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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이라는 맥이 흐르는 닭실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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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작성일07-06-18 00:02 조회2,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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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과 조화 어우러진
삶의 근원지, 그곳에서
닭실종가는 맥을 이어가고 있다.


봉화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백두대간이 동에서 서로 허리를 트는 태 . 소백산이라는 양백의 틈바구니에 있어 예로부터 길지로 통하고 있다. 전란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과 골이 깊은 만큼 가뭄과 물난리가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산의 남쪽 자락에 있어서 영남의 북쪽 경계지역이면서 들판과 산악이 만나는 자리에 있다. 그러다보니 초월을 지향하는 선불교와 현세적인 유교문화가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선불교는 태백산이 남쪽으로 내리뻗은 각화산 동암, 홍제골의 홍제사, 도솔암에는 무수한 선객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또한 각 마을은 문중을 이루어 글을 익혀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중앙정계로 나아갔지만 다수는 은림처사(隱林處士)를 지향하며 평생을 글을 읽고 지역민을 교화하며 살아갔다.
20세기가 확대성장이었다면 금세기는 만남과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은 그런 의미에서 ‘어우러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새로운 대안으로서, 문화와 생활의 재발견으로서 마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합과 집중이라는 거대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분산과 조화라는 마을이 가지는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을 기행 시리즈에서 이것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인 것을 안다. 다만 개성과 조화가 충돌하지 않게 어우러지는 삶의 근원을 간직한 마을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신념이라는 맥이 흐르는 닭실 종가
닭실 종가는 많은 유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랑하는 것은 유형적인 것이 아니다. 조상의 정신을 계승해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유교적 신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정신이다. 박물관에 가면 5백여 년 된 충재 권 벌 선생의 과거 답안지가 전시되어 있는데 귀퉁이가 검게 곰팡물이 들어있다. 이는 한국전쟁 때 유물 훼손을 막으려고 단지에 담아 땅에 묻으면서 습기가 찼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대의 유업을 자손에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은 전쟁 시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종가에 대가 끊겼다. 종부에게 양자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윤씨 문중 가운데 고산 선생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이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종가의 종손은 선대의 유업을 지키고 물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길러지기에 어떤 난세에도 흔들지 않는 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종가의 유래

돌아가신 조상의 위패를 4대까지만 모시고 5대가 되면 위패를 사당에서 철거하는 것이 예법이다. 학문과 덕행이 빼어나 나라에서 지정하는 분들은 위패를 철거하지 않고 제사를 영원히 모시게 되는데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 선생이 이에 해당된다. 닭실 마을의 큰 어른이신 충재 권벌 선생은 충절과 인물됨이 나라에서 인정되어 지금까지도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와 같이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라 하는데 이를 모시는 집안을 종가(宗家)라 하고 그 자손을 종손(宗孫)이라 하여 그렇지 못한 집안인 주손가(主孫家)와는 엄격하게 구별을 두고 있다.



글이 끊어지지 않는 닭실 문중
돌아가신 조상의 유업을 이어받아 후손에게 잘 물려주는 것이 사대부가의 할 일이다. 부모를 섬기는 게 최고의 덕목인데 그 이름을 후대에 날려 훌륭한 조상을 빛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이다. 그 가운데 대과(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서는 게 문중을 빛내는 길이다
권벌 선생 사후 5대가 내려오면서 지역 토반(土班)에 머물러 있던 닭실 문중은 창설제 권두경 형제에 이르러서 크게 도약하는데 사형제 중 세 명이 대과에 합격하면서 닭실 문중은 영남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대과 급제자가 이어지면서 세인들 입에서 닭실 문중은 글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글은 도리(道理)를 품고 있어 바른 글은 올곧은 길로 이끌어 제대로 된 생각을 키우게 한다. 결국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됨됨이를 길러내는 것인데 읽고 또 읽으면 글이 뼈에 사무치게 된다. 나무가 뿌리를 박고 줄기를 세우면 자연스럽게 꽃피워 열매 맺듯이 글이 된다고 함은 처신이 자유로우면서도 근본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름 하여 뼈대가 섰다는 것이다.
근본이 선 삶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에서 나온다. 그래서 글을 읽고 또 읽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 말과 행동으로 배어나오게 된다. 보고 듣는 게 글이며 이것이 언행으로 드러나 있기에 어린아이는 선대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바른 도리를 익혀나가는 과정이 된다. 이것이 사대부 가문의 가풍인데 이것이 살아있는 것을 일러 글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닭실 종가의 전통은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대의 언행을 아이들은 저절로 습득하게 되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가풍이라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근사제의 유래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역(易)이라고 주역은 얘기한다. 이 순간의 활발함의 뿌리는 돌아가신 조상에서 나오고 방일하여 놓치지 않음은 다가올 미래인 후손에 있다. 결국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찰나간이라는 존재의 보편적 원리가 여기에서도 분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바뀐다는, 정체되지 않고 언제나 살아있음이 역(易)의 이치이다. 여기에 맞게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보편적 원리에 조응하여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시켜 나가는 것이 사대부의 덕목이었다.
궁중 연회가 끝난 뒤 근사록이 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중종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모두들 충재 권벌의 책이며 언제나 소매에 지녀 읽고 있다고 얘기하자 모두의 귀감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충재 선생은 평생을 근사록에서 손을 떼지 않고 살았는데 이는 모든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삶이었다고 한다. 퇴계는 소학을 3년 동안 읽는 등 읽고 또 읽어서 스스로를 새롭게 가다듬어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인 묵객들이 묵는 객사의 이름을 근사제라 명명한 것은 평생을 대쪽 같이 살아가신 충재 선생을 기리는 뜻도 있지만 시대 정신의 고취라는 측면 또한 강하다.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말 사대부들은 종교의 병폐를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집권을 하자 강력한 억불 정책을 펴나갔는데 이는 종교적 주술이 사회적 주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가 이성적으로 한 단계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을 반대했던 일부 세력은 낙향하여 제자들을 길렀는데 이들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합리적인 공동체로 탈바꿈 시키려고 하였다. 충재 선생은 향촌 문화운동이 성숙되어 나타난 결과로 출현한 신진 사림세력 한 분으로 조선사회가 독서등 합리적 통찰을 통한 자기 수양이 시대정신의 주류로 자리 잡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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