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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정성이 큰 사랑으로/유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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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6-02-06 10:52 조회2,8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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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남 (용인시 기흥읍)



1981년 2월 그해 학년 말, 나는 27년간의 긴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전업주부로 돌아가기 위해 다니던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돌이켜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했던 지난 세월이었다.


퇴직 후로는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어서 오랜 만에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명상도 해보고 가끔 등산도 하면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지난 날의 추억 속을 헤매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견학할 때, 목탁소리에 맞춰 은은히 흘러나오는 스님의 독경소리에 이상하리만치 가슴 벅찬 환희심을 일으켰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였다.


나는 등산할 때마다 산사에 들러 스님의 법문도 듣고 법당에 들어가 참배도 드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도카드를 만들고 불자가 되어 절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곧바로 불교교양대학에 입학해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절에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불경도 외웠다. 가끔 큰스님의 법문도 듣고 새로 사귄 도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 눈앞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크고 넓고 광활한 세상이 전개되면서 활동 영역이 무진장 넓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아직은 사성제가 무엇인지, 육바라밀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때였지만 스님의 법문 중에서 ‘이타행(利他行)’이란 낱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서 나에게 채찍질을 하며 떠나지를 않았다.


‘남을 이롭게 한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자원봉사가 생각났다. 어떤 방법으로 할까? 궁리하면서 앞뒤를 살피다가 교육자 가족들로 구성된 봉사단체인 상록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남편은 어느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단체에 가입해 봉사활동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천성이 외골수인 사람이라 내가 봉사활동을 하려면 남편의 이해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우선 남편도 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독서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이광수 소설 『원효 대사』란 책을 사다 머리맡에 두었다. 의외로 재미있게 읽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계속해 불경을 비롯한 큰스님 법어집 등을 많이 구입해 주었다. 어느 정도 불교를 이해하고부터 남편은 쉬는 날이면 나와 같이 절에도 나가고, 시간이 있으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참선을 했다.


나는 곧바로 상록회에 동참하여 여러 선배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했다. 상록회의 활동 분야는 매월 정기적으로 날짜를 정해 놓고 회비를 모아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가고, 내복도 사다주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오는 일이다. 또 국군 통합병원, 보훈병원에 가서 수술실에서 쓰는 거즈를 접는 일, 우리 손이 필요한 일 등을 돕고 가끔 과일도 사다 나눠주며 위로를 해 드린다. 나는 누구를 돕는다는 일이 이렇게 보람 있고 즐거운 것인 줄을 미처 몰랐다. 봉사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매료되어 달력을 보며 그 날짜를 기다리는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상록회에서는 서울시 교원 유자녀 학생의 장학금과 체육선수 육성 지원을 위한 기금마련 바자회를 여러 해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재활용품을 이용하여 회원들이 손수 만든 공예품도 팔고,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들을 가지고 알뜰시장도 열어 기금을 마련하여 ‘교육자 유자녀 장학회’를 설립했다. 유자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는 그 가족으로부터 눈물로 얼룩진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1984년 4월 13일, 서울시 교육감으로부터 교육 가족으로서 귀감이 되는 활동에 헌신, 수도 교육발전에 기여했다는 내용의 감사장을 받았다.


1983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도 봉사를 시작했다. 우리가 맡은 일은 국군 통합병원에서 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중환자 수술실에 필요한 거즈를 접는 일이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들은 대부분 목숨이 경각에 달린 분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진심으로 그분들의 쾌유를 기원하며 일에 임했다.


이렇게 변함없이 10여 년간 고락을 같이 하며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상록회 회원들이 어느 새 나이도 많이 들고 남편들이 정년퇴직함에 따라 뿔뿔이 헤어져 단 4명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계속하자고 다짐하면서 다시 일할 사람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37명의 회원이 모이게 되었다. 또 그 회원들과 친히 지내던 도반들까지 동참하여 몇 달 안에 70여 명의 회원이 모이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칠봉회(七奉會)’라는 이름 아래 회장으로 선출되어 많은 회원들을 인솔하게 되었다. 칠봉회의 뜻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매월 7일, 27일, 이렇게 7자가 들어가는 날짜에 정해놓고 봉사한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칠봉회는 서울대학병원 봉사팀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으로 구성된 자원봉사 팀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였다. 1992년 연말 평가회에서 오랜 동안 자원봉사를 하여 환자 진료에 공로가 크다며 서울대병원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우리가 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끼며 나는 불교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한국불교법사대학에 입학했다. 우리 회원들 중에는 아직 불교 기초교리도 잘 모르고 기복신행으로만 일관하는 불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제대로 배워 그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오롯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비한 마음이 곧 도량’이라는 게송이 있다. 일반적으로 도량 하면 사찰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 게송을 염하다 보면 우리 칠봉회 회원이 봉사하는 이 장소가 바로 도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봉사의 길』이란 책을 구입해서 회원들에게 읽어 보라고 나눠 주기도 하고, 큰스님들의 법어집도 틈틈이 읽어보라고 권했다. 서로 돌려가면서 읽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다.


회원들이 질서 있게 한 자리에 앉아서 중환자 수술실에서 쓰이는 거즈를 접을 때는 그 손놀림이 흡사 기계와 같이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한 가지 일에 심취해 있는 듯 보인다. 이럴 때는 회원들의 마음이 한결같이 비어 있어서 잡념이나 번뇌망상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것이다.


굳게 다문 입과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잽싸게 움직이는 손놀림만 응시하는 그 표정을 굳이 표현한다면 ‘텅 빈 충만’이라고나 할까. 나는 몇 해 전 법정 스님의 수상집에서 바로 이 ‘텅 빈 충만’이란 말을 읽고 묘한 매력을 느꼈다. 도대체 그 경지가 어떠한 경지일까? 단 한 번만이라도 나는 그 경지를 체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의 봉사하는 모습에 비추어 이 말을 한 번 써보는 것이다.


우리 회원들은 한결같이 정성을 다해 봉사활동에 임한다. 회원들은 몇 년간 같이 모여서 봉사하는 동안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 회원이자 내 제자이기도 한 김종순 법우는 71사단 부사단장님이 근무하는 부대에 아직 군법당이 없어 안타까워한다는 말을 전해듣고 열심히 성금을 모았다. 그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고 우리 칠봉회 회원들도 많이 동참해서 군법당 건립에 일익을 담당했다.


1993년 어느 날, 나는 절에서 조상 천도재를 올리고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중 옆자리에 놓인 신문을 집어드는 순간 제일 먼저 나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 기사가 있었다. 잠실 복지관에서 ‘국어사랑 지도교사’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기사였다. 전화를 걸어보니 일주일에 2회, 2시간씩 20대에서 50대 중반의 20여 명에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모두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할 기회를 놓친 문맹자들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 경력이 있기 때문에 쾌히 승낙을 하고 다시 교단에 서는 기분으로 그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문자 교육도 중요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나는 그들의 인생 상담자가 되어 여러 가지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많았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책도 읽을 수 있게 되고 자기 의사를 글로 나타낼 수 있고 은행에 가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일을 볼 수가 있게 됐다.


그들은 하나 같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까지 말하며 기뻐했다. 나의 가르침이 그들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빌며 1년 과정을 마쳤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눈물 흘리는 분들께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며 ‘글사랑 모임’ 회원들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떠나왔다. 당시 나는 청주에 포교 때문에 자주 내려가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은 계속 하기가 어려웠다.


1995년 6월 무더운 여름날, 전 세계가 경악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봉사모임 회원들은 교대로 서울교육대학 운동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가족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긴 사고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음료수도 드리면서 한 달간 함께 했다.


이때의 봉사활동을 통해 나는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했으며, 참된 인욕바라밀과 보시바라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큰스님들이 평소 하신 법문들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으며,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도리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서울대학병원에서는 1990년대 초에 몇몇 교직원이 모여서 불우한 환자들을 돕기 위한 ‘함춘 후원회’를 설립했다. 우리 칠봉회 회원들도 매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참하여 많은 사랑을 나누어 드렸다.


서울대학병원에서는 매년 연말이면 1년간 여러 팀의 봉사활동에 대해서 평가회를 한다. 봉사활동 개시 20주년이 되는 해의 연말 평가회는 평년보다 다양하게 개최되어 글짓기도 하고 포상도 했다. 그날의 주제는 자원봉사라는 단어로 4행시를 짓는 것이었는데, 나도 입상을 하였다. 그때 내가 지은 시이다.


자원봉사란 아름다운 뜻을 나툼이요,


원력이 크고 넓은 것은 깨달음의 나아감이라.


큰 가르침을 받드는 것은 둘 중 하나를 받듦이요,


일마다 정성을 다함이 하늘공양과 같아라.



며칠 전, 나는 산사에 가서 깊어가는 가을의 경치에 흠뻑 젖어 큰스님을 친견하고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내내 큰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진정한 봉사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봉사인지를 모르고 아주 작은 것부터 헌신적으로 불우한 이웃에게 도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분명 내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20여 년간 해온 일은 참된 봉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문득 한없이 부끄럽고 내 자신이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랑과 희생은 행복한 가정, 행복한 이웃, 더 나아가 밝고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 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고 더 나아가 크고 넓은 바다를 이루어 나가듯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사랑이 모여서 더욱 큰 사랑을 이루고, 이 사랑이 세상에 가득 채워질 때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동체대비(同體大悲)가 공허한 가르침이 아님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자비행을 실천해 보아야 한다. 그런 작은 실천들이 모일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대로가 불국토로 화현될 것이라 믿는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신행수기를 인용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으로 지면 사정상 일부 축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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