결단과 용기를 갖추었더라도 곧바로 ‘자신’이라는 기준이 확고히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들은 또다시 ‘참다운 자신’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결국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명제는 출가 수행자의 첫걸음이기도 하지만 궁극의 지향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수행하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좌표점 위에서 부동의 지고지순한 지향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 한 곳에서도 목표점을 향한 끊임없는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것이 수행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마치 달리는 말위에서 나는 새를 겨누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현재 나라는 좌표가 부동점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유동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수행 중에 딴 길로 빠져버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무나도 불확실한 자신의 현재위치를 단언적으로 확신하고 스스로 자기에 대해 맹신한다거나 아니면 불안정한 현재에서 바라보는 목표점의 방향을 너무 맹신하고 치달리기만 한다면 결국 원효스님의 말씀처럼 ‘욕왕동방이향서행(欲往東方而向西行)’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 것이다.

불기자심(不欺自心)!

우선 일상의 삶에서 자신을 속이는 일을 삼가면서 부단한 탐구를 계속하는 것이야 말로 수행의 첩경일 것이다. 조사선의 정점에 있는 화두도 우선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 속에서 인연 지어져야 바람직할 것이다.

언젠가 진제큰스님께 한 수좌가 물었다. “예전 스님들은 매번 새로운 공안을 만들어 후학을 지도했는데 스님께서는 왜 예전에 이미 정해진 화두만 말씀해 주십니까?”

스님께서 답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깊은 사유를 통한 삶의 의문을 물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참선하고자 하니 화두 한 개 주십시오’ 하니 옛 화두 한 개 줄 뿐이다.” 라고 하셨다.

모든 수행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시작되며 자아에 대한 풀리지 않는 불안전성을 자각할 때 그 기나긴 여정의 첫걸음을 시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아에 대한 인식과 의문성을 가져보지도 않은 채 화두를 받고 참선하다보니 화두에 대한 의구심도 약할 뿐만 아니라 집중력 또한 기대 할 수도 없을 지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수행이란 어쩌면 혼자만의 고독한 여행이 아니라 그 혼자라고 말 할 수 없는 막막한 여정이다.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고른 숨을 쉬면서 푸른 눈빛을 담고 무더운 여름의 열기조차 잊은 채 있다. 우리들은 정말 세상에 더없이 좋은 수행의 터전을 가진 몇 안 되는 행복한 수행자들이다.

언제나 행복 가득한 마음으로 출가의 길을 걷고 싶다.

그해 여름 도반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축서사 쪽으로 고개를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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