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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축서사를 창건한 의상 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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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세 작성일06-08-09 15:39 조회2,6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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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세 (경북불교대학 강사)

1. 의상대사는 어떠한 스님인가

조사님은 불교역사(佛敎歷史)가 이룩한 세계적인 인물이며 인류정신문화에 디딤돌이 된 분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불교의 수행자상으로서 귀감이 되며 불교신자들에게 희망과 원력을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외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환한 빛이 되어 인로왕(引路王) 역할을 하셨다. 우리들은 이 글을 읽고 조사님을 바로 알아 삶의 귀감으로 삼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하여 조사님의 구도정신(求道精神)에 따라 바른 수행을 행해야 한다. 나아가 축서사를 창건하신 높은 뜻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조사님은 중국 지업스님 문하에서 8년간을 화엄학을 공부한 뒤 발표하신 법성계는 화엄사상을 총괄한 것으로, 모든 중생의 마음이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도량(道場)이라는 것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5대양 바닷물로 먹을 삼고 수미산으로 붓을 삼아도 모자란다는 부사의해탈의 화엄경을 단 7층(칠언) 30구의 210자로 심심미묘한 뜻을 표현하였으니 이는 조사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대문장이다.
조사님은 신라 화랑의 최고지도자이신 안함스님에게 출가하여 자장율사에게 계(戒)를 받았으며 고종사촌형님인 원효스님과 함께 랑지(朗智)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 고구려 보덕(普德) 화상을 찾아 높은 법문을 들은 뒤 한국불교를 크게 발전시킬 대원을 세우고 중국의 선진불교를 배워 올 꿈을 키웠다. 중국에 가서 화엄학을 배운 조사님은 세계적인 대선지식(大善知識)이 되어서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큰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사님의 행적과 수행을 살펴보면 여래(如來)의 화신이고, 금강보계여래의 화현이시다. 세속의 여인의 관계에 있어서도 세 사람의 여인이 있었으니, 사실상 약혼녀였던 이종 사촌누이 묘화(妙花)와의 사랑의 싹을 물리쳤고, 승만 공주와의 끈질긴 짝사랑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국 여자 선묘(善妙) 아가씨의 목숨을 건 세속적인 구애조차도 그 마음을 돌리게 했다. 단월을 만들어 영생(永生)토록 함께 있게 한 청정수행자(淸淨修行者)로서의 모범(模範)을 보이신 것을 우리는 배워서 실천(實踐) 수행(修行)할 계행(戒行)이라 할 수 있다.


2. 스승과의 만남
국내에서는 안함스님, 자장율사, 원효대사, 낭지스님, 고구려 보덕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아 초발심을 일으켜 구도(求道)의 싹을 틔웠고, 당(唐)나라에 가서는 지엄스님 문하에서 8년간 화엄학을 배웠다. 그리하여 스승을 능가하는 선지식인으로서 사실상 화엄종의 제 3조라 할 수 있다.
남필종(南必宗)의 도선율사를 만나 질의문답을 하였다.


3. 업적
귀국하시어 양양 낙산사, 울진 불영사, 영주 부석사, 축석사, 초암사, 숙수사(소수서원자리)를 위시하여 화엄 10찰 외 10여 개 사찰을 창건하셨고, 10대 제자와 300명의 제자를 길러 대덕스님을 만드니 화엄 10성이라 한다. 우리나라 조사들 중에 제자를 많이 양성한 스님은 의상조사 뿐이다.
신앙에 있어서는 관음신앙과 미타신행을 신봉(信奉)하시었으니 양양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와 홍련암을 지었으며, 부석사와 축석사 주불(主佛)은 서방에 화정하시었으니 미타신행을 얼마나 신봉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사님은 화엄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선지식인데 의상대사의 제자라고 자부하는 불교신자들이 화엄사상을 배워 알고 있는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다시 한 번 각성하여 의상조사님의 가르침대로 신행을 하여야 한다. 조사님은 그 시대(時代)에 알맞은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권장하여 심어주었고 보현행원의 실천자일 뿐 아니라 만세가 흘러가도 손색이 없는 덕 높은 가르침을 펼쳤다. 그런데도 그 가르침의 근본 뜻을 1300여 년이 지나도록 신행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4. 의상조사님의 생애와 가족 관계
조사님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資料)는 전기미상의 부석본비를 중심으로 최치원의 부석존비의상전,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송구승전 등 여러 권이 있으나 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조사님은 서라벌 계림 출신으로 아버지 한신장군의 아들로 625년에 탄생하였다. 어머니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2대손으로 세덕공의 딸 선나부인(先那夫人)이다. 조사님이 태어날 때 태몽에 하늘에서 밝은 해가 솟아오르고 땅에서는 붉은 지초(芝草)가 솟아나 밝은 빛을 밝혔으니 이름은 일지(日芝)라 불렀다. 세살 아래 여동생 소희(素姬)가 있었다.
집은 양산촌 박혁거세의 묘지 5릉을 거쳐 흥륭사 북쪽에서 살았다. 선나부인은 30대에 일찍 타계하고 학신공은 고종 사촌누이인 박정훈공의 딸 월아(月芽)를 후처로 삼았다. 자식으로는 윤필(尹弼)과 문희 남매를 얻었다. 윤필은 문경군 대승사 옆에 윤필암(四佛庵)을 지어서 수도를 하였다. 지금도 많은 참배객이 오고 있는 수도도량이다.
월아부인은 한산공의 경호원인 복덕이와 사통하고 박기문과도 사통하니 그 소행을 알아차린 의상대사의 친누이 소희를 타살하였다. 이러한 죄로 복덕이와 박기문은 사형 당하고 월아 부인은 징역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의모인 월지부인은 일찍이 홀로 되어 외동딸 묘화(妙花)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월지를 친아들처럼 돌봐주며 사윗감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실상 월지의 처음 약혼녀였다.
또 한사람은 국빈공의 딸 승만 공주가 있었는데 월지를 사모하고 있었다.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 때는 당나라에 사은품을 보내는 중에 처녀 다섯 명을 함께 보내는데 묘화와 일지 사이를 떼어놓기 위하여 묘화를 선발하여 보내니 묘화는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다가 상륙직전에 바다에 투신자살 하였다.
전설에는 선묘는 묘화가 윤회하여 중국에 태어나서 의상대사를 만나 전생에 못 다한 사랑의 정을 또한번 구애(求愛)하였다는 말이 전해지니 인연이란 얽히고 설켜있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5. 출가(出家)의 의지(意志)
조사님의 출가설(出家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27세 출가라는 말도 있으나 부석본비에 초세(草歲) 출가라고 하였으니 초동(草童)출가, 즉 15세 출가를 말한다. 그 당시 서라벌 사람들의 출가 연대를 보면 원강도 13세, 원효와 자장도 15세이니 서라벌의 초세출가의 관습이었다.
일지(의상)는 초세의 나이에 겪은 주위의 기구한 운명을 보고 허무한 세상의 무상을 느끼게 되어 고민에 쌓여 출가할 결심을 했다. 30대의 꽃다운 나이에 맞이한 어머니의 안타까운 죽음, 아버지의 패전으로 인한 강등, 계모에게 맞아 죽은 여동생 소희의 죽음, 복덕이와 박기문과 계모의 죽음, 묘화의 투신자살 등 모두가 슬픈 괴로움이어서 산중(山中)에 들어가 큰 스승을 만나 불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황복사에 주석하시는 안함스님을 찾아가서 출가의사를 밝히니 안함법사는 장시간 법문을 하여 주시면서 법화경의 묘음보살품을 읊어 주신다.


끝이 없는 세계에 풍진은 소진하고
수 없는 중생의 업보가 아득하구나.
애욕의 바다 물결이 도도한데
그래서 그 이름을 무진이라 하였던가.


정녕 그대가 출가할 결심이 섰다면 부모님과 임금님의 승낙을 받아오라하여 아버지 한신장군에게 출가의사를 전하니 기꺼이 승낙하였다. 승만왕을 찾아 가니, 출가를 승낙하며 대도를 성취하여 불국정토를 이루어 달라고 격려해 준다. 승낙을 받고 어머니와 소희의 묘에 참배하니 눈물을 흘리면서 명복을 빌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난 후 시(詩) 한 수를 읊었다.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에 감사 드리고
속세의 인연의 고(苦)를 영원히 끓으려고
머리 깎고 먹물을 갈아입고자 합니다.
굳은 맹세 깊은 신심 다짐하면서
묘 앞에 엎드린 의상의 눈에 두 줄기 눈물
어머니와 도생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대도를 이루어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렇다. 한 사람이 출가하면 9족이 천상에 태어나는 공덕이 있지 않는가. 집으로 돌아오니 윤필 남매와 10여 명의 하인들이 반가이 맞아 매달리며 법문 들어 깨치고 싶사오니 인도하여 달라고 한다.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평민으로 만들어 주고, 재산을 정리해 각자 분배하여 살도록 해 준 다음, 살던 집을 ‘기원사’라 칭했다. 이 절에서 어머니와 소희, 묘화 외에 죽은 여러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 주게 하고, 황복사 안함스님을 찾아가니 일지의 수계를 황복사에서 하지 않고 황룡사 금강계단에서 수계하기로 한다. 수계를 받을 때 자장율사가 전계아사리, 안함법사가 교수아사리, 국교대덕이 갈마아사리가 되어 계(戒)를 받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승만왕도 나와 증명해 주었다. 안함스님은 법호를 의상(義湘)이라고 지어 주시며 법문을 하시니,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을 보지 못하므로 윤회에 매달려 살고 깨달은 사람은 한 생각 이전의 생각 없는 곳에 살므로 생사대사와 흥망성쇠에 좌우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도(道)는 누구에게 의지하여 닦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밝히는 것이다. 대도를 이루어 이 나라에 불교를 크게 발전시켜 달라고 당부하시면서 만일 가는 길에 장애가 있으면 남쪽 영취산에 가서 효(曉) 자(字)를 든 사람을 벗 삼고 지(智) 자(字) 든 사람을 스승삼아 공부하라고 당부하시며 말을 마치자, 그 자리에서 좌탈입망(坐脫入亡)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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