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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자비와 화합의 공동체, 승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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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총스님,김태완,손정현 작성일06-06-11 17:56 조회2,5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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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가정

오월,
눈부시게 푸르른 빛이
밝아오는 신록의 계절
우리 곁에 부처님이 오셨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
출가와 재가
모두를 아우르는 법의 향기
나에서 가족과 세상, 그리고 우주로
드넓게 퍼져갑니다.
일체가 하나됨을 위하여
불법과 가정의 의미를 짚어 봅니다.

하나
- 자비와 화합의 공동체, 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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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총 스님 (감로사 주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점점 분리되고 개인화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라 하여 심지어 민족의 동질성마저도 상실되고 있고, 가족공동체가 급격히 붕괴되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중심이 되던 과거와는 달리 사회는 부부 중심의 가정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정신문화보다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한 서구의 물질문명을 숭배하면서 이루어진 필연적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분리와 개인화는 현대사회에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스님에게 털어 놓는 신도들의 가정사를 들어 보면 권위와 평등주의의 대립에서 오는 가치관 혼란과 세대간의 갈등, 부부이혼, 소외되는 자녀들의 심리적 불안, 가족 이기주의로 형제나 친족으로부터 고립되는 가정, 핵가족으로 인한 노인의 빈곤과 자살 등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런 대부분의 문제는 각각의 존재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상호연관성이 전혀 없는 분리된 개개의 객체로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각자의 평등을 요구한다면 위의 문제는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고 봅니다. 불교적 입장에서는 가족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개개의 업과 연기(緣起)에 의해 만나진다고 봅니다. 우리들은 영겁의 세월 이전부터 지어온 업에 따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지 않고 분리 속에서 평등을 구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마치 불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타오르는 불을 알지 못함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이전부터 함께 살아온 인연이라는 점을 서로 인정하는 데에서 삶의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화합의 구조 속에서 상호존중과 평등의 문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화합을 중시하는 불교공동체 상가(Samgha)의 정신입니다. 그렇다고 승가가 그냥 두루 모여 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화합을 하되 부처님과 진리[]를 섬기며 올바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화합 단체입니다.



왜 부처님께서 그토록 제자들에게 화합을 강조하셨는지 그 논리의 근간을 살펴보면 위와 같이 우리의 존재가 하늘에서 어느 날 문득 뚝 떨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겁의 세월을 흘러온 동업중생이기 때문에 더불어 진리를 좇아서 더 이상 서로서로 나쁜 업을 짓지 말고 숙업을 소멸해 좋은 인연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속의 여러 문제도 이와 같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바른 견해가 열리면 자연히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승가는 화합이 그 전제 조건이므로 이화(理和)와 동화[事和]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화란 서로 탁마하여 진리를 함께 증득한다는 뜻이고, 동화는 곧 육화경행(六和敬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화경행이란 첫째, 몸으로 부처님 행을 하여 화합하고 둘째, 입으로 부처님 말을 하여 화합하고 셋째, 뜻으로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며 화합하고 넷째, 바른 행동을 하여 화합하고 다섯째, 바른 견해를 가져 화합하고 여섯째, 자기의 해탈을 위해 노력하고 수행해서 자기를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충실하여 화합하는 것입니다.



『대지도론』 권3에 보면 화합 승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승가라 하는가? ……비유하면 큰 나무가 무더기로 모여 선 것을 숲이라 이름과 같나니 낱낱이 서 있는 나무는 숲이라고 하지 않으나 낱낱의 나무를 제하면 또한 숲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낱낱의 비구를 제하고는 또한 승이 없나니 모든 비구가 화합하므로 승이란 이름이 생기느니라.




승가는 부처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다섯 명의 제자가 생기면서 형성됐지만 출가와 재가생활을 하는 남녀 불교도 전체를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승가의 정신은 스님들만의 대중문화나 정서로 국한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다섯 비구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의(歸依)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귀의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큰 서원입니다. 이 서원은 부처님과의 약속이며, 진리를 구하며 오로지 진리에 의지해 살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부처님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근본으로 하는 승가의 가풍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알아서 어떻게 온전한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를 사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고 견디며 얽힌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사바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상의 존재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같이 위대하며 존중되어야 할 존재라는 점에 눈을 떠야 합니다.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는 절대평등의 인연이라는 인식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 악업을 짓지 않는 관계가 되고 그 속에서 참다운 길을 함께 추구하고 열어가는 의지처로서의 도반이나 동반자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호 존재의 위대성을 인정하고 나면 저절로 매사에 겸손해지며 하심(下心)하는 마음을 쓰게 되니 스스로 선업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게 됩니다. 그 길이 바로 업장소멸을 위한 참회수행이고, 다시는 업을 짓지 않으려는 계율수지의 착한 삶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그렇게 화합하며 스스로 대중 앞에 참회하면서 참다운 행복의 세계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불교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소중하게 바라보고 존중할 때 자기의 진참회가 이루어지고 착한 삶이 열리게 되며 세상을 위해 보시하고 공양 올리려는 거룩한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승가의 정신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거울이라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 재가자의 수행


김태완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인 불제자는 재가든 출가든 그 가르침을 따라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학생의 본분이 학문을 배우고 익힘인 것처럼, 불교에 입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의 본분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불제자가 되려면 이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활동이 교실에서의 공부만이 아니라 견학이나 소풍, 봉사활동도 있고 취미에 따른 과외활동도 있듯이, 불제자도 순례를 가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여 활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어디까지나 본분인 공부에 부수되는 과외활동이요 여가활동일 뿐이므로, 본분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과외활동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불제자는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 분별망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본분인 공부와 과외활동이 하나가 되면 더욱 좋습니다. 과외활동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과외활동을 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언제나 공부하는 불제자로서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불제자의 기본자세는 바로 하심(下心)입니다. 하심이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것이 바로 하심입니다. 하심하는 사람은 모든 허물이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길이 곧 불도(佛道)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길은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깨달음은 지금 눈앞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인 실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내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고 모든 법들은 한결 같이 마음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은, 세계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스로 분별에 빠져서 실상을 따로 찾고 망상을 따로 버리려고 하며, 마음을 따로 찾고 경계를 따로 버리려고 합니다. 요컨대 우리가 중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스스로 이런 분별에 빠져서 스스로의 생각에 속아 이런저런 모습을 취하고 버리고 하기 때문입니다.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지 않는다면 본래부터 한결같이 깨달음이고 한결같이 반야이고 한결같이 부처입니다. 이런 분별망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불제자의 본분인 깨달음 공부이고, 깨달음 공부가 곧 불도입니다.


불제자들이 불도가 아닌 길을 불도라고 착각하는 것에는 흔히 두 가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불교에서 세속의 복을 찾는 경우이고, 하나는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이상하고 기이한 일을 불도라고 여기는 경우입니다.

불제자라면 자신의 본분인 깨달음 공부를 하여 세속의 갈등에서 해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좋음을 취하고 나쁨을 버리는 것은 불도가 아닙니다. 세속의 복을 찾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복을 찾는 것을 불도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찾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행하는 일입니다. 보다 나은 삶을 바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속의 복을 구하는 것은 좋음과 나쁨을 분별하여 좋음을 취하고 나쁨을 버리는 것이므로, 분별을 떠나 깨달음을 찾는 마음과는 다른 길입니다. 세속의 복을 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분별심에 의지하여, 분별심이 주는 지혜의 도움으로 복을 구하는 것일 뿐이고 이것이 불도는 아닙니다.


절을 도량(道場)이라고 합니다. 도가 있는 장소라는 뜻으로서, 깨달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도량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불이문(不二門)을 지나야 합니다. 불이(不二)란 곧 둘로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량에 들어왔다는 것은 곧 분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몸으로는 불이문을 늘 드나들지만, 마음으로 불이문을 들어간 적이 과연 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불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마음으로 불이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불이문을 통과하여 들어간 도량에서는 좋고 나쁨의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에 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몸으로만 불이문을 통과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불이문을 통과하여 깨달음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불이문을 통과하면 온 우주가 그대로 도량이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국토입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으므로 평소에 보지 못하는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하면 쉽게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집니다. 이처럼 기이하고 이상한 일에 눈길이 가는 호기심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늘 보고 듣는 일상적인 일들은 세속적인 것이고, 뭔가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야말로 부처님이 나타내는 표시라고 여기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조금의 지혜도 없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상한 일을 구경하러 간다고 하면 납득이 되지만, 이것을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고 부처님이 행하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요, 착각입니다.


부처님은 정해진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부처님의 모습이고 저것은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모습으로 말하자면 온갖 모습이 부처님의 모습 아닌 것이 없고, 행하는 일로 말하자면 온갖 일들이 부처님이 행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마치 온 우주가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같이 하나의 허공이듯이, 우리가 평소에 보고 듣고 행하는 일이 모두 부처님의 일입니다. 바로 지금 눈앞의 허공이 우주이듯이, 바로 지금 눈앞의 일이 부처님의 일입니다. 평소의 일은 세속사이고 특별한 일이 불사(佛事)라는 것은 오로지 중생의 어리석은 분별심일 뿐입니다.


재가자의 수행이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면 가정 내 가족구성원의 신행생활도 바르게 이어져나갈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내 가정에서부터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건강한 수행,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사회 전체의 변화는 예견된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재가자의 바른 수행과 정진이 더 없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과 가족



손정현 (불교텔레비젼 총괄국장)



‘수행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



사회변혁을 위해 소리높이 외치던 대학 시절에 작자도 함께 즐겨 불렀던 운동가요가 있다. 그 노래의 가사를 옮겨보면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라는 노랫말이었는데 가슴에 오래 남아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목숨쯤은 걸어야 하지 않느냐, 대충해서는 이도 저도 아닌 게 된다는 비유와 각성의 노래였다.




대학시절을 보내고 만난 불교는 작자에게 또다시 목숨 걸 것을 요구하는 듯했다. 불교를 접한 이들의 경험은 어떤 절차를 가지는 듯싶다.



먼저 인연에 의해 불교를 접하고, 그 가르침의 깊이와 넓이에 놀라며, 나도 부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발원이 생기고, 이것저것 물불 안 가리는 강단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좌충우돌 속에서 좌절과 허탈을 맛보며 공부가 익어지면 한숨 돌리며 다 놓아 버리는 일도 생긴다.




대학 졸업 당시,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비에트 사회가 붕괴되고 평등세계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불교운동’이라는 대안을 찾아 허전한 마음을 의탁할 때도 불교를 뒤집어쓰고 사회를 바꾸자는 외피론적 운동론에 빠졌었다.



하지만 불교를 공부하며 만난 부처님 사상에서, 학생운동 때 느꼈던 논리적 모순이 극복되며 부처님 가르침이 사회를 바꿀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이 섰다.



내가 느낀 불교의 매력은 ‘알면 알수록 답답하며, 발을 디뎌 넣으면 관성처럼 빨려 들어가고, 적정한 시기에 올인하게 만든다’는 데 있었다.



그간 불교 속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불교교육원을 운영해보기도 하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법의 실체를 규명하려 목숨을 걸듯 애쓴 시기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가정은 별개처럼 여겼다. 불법을 공부하는 나에게 있어 가정은 불보살님과 신장님이 외호해 주실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불조의 가르침을 편향된 방향으로만 해석하여 ‘버리고 버리는 가운데 도가 있으니 물질을 가지지도 말자. 이것은 큰 악이며 독사의 아가리이다’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깨달음은 저 먼 산에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으며, 깨닫기만 하면 그간의 모든 고통은 일시에 보상 받는 걸로 생각했었기에 집과 직장 속에서 살지만 생각은 늘 산에 가 있었다. 임신한 아내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기도 했으니 깨달음의 귀신이 단단히 붙은 것이었다. 불을 피우면서 물을 뿌리는 것과 같은 모순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가정은 갈수록 궁핍해도 때가 되면 불보살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확신은 나에게만 적용되는 환영이었지 가족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식은 아니었다. 인과가 우리 가정만은 피해갈 것이라 여기는 가운데, 복덕은 다만 더디 오는 것뿐이라는 확신은 우리 가족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다 본 그간의 세월을 무의미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보면 ‘나의 내생(?)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겠구나’하는 뿌듯함도 그간의 삶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법을 이야기하심에 노심초사하시는 것은,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모순된 양 극단의 전철을 밟지 않고도 성불할 수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 재가불자는 수행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가정은 어떤 건지도 말해보고 싶다.



먼저 수행함에 있어 얼마간의 오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행은 공식이 아니기 때문에 삶의 종류만큼 다양한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 오류 속에도 길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을 어찌 오류라 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불자들은 중요한 몇 가지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다.



첫째, 깨달음에 대한 환상이다. 깨달음은 어떤 정갈한 상태가 아님에도 깨달음의 자리를 찾는다. 맑고 맑아 고요한 상태를 상정하기도 하고, 어떤 환상적 경지를 찾아 분주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란 것이 산()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앞서 나의 경우를 빌어 지적했듯이 깨달으면 인과쯤은 장난이라 여기는 듯하다. 없는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긴다고 여기며, 누구도 자기를 어찌하지 못하는 불사신으로 여긴다.


셋째, 수행에 대한 환상이다.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 이렇게만 하면 된다, 이 길이 유일한 길이다 라는 확신이 가지고 그 길만 고집한다. 물론 그 확신도 무너져 다시 다른 확신으로 전이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세 가지 대표적 전제가 수행을 하면서 스스로를 어둡게 하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가 어두우면 공부에 방해되고, 그 과정이 길어지면 가정 또한 힘들어지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전제들을 포기하고 수행은 자신의 인식의 틀들을 부수는 작업임을 이해한다면 어디든 도량 아님이 없는데 우리는 도량과 도량 아님을 굳이 나누려 하는 것이 문제다. 수행이 하나의 가치라면 가정도 하나의 가치이며, 산에 법이 현현한다면 가정에도 법이 드러난다.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진리는 보편적 성격의 산물이라 두루 편재해 있기에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진리가 저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법은 나를 보는 것이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산에서든 세속의 재가 가정에서든 법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나를 들여다봄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다만 약간의 오류를 양념삼아 그것이 늘상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줄만 알면 오류 또한 큰 약이 된다.



법이 한 모양으로 나타남이 아니니 다만 ‘이것만’이라는 전제를 포기하면 이곳과 저곳에서, 산에서든 세간에서든, 출가든 재가든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수행을 잘하면 가정이 원만해질 것이고 가정이 원만하면 수행이 익어갈 것이다. 이것을 작자의 경험처럼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적절히 활용해 나가면 삶의 큰 에너지가 될 것이라 여긴다.


부처님 또한 팽팽한 수행자에게 수행은 느슨한 것이라 일렀고 느슨한 수행자에게 수행은 바짝 조이는 것이라 일렀음을 상기한다면 자신의 상태와 조건 속에서 지혜롭게 맞추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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