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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 반백년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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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8-09 17:46 조회2,8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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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 반백년을 돌아보며

- 자선화 불자 -

취재·글 |여래심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혹한의 추운 겨울날, 백련암 법당 앞에 자리가 없어 마당에서 철야정진하며 여섯 시간에 걸쳐 삼천 배를 올렸다.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의 합격을 바라는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려야 했다. 그 당시 생존해 계셨던 성철스님으로부터 ‘고 보살 참 쓸만하다’는 칭찬의 말씀과 그 자리에서 친히 화두원상을 그려주시고 ‘정주가’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하니, 기도의 시작을 이처럼 실감나게 하신 노령의 보살님도 드물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자선화 보살님이다.

혼인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여 마음고생을 하다, 눈물 나는 기도 공덕으로 딸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딸아이였지만 병치레가 잦았고, 반드시 절에 가야만 생기를 되찾았다. 딸아이가 함께 절에 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레 부처님께 기도하는 날도 많아졌고 이듬해 아들을 낳고, 순탄하게 3남 3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쉽사리 끊이질 않았다. 40대에 쓰러진 남편을 대신하여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고된 인생의 여정이 남아 있었으니.

기도생활 50여 년의 세월이 자신도 모르게 훌쩍 흘러가 버렸다며 미소를 짓는 보살님의 얼굴엔 고행의 흔적보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철저하리만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넉넉함이 스며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아리게 한다.

30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다는 보살님. 그러한 기도의 원력으로 큰 과수원을 두 번이나 사게 되었으니, 그것이 모두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은 결과라며 겸손에 가까운 자랑을 하신다. 생일을 맞이해서도 자녀들이 차려주는 생일상을 받지 않고, 이월 보름날 방생법회에 참석해서 당신만의 특별한 생일을 치른다.

“가장 기쁜 일은 생일불공이지. 방생이 최고의 기도잖아. 그리고 자식들 바쁜데 걸음 안 해서 편하고, 고기 안 먹어 살생 안 해도 되니 일석삼조이지.” 역시 불자다운 해석이다.

보살님은 정무스님과 17일간 인도와 중국, 대만 등 성지순례를 갔을 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성도재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던 일, 스리랑카 승려 및 신도 2천5백여 명이 구름처럼 몰려든 가운데 초전법륜지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공양미를 올렸던 일, 당시 세계 각지에서 온 취재진들의 뜨거운 취재열기 등 너무나 가슴이 벅차고 황홀한 순간들을 말씀하시며 활짝 웃으셨다. 순간, 지극한 정성과 수행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보살님의 깊은 주름이 자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어 무여 큰스님과의 소중한 인연 이야기가 보물단지에서 보물이 나오듯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졌다. 20여 년 전 황폐하고 열악한 축서사에 무여 큰스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누구보다 먼저 ‘이제는 이곳을 원찰로 삼고 기도를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화주보살을 발원했다. “그때 마음으로는 작은 힘이지만 종 불사를 이루고자 했지요. 부처님 전에 백만 원을 꼭 시주해보고 싶었어. 그때는 그 마음이 참으로 간절했지. 허허” 하시며 “종 불사를 무사히 이루고보니 오랜 세월 동안 포교한 보람도 있었고, 이제 죽는다 해도 원도 한도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자선화 보살님.

특히 포교하고 화주하며 정성들였던 많은 일 중에서도 처음 시주금을 스님께 드린 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처음 화주한 시주금 2천만 원과 찹쌀 한 포를 들고 축서사를 가기 위해 봉화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무슨 우연인지 무여 큰스님을 거기서 만났다. 시주금을 바로 스님께 전해드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날 밤 신비로운 꿈을 꿨는데, 희고 뽀얀 드레스를 입으신 관세음보살님께서 보살님이 준비하신 보따리를 받아 안으시고는 축서사를 향해 치마를 살랑살랑 날리며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 모습이 생시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이제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고 남은 생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보살님은 말한다.

“거창한 계획이라고까지 말할 것도 없지만 하루라도 빨리 몸을 바꾸어 불국정토에 태어나는 게 소원이지. 그리고 아직도 한 가지 남은 과제가 있다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축서사의 만년위패에 인연 있는 영가 분들을 포교하는 일이지 싶어요.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가 아니 되니 무슨 걱정을 붙들고 있겠습니까, 보배스런 말씀은 맨발이라도 달려가 얼른 전해주고, 덕이 되지 않는 말은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아니 되는 법입니다.”

박복한 줄만 알았더니 무슨 복이 이리도 많아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축서사에서 보궁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라는 보살님은 후손들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일꾼이 될 것을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서원하며, 자식들에게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살기를, 물처럼 바람처럼 맑고 모나지 않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연하게 살아가라고 당부 당부하신다.

살아오신 힘든 여정이 결코 고통이 아닌 행복의 길이였음을 보여 주시는 보살님. 고통 속에서 사는 중생들과 함께 가는 길이였기에 보살님의 보현행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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