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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걸림없는 삶 살아야 참된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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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5-21 17:11 조회2,6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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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암스님은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종정 자리에 세 번이나 추대된 큰 스승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몸을 스스로 낮추고 누구에게나 겸양의 미덕을 평생토록 실천한 자비보살이었다.

심지어 고암스님은 종정으로 있을 때에도 신도들이나 스님들에게 삼배를 받지 않았다. 신도회 일을 보는 거사나 보살이 종정 스님을 찾아 뵙고 삼배를 올리려고 하면 첫 번째 맞절이 끝나자마자 스님께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절은 한 번만 하면 됐으니 두 번, 세 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종정 큰스님께서 삼배를 받지 않으시면 어떤 스님이 삼배를 받으신단 말씀입니까?”

“아, 아니에요. 절은 한 번이면 족하지 나 같은 부족한 중이 무슨 염치로 삼배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고암스님은 한사코 두 손을 내저으며 삼배 받기를 사양했다. 젊은 스님들도 종정 큰스님을 찾아뵙고 삼배를 올리다가 스님이 첫 번째 절부터 맞절을 하는 통에 당황하기 일쑤였고, 첫 번째 맞절을 마치자마자 종정 스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버리는 바람에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고암스님의 겸양은 말이나 문자로서의 겸양이나 겸손이 아니라 이미 당신의 몸에 평생토록 배어 있는 향기와도 같았다. 그리고 고암스님은 불문에 들어온 후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일이 없었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는 일도 없었다.

제자가 크게 잘못을 해서 속이 상할 적에는 스님 혼자 제자를 불러들여 차를 끓여 먹인 뒤 나직이 말했다.

“이 사람아, 다른 사람이 그러더라도 자네가 못하게 말려야 할 터인데 어찌 자네가 그런 일을 했단 말인가?”

이렇게 한마디 조용히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고, 두 번 다시 그 일을 거론하는 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암스님은 제자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으니, 상좌건 손주상좌건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아무개야”하고 부르다가 그 사람이 스무 살을 넘기면 반드시 말을 높여 “아무개 있으면 이리 오게” 했고, 그 사람 나이가 서른을 넘기면 “여보시게, 이 일은 이렇게 하도록 하시게”하고 존댓말을 썼다.

 

고암스님은 돈에도 물건에도 책에도 감투에도 애착이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나누어주고 물려주고 그러고도 수중에 돈이 남으면 제자를 시켜 그 돈만큼 단주나 백팔염주를 사오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불교 신도들이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사오게 했다.

그러고는 사람에게 무조건 단주나 염주나 책을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돈만 있으면 무조건 단주, 염주, 책을 무한정 사다 놓고 무차별로 나누어 주었으니, 스님은 늘 빈털터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루는 곁에서 모시던 제자가 스님께 간절히 말씀드렸다.

“스님, 이제 돈이 들어오면 통장 하나 만들어 저금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 다음에 더 늙으시면 약도 잡수시고, 용돈도 쓰셔야지, 들어오는 대로 남김 없이 다 나눠줘버리고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 말을 들은 고암스님은 한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옛날 빚 갚기도 바쁜데 어찌 저금을 하라는 건가?”

“스님께서 무슨 옛날 빚이 있으시다는 겁니까?”

“자고 나면 늘어나는 옛날 빚이 있다네.”

고암스님은 다시 먼 하늘을 한참 바라보더니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스무 살 때였네. 처음으로 운수행각 길에 올라 임진강을 건너 묘향산으로 들어가려고 나루터에 당도했는데, 나룻배 뱃삯이 10전이라는 거야. 헌데 내 수중에는 단돈 5전밖에 없었어. 그래 뱃사공에게 사정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지. 나는 그만 나룻배에서 내려 처량한 모습으로 강 건너만 바라보고 있었네. 헌데 바로 그때 나룻배에 타고 있던 한 젊은 아낙이 아기 젖을 물리다 말고 돌아앉더니 허리춤에서 돈 5전을 꺼내 뱃사공에게 내밀며 저 젊은 스님 태워드리라는 거야. 나는 감사하기도 하고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해서 어쩔 줄 몰라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가 강을 건넜는데, 아 그만 그 아낙이 어디 사는 어느 집 며느리인지 그걸 물어보지도 못한 체 헤어지고 말았어.

그 후로 나는 아침마다 그 아낙과 그 자손이 잘되게 도와주십사 기도를 드렸네만, 그래도 그때 진 5전이 자고 나면 자꾸 늘어나는 게야.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모르니 당사자에게는 갚을 길도 없고……. 그 후로도 돈만 생기면 누구에게나 대신 빚 갚는 심정으로 나눠주지만 그래도 그 빚은 자고 나면 자꾸 늘어나는 것만 같은데 내 어찌 저금을 할 수 있겠나. 옛날 빚 갚기도 바쁜데…….“

고암스님은 그 후로도 여전히 돈, 물건 가릴 것 없이 생기면 나누어 주고, 또 나누어 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고암스님은 종정을 세 번이나 지내면서도 당신께서 후에 편하게 지낼 사찰 하나도 점지해 둔 일이 없었다. 출가 수행자는 무엇에든 애착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었다.

“출가자는 늘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참다운 수행자라 할 것이야.”

그러면서 스님은 결코 한 사찰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 스님은 ‘늘 떠나는 삶을 사는 타고난 수행자’였던 것이다.

- 윤청광의 ‘큰스님 큰 가르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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