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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의 지혜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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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6-02-06 11:06 조회2,6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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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空性)의 지혜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에 대해 부처는 대부분의 종교와는 다른 식으로 이야기했다. 예컨대 사후에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때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다분히 심리적인 관점에서 이를 설명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먼저 고통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첫 번째인 ‘고(苦)’의 명제이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집(執)’의 명제이다. 그런 다음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네 번째 ‘도(道)’의 명제이다. 이처럼 부처의 가르침은 아주 구체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내면적 성찰이 필요하다. 때문에 부처는 우리의 마음과 업, 공성(空性)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도 과학적 발견에서 흔히 사용되는 명확하고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통에는 세 가지가 있다. 매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이나 아픔을 말하는 ‘고통의 고통’, 우리가 흔히 행복으로 여기는 ‘변화의 고통’,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물질계에서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보편적 고통’이 그것이다. 이 고통들은 모두 욕망을 포함한 여러 가지 미망(迷妄)의 산물이다.


고통의 원인은 두 가지이니, 고통을 야기한 과거의 행위가 그 하나요, 고통에 대한 현재의 신경증적인 반응이 다른 하나이다. 한 예로, 코를 한 대 맞았다고 하자. 흔히들 이를 고통의 원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실 부차적인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얻어맞은 중요한 원인은 내가 과거에 행한 부정적인 행위에 있으며, 화를 내는 현재의 반응은 미래의 고통을 낳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고통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면 그것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마음의 작용양식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먼저 감각적 의식과 정신적 의식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신적 의식(생각과 감정과 느낌)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상태와 부정적인 상태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다음 우리의 모든 감정이 생각에서 어떻게 비롯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와 집착, 질투 같은 감정은 모두 생각의 정교한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이 지어낸 허구인 것이다.


고통의 근본원인은 무명(無明)이다. 이것이 자신과 관련된 것일 때는 흔히 자기애(自己愛)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의 근본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은 지성으로 하여금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캅제 조파 림포체의 말처럼, 집착을 끊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부처의 가르침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한다. “제 마음, 저의 행복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요?” 집착을 사랑과 행복, 기쁨 등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은 ‘변화의 고통’을 낳는 주요 원인이다. 한 예로, 초콜릿을 먹을 때 얻는 쾌감은 사실 고통의 원인일 뿐이다. 왜냐? 첫째로는, 그 쾌감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집착은 지속을 믿지만 쾌감은 가차 없이 고통으로 바뀐다. 먹으면 먹을수록 초콜릿은 혐오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둘째로는, 그 쾌감이 순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쾌감은 무언가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미망에 의존하고 있다. 셋째로는, 쾌감이 사실상 고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게 되는 법’이다. 초콜릿을 먹는 순간에도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모른다. 집착으로 인해 초콜릿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지면서 불만만 증폭되기 때문이다. (중략)


집착에 굴복해서 얻는 즐거움은 마약 중독자의 불안한 쾌감과 같다. 덧없고 불순하며 갈수록 더욱 큰 갈망만을 부추기는 쾌감, 우리는 마약중독자 같은 이들이나 집착으로 고통 받는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다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집착이 중독성을 갖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가 중독자이며 그 원인은 집착인 것이다.


집착과 분노, 질투 등은 전적으로 비본질적인 것이고,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부처는 가르쳤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우리 본연의 상태이다. 집착이나 분노, 질투 등은 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본연적인 기쁨은 지속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중략)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만큼 자신과 타인들을 고통에 몰아넣는다. 고통의 근본원인이 바로 무명과 자기애이기 때문이다. 무명과 자기애의 주요 기능은 개별적이고 제한적이며 두려움으로 가득한 자의식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집착과 질투, 분노, 자만, 우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그 파생물이다. 이런 감정들에 휘둘리는 것은 우리의 참된 본성에 등을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부처의 말처럼, 이런 감정들에 굴복하면 영원히 고통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타인에게도 고통을 주게 된다.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무명을 포함한 미혹된 감정들의 작용방식과 나를 비롯한 뭇 생명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집중’ 수행을 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는 ‘의식의 현미경’을 사용하여 무명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우리를 속이는지, 무명이 어떻게 자기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지 계속해서 분석해야 한다. 이런 탐색과 분석은 수행의 두 번째 유형인 ‘통찰’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집중’ 수행의 현묘함 속에서 우리는 무명이 만들어낸 환상들을 해체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라는 환상의 소멸을 체험한다.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이것은 에고를 발견한 뒤 다시 에고를 내던지는 것과는 다르다. 에고는 사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에고의 부재이다. 이런 부재의 발견은 곧 공성(空性)의 체험으로 이어진다.(중략)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에 ‘자기 실체’가 있으므로 모든 것이 ‘우리 마음의 투영’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상계의 모든 것은 ‘망상이 만들어낸 거품’일 뿐이다. 무(無)에서, 무정형성(無定形性)에서 생겨난 거품. 본성이 이러하므로 이 거품들은 결국 무로, 무정형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기 실체로 가득한 실재 세계가 있다는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불안해하면서 많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두려움은 무명(無明)을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며, 무명은 공성을 통찰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두려움은 환상으로 흐려진 마음에서 생겨나며, 억측과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억측과 잘못된 믿음이 바로 두려움의 본질인 것이다.


근심 걱정이나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역시 공성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걱정하는 대신 이해하고 실천해 보라. 그러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온갖 억측에 사로잡혀 있다.


공성에 대한 통찰력이 있으면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아주 간단하다. 지혜의 본질이 바로 기쁨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있으면 마음의 동요와 두려움, 걱정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런 감정에서 해방되면 자연히 기쁨이 찾아온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상 공성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단지 그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항상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항상 여기에 있다. 단지 이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엉뚱한 곳만 바라본다. 이를 진정으로 깨달으면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티베트의 위대한 수행자 밀라레빠도 산 정상에서 세상을 향해 껄껄 웃지 않았던가!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으니, 바로 실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재를 보면 우리도 언제나 웃음을 머금게 된다. 모든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면 너무 무거워진다. 당연히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가 있으면 온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


- 정신세계원, 달라이 라마의 자비명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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