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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불자, 불교대학에 가다/신자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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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6-02-06 11:09 조회2,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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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비행 (경북 봉화)




처음 축서사 불교 교양대학 강당에 들어선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료식이 다가온다. 어머님께서 불심이 지극하신 불자였기에 나도 자연히 절에 따라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불교가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그저 막연히 ‘자비’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기회가 있으면 정말 불교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믿고 행해야 할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 기회가 왔고, 나는 축서사 불교대학에 5기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가 알지 못했던 사찰 참배의 예절이며, 예불 순서, 불자간의 인사법 등을 하나하나 배웠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철에 접어들자 아득하기만 하던 부처님의 교리가 무언가 확실치는 않지만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문하시는 큰스님의 말씀이 차츰 가슴에 와 닿고, 법문을 들을 때는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어떤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생의 인연은 전생의 수많은 인연의 줄이 닿아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귀한 것이고, 현생에 불법과 연을 맺고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 수행 정진하는 것은 그 어떠한 연보다 어렵고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도 정말 깨우쳐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싶다. 큰스님께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위로는 보리심, 아래로는 중생제도로 자기의 마음을 닦는 것이 진정한 불교라고 법문하셨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행과 불행, 선과 악도 내 마음이 하는 것으로 자기가 스스로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므로 항상 선근공덕을 쌓으라고 하셨다. 예전에는 부처님 앞에 서면 소원을 빌었는데 지금은 부처님을 우러러 뵈올 때마다 참회의 눈물이 나온다. 지난 날 내가 지은 죄업은 수미산보다 높고, 항하사수(恒河沙數) 모래알보다 많다.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던가? 정직과 원칙을 가장해서 내 주위 사람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해서 마음 아프게 했던 게 후회가 된다. 나는 밝은 태양, 명경지수 같은 본래 면목은 보지 못하고, 항상 먹장구름 속의 형상만 바라보면서 자신을 기만했다. 내 이제 진실로 참회한다.


씨앗이 열매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 큰스님께서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도리를 믿고 인과에 순응하며, 욕심을 버리고 요행을 바라지 말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복을 닦으면 언제나 흐뭇한 기쁨과 평온함 속에서 살 수 있다고 하셨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도리를 저버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여 남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 보리심이라고 하셨다. 항상 따뜻하게 웃고,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서 두려운 마음을 없게 해주는 것이 자비라고 말씀하셨다. 구구절절이 참으로 옳고 귀한 말씀이라 생각된다.


나는 지금까지는 불교 신자라면 어려운 경문을 줄줄 외우고 부처님 앞에 절을 열심히 해야 진정한 불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생활 가운데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믿는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어느 누구라도 이룰 수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쁜 메시지인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깨달음의 길에 신심과 보리심을 낸 불자들은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우리 마음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시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고 밖에 있는 부처님을 만나려고 찾아다닌다. 우리 주변의 삼라만상은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고, 이 세상 자체가 그대로 다 부처님이고,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니, 이보다 더 귀한 진리의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심령상의 대자유의 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법당에서 공부할 때는 곧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집에만 오면 잊어버리고 본래의 못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찌하랴. 이 기회에 집에서도 수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오전 10시 30분, 불교방송의 사시예불 시간에 맞춰 54배를 시작했다. 정성을 다하여 실천을 하니 자신감이 생겨서 요즈음은 더 늘려 108배를 하고 있다.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참나(진실한 나)를 찾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시작한 참배가 이제는 매일 108배를 거뜬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또 한 가지의 실천은 아미타불을 염하는 일이다. 나는 매일 아침 1시간 정도 내성천 강변길을 산책하며 아미타불을 염한다.


물새들이 떼 지어 날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강변길을 따라 걸으면서 아미타불을 염하니 여기가 바로 극락정토로 보인다. 어찌 기쁨을 느끼지 않으랴!


이렇게 지난 일년간 불교대학에 입문하여 부처님의 교법을 배우면서 나름대로 불도를 실천하니 내 자신의 마음도 차츰 변해가는 것을 스스로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알게 모르게 미워했던 그 사람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자 다르게 느껴지고 미워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내 발의 발톱이 조금만 아파도 그 고통을 다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이웃이 불행하면 나 자신도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 몸의 일부분이라고 본다면 어찌 시기하고 미워할 수 있겠는가? 막연하게 느껴졌던 불법은 내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생활 속에서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간절하게 서원한다면 언젠가는 반야선(般若船)에 올라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언덕에 오르리라는 신념이 생겼다.

이제야 스님네들의 높은 뜻을 알 것 같다. 그분들이 왜 이 세상의 좋은 복락을 버리고 출가했으며, 그 어려운 불법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알겠다. 온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출가하여 왜 그 고독한 수행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겠다. 또한 이 세상의 가르침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겠다. 그렇다! 나도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겠다. 비록 몸은 세간에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부처님 곁에 있으리라. 내 이제 다시는 삼악도(三惡道)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부처님의 계율을 지킬 것이고, 불교의 확연한 이치를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는 정진을 계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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