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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와 생명나눔, 그리고 나의 인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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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8-09 17:35 조회2,6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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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와 생명나눔, 그리고 나의 인연이야기

서암 오시환

니르바나 오케스트라 후원회장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갑자기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들끓고 있었고 사람들은 희망이 사라져 자신의 어깨조차 추스릴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정은 흔들리고 아비로서의 자신감조차 갖기 어려운 때였다. 나는 멍하게 세상을 쳐다보며 서글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불현듯 ‘생명나눔’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 한 몸조차 견디기 힘들 때 생명나눔을 떠올리다니…. 나는 각막기증과 장기 기증을 맹세하고 받은 기증증서를 주민등록증보다 더 잘 보이게 해서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받아든 화두 하나를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21년간이나 해왔던 광고인으로서의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취미에 머물고 있었던 요리에서 직업적인 조리사가 되기 위해 생면부지의 낯선 플로리다의 한 일식당에서 헬퍼로 일하게 된 것이다. 힘이 좋은 히스패닉계의 청년들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작업을 하기에는 마흔 여덟의 나이가 부담스러웠지만 내 지갑에 들어있는 생명나눔의 증서와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화두는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곤 했다. 그 조그마한 종이조각과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이는, 그리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한마디에 불과한 화두가 어째서 그렇게 큰 힘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내 지갑에 들어있는 기증증서를 볼 때마다 힘이 불끈 솟곤 했다.

나는 플로리다의 바닷가에서, 그리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물결 속에서, 수많은 인종들이 넘쳐나는 뉴욕 맨하튼 골목길에서도 도저히 풀려지지 않는 자물쇠같이 무심한 화두를 가까이 하고 살았다. 나는 그 후 삼년 동안 플로리다와 뉴욕의 식당들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주방장 겸 오너가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한 오케스트라 단장을 사석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는 불교계에 하나밖에 없다는 서양악기 전문 오케스트라인 ‘니르바나 오케스트라’를 7년간이나 운영해왔다. 그런데 그 당시 그녀는 더 이상 오케스트라를 꾸려갈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랜 적자로 그녀의 가산은 더 이상 지출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전에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오직 불자라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내 능력과는 걸맞지 않게 무책임한 제안을 하나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니르바나 오케스트라 후원회였다. 한 달에 만원씩 후원하는 후원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나도 그녀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무모해 보이는 제안이었다. 나의 작은 식당에서 후원회원들을 위한 음악회를 조촐하게 열었다. 40명도 모으기 힘겨웠다. 그녀의 음악회 가운데 가장 작은 음악회는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그 후, 오케스트라는 후원회원들의 작은 정성과 관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독특한 불교적 장르를 개척하는 테마연주회를 지속적으로 가졌으며, 고요와 감동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모습의 템플스테이 음악회도 열었으며, 40에서 60인조가 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도 가지게 되었다. 동원되는 관객이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 그리고 붓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모이는 관객으로 점차 그 모습도 바뀌어져 갔으며 관객수도 점차 늘어갔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음악회가 열린 것은 작년 11월이었다. 그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소아암 어린이 환자를 돕는 음악회도 매년 정기적으로 가졌었는데 작년은 더욱 알찬 연주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KBS홀에서 열린 이 음악회에 기업들과 많은 불자 여러분의 참여로 1300명이 넘는 관객으로부터 무려 3800만원이나 되는 기금이 마련되었다. 우리나라 클래식 연주회에서 기성 오케스트라단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해 낸 것이었다. 그 때에 모여진 자선기금은 모두 ‘생명나눔 실천운동본부’와 ‘한국혈액암협회’를 통해 어린이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마음이 모이면 세상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교과서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몇 년 사이에 내 눈 앞에서 직접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생명나눔 실천운동본부와 함께 ‘소아암 어린이 돕기음악회’를 하면서 나는 내내 지갑 속에 끼워져 있는 나의 장기 기증증서를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려울 때나 힘에 부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힘을 쥐어 주었던 작은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큰 화두도 소중히 하고 있다. 작은 종이조각에 불과한 생명나눔의 기증증서, 그리고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내 목숨이 다한다 하더라도 내 곁에 있을 화두는 비록 깨친 바 없다 해도 조금도 안타까울 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무척 어려운 시기에 만난 작은 증서 그리고 생의 전환점에서 받은 화두로 인하여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세상을 돌고 돌아와 이제는 여러 불자들과 힘을 같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져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연법의 실체였다. 그러니 붓다께서 가르쳐주신 인연법에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제는 서울은 물론 부산과 광주에서도 난치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자선연주회를 열 수 있는 귀한 인연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음에 또 한 번 감사드린다.

그 때 만약 내 마음 속의 생명나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화두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희망을 잃어버린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참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증서 한 장과 철통같이 막막한 화두 한마디가 나의 삶을 이토록 변하게 했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인연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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