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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용서는 남에게 비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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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현숙 (보덕행·경기도 광명… 작성일05-12-28 20:31 조회3,0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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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는 나와 상극이다. 땀이 흐르면 온몸이 끈적끈적해지고 나도 모르게 스르륵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화탕지옥이 나는 제일 무섭다. 절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민소매 옷을 입어도 무더운 여름날에 가사 장삼을 겹으로 휘휘 두르고 계시는 스님들을 볼 때면, 아…나는 죽어도 출가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 자연시간에 돋보기로 실험한 기억,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 돋보기로 나는 죄를 지었다. 부처님 법을 몰랐다면 ‘그 땐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노라고, 죄인 줄 모르고 그랬노라’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모르고 지은 죄는 참회를 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우므로, 모르고 지은 죄가 더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을 해치는 것도 오계를 범하는 죄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볕 좋던 봄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돋보기로 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며 놀다보니, 지나가는 개미가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없이 슬그머니 돋보기를 개미에게 들이대니 방금까지 바쁘게 왔다갔다 하던 개미들이 이내 꼼짝을 못하고 타 들어갔다. ‘와, 돋보기 참 힘세다… 한 번 더… 한 번 더…’ 그러는 사이에 더 많은 개미들이 타 죽었다.


첫 직장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창문이 없는 유리벽으로 지어졌던 그 회사는 경비절약을 이유로 여름 내내 에어컨을 틀어 주지 않아 몇 개 안 되는 선풍기마저 직원들이 나눠 쓰느라, 책상에 앉아 있으면 뜨거운 열기가 얼굴과 온몸으로 끼쳐 왔다. 그 해 그 힘들었던 여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처럼 괴로웠다. 세월이 흘러 나는 불자가 되었고, 어느 날 문득 초등학교 때의 그 일이 떠올라 불구덩이에서 죽어간 개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의미에서 보시를 하기도 했다. 또 생각이 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잘못을 빌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더위가 무서운 건 변함이 없고, 무덥고 습한 날씨가 되면 만사가 귀찮다. 그 개미들이 아직도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것일까. 내 반성이 모자라서일까. 용서를 빈다는 것은 나 이외의 대상을 향해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어쩌면 진정한 용서는 스스로가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지어놓은 업을 다른 누군가가 용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없어지는 건가. 스스로의 잘못을 느끼고 사무치게 참회할 때에만 비로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 사실 천수경을 읽어보면 그 이상이다. ‘죄무자성 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 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 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 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죄에는 자성이 없는데 단지 마음을 따라 일어날 뿐이니 ‘내’가 없고, ‘죄’가 없고, ‘없다’는 마음마저 비워버리는 것이, 즉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고 했다.


진정한 참회만이 참된 용서일 것이다. 용서를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도 ‘내가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 불자로서,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의 모든 과정이 수행이 되어야 하고 수행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진정한 용서를 비는 일도 수행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재가자로서 수행의 어려움을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 그 여정의 끝에 다다르는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귀한 몸 받은 이 생에서 황소 걸음으로 가더라도 나는 최소한 그 길 위에는 서 있으리라.


30여 년 전 그때 그 개미 보살, 개미 거사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다시 한 번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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