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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인과의 진리를 믿으며 전법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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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성구 (서울시 강서구) 작성일07-08-10 13:51 조회2,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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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 그리고 아내, 비록 남의 집에서 월세로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 가족이었지만 행복했다. 두 아들은 건강하고 밝게 잘 자라주고 있었다. 그러나 큰아이 복신이가 초등학교 1학년 되던 해 우리 가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들었다. 1991년 12월 복신이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몇 달 전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해 동네의 작은 병원에 다녔지만 병원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고 또 큰 문제도 없었다. 그렇게 별 의심 없이 지냈는데 머리의 통증을 호소하던 복신이가 눈이 사시가 되는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 마침내 풍납동에 있는 서울중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설마 했는데 검사결과는 악성 뇌종양이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한다 해도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에겐 사형선고였다. 어떻게 우리 복신이가 그런 몹쓸 병에 걸렸는지, 왜 그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수술을 해도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니….


지금껏 한 번도 찾지 않던 부처님을 부르며 빌었다. ‘제발 복신이를 살려달라’고. 35년을 살아오며 한 번도 종교를 갖지 않았던 내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복신이가 뇌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방사선 항암치료를 병행하며 치료를 계속하는 동안 나는 부처님께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그때 나는 작은 영업소에서 판매영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담당하던 지역에는 옥천암이라는 사찰이 있었고, 그 절에는 개천가에 관세음보살님을 모셔놓은 기도처가 있었다. 내가 하던 일이 제 구역만 관리하면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이었기에 부지런히 움직이면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에 가서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 장마철 흐르는 눈물 빗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혹한에도 오직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렸다. 그렇게 매일 기도를 드리게 된 지 1년이 넘었고 직장을 옮기게 됐다. 더는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자 기도처를 집으로 옮겨 기도를 계속했다. 관음 3대 성지인 보문사, 홍련암, 보리암 그리고 갓바위 부처님 등 좋다는 기도처는 몇 번씩 찾아다니며 기도를 했다. 그러기를 3년여. 부처님의 가피력이었는지 우리 복신이는 별 문제없이 지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복신이의 머리에 종양이 재발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는데 부처님께서 이러실 수 있을까 싶었다. 내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의지할 분은 오직 부처님뿐이었다. “내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일 거야”라며 마음을 추슬렀다.


병이 재발한 복신이는 항암치료를 시작했고, 또다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지탱해야 했다. 난 기도처를 찾아다니며 밤샘기도를 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복신이가 꼭 완치될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복신이가 잘못된다면 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1996년 4월 어느 날, 주치의 선생님께서 MRI 촬영결과를 확인하시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기도를 드리며 좌절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져 먹었지만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직장을 그만두고 좋다는 약, 좋다는 기도처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다시 보리암으로 기도를 다녀왔다. 3일간 정성스레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복신이는 날로 병이 악화됐다. 5월 14일 갑자기 숨이 멈춰 버리더니 죽음의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져 갔다. 아내와 내 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복신이를 보며 나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복신이는 괜찮아. 깨어날 거야’라는 생각뿐이었다. 의료진들이 몰려와 응급조치를 하기 5분여 심장이 멈추었던 복신이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복신이는 괜찮아, 부처님이 지켜주시는데 잘못될 리가 없지’하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의사들은 한결같이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병원법당에서 기도를 하며 복신이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매일같이 밤을 꼬박 새워가며 삼천배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복신이의 호흡이 또 멈췄다. 의사들이 이제 더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 때마다 복신이는 소생했다. 의사들은 가망이 없으니 고통을 덜어 편하게 해주는 게 좋겠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그 후 또다시 두 번씩이나 호흡이 멈추었고 의사들은 한결같이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신이는 그때마다 소생했다. 의사들은 그런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듯 놀라워했다. 복신이의 병이 더욱 악화돼 입에서 피를 쏟기 시작했고, 그 순간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복신이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의사들 말대로 복신이를 편히 보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복신이는 다섯 번의 소생을 거듭하다 생을 마감했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다시는 못 올 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복신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곧 죽을 것만 같은 순간을 겪는다.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나마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건 부처님 가르침 덕분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피안에 이르는 길을 믿고 윤회와 인과를 믿고 있기에 삶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내가 삶을 포기한다거나 어리석게 남은 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빠에게 불심을 심어주고 간 복신이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것일 게다.


나는 지금 복신이 덕분으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 법을 만날 수 있도록 포교전단을 제작해 전법활동을 하고 있다. 장기기증도 했다. 부족함이 많은 중생이라 이웃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는 듯하지만 멈추지 않고 부처님 말씀 전하는 일에 남은 생을 다 바칠 계획이다. 복신이를 생각하며 약해지는 믿음과 의지를 다진다. 복신이의 거룩한 희생을 결코 헛되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전에 다짐한다. 불제자로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 신행수기 공모 당선작 가운데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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