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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수행자를 비춰주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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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06-18 00:07 조회2,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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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를 받아 공부할 때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고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아라. 더 생각할 수 없는 곳에까지 다다르게 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소의 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고 따지고 맞춰보는 것이 알음알이며 생사를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알음알이며 무서워하고 갈팡질팡 하는 것도 알음알이다.

화두를 공부하는 데에 열 가지 병이 있다. 분별로써 헤아리는 것, 눈을 끔뻑이는 것, 언어에서 길을 찾으려 하는 것, 글을 끌어다가 증거를 삼으려는 것, 화두를 이론으로 알아맞히려는 것,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일 없는 곳에 들어앉아 있는 것,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아는 것,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아는 것, 도리가 그렇거니 하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 조급하게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들이다. 이 열 가지 병을 떠나 화두에만 정신을 쏟아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 속에 파묻혀야 한다.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만든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한 번 꿇어보아라. 그러다 보면 들어갈 것이다.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게 하듯이 해야 한다. 너무 팽팽하게 하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나지 않듯이 너무 애써 공부하면 병이 나기 쉽고, 게으르면 무명(無明)에 떨어진다.

참선하는 이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 즉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나라의 은혜, 시주(施主)의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 즉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이 순간순간 썩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나 조사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는 기쁘고 다행하다는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장소를 떠나지 않고 수행자로서의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남과 시비를 일삼지는 않는가. 화두가 항상 똑바로 들리고 있는가. 남과 이야기할 때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가. 보고 듣고 말할 때도 한 생각을 이루고 있는가. 자신의 공부가 부처나 조사들을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반드시 부처의 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편안하게 생활할 때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런 것을 참선하는 이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점검하여야 한다.

때 묻은 마음을 버리려 하지 말고 자기의 마음을 더럽히지 마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버리는 일이나 찾는 일이나 다 더럽히는 일이다.

모름지기 마음속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 보아서,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 없는데 다시 무엇을 끊을 것인가.

경에 이르기를 “무명을 끊는다는 것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하였고 또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하였다.

천진무구한 본바탕의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수행이다. 만약 수행할 때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망상이요,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망상 내지 말라. 망상 내지 말라”한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늘 뒤만 돌아보는데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경을 읽되 자기 마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어리석게 공부함을 깨우친 것이니 마치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우는 것처럼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규봉 선사가 이르기를 “글이나 알고 경이나 보는 것으로는 깨칠 수 없다. 글귀나 새기고 말뜻이나 풀어보는 것으로는 탐욕이나 부리고 성을 내며 못된 소견만 더 일으키게 된다”하였다.

수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나 부리며 서로 이기려고만 한다면 변소에 단청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말세에 어리석게 수행하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수행이란 본래 자기 성품을 닦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생각일까.


『선가귀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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